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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참고자료]본인과 이정우(들뢰즈안)와의 논쟁 글모음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6-10-08 21:20 조회(11015)
   트랙백 주소 : http://freeview.org/bbs/tb.php/e001/6 


예전 홈피에 있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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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 글들은 아카데미철학원의 아카데미 논단에서
이정우님과 논쟁을 했던 글 모음들이다..
국내 들뢰즈안들의 평소 생각을 알아보길 바라는 맘에서 올린다..

논쟁의 서막은 내가 딴지를 걸어서 시작되었다.. 나는 평소에
화이트헤드와 들뢰즈가 서로 다른 사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또한 잘못 놓인 구체성의 오류에 빠졌다고 보는 들뢰즈를
별 것도 아닌게 최고의 형이상학이니 형이상학의 최전선이니 하는
꼬리표를 달고 다니며 유행하길래.. 배알이 꼴렸다고나 할까..크크

여기 게시판에는 그 논쟁 중에서 괜찮은 글들만 실어보겠다..
하나하나 빠짐없이 다올릴려니 분량이 조금 많다..
게 중에는 핀트가 벗어난 글도 있어서 임의로 몇 개만 발췌해왔다..

무엇보다 화이트헤드를 제대로 알고 있는 상태에서
본인의 글에 답변한 들뢰즈안은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은
나를 조금 안타깝게 했다..
그 점에서 요 밑의 김광현님 같은 분은 반가운 분이 아닐 수 없다..

꽤 긴 전문을 직접 확인하시려면 http://www.acaphilo.co.kr로 들어가서
아카데미논단게시판에 실려있다.. 암튼 확인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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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안들에게 선전포고를 알리는 첫 서막의 글

[들뢰즈여, 화이트헤드한테 아직 한 수 배우길..!]


근대 이후 20세기 형이상학자로 들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베르그송, 화이트헤드, 들뢰즈를 꼽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화이트헤드와 들뢰즈는 베르그송과 연관되면서 각기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 자신들의 형이상학을 제시하였다..

형이상학이 소멸된 줄로만 알았던 시기에 너무나도 당당히 위세를 떨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인지도를 점차 넓혀가고 있는 화이트헤드와 인기있는 들뢰즈의 형이상학은 서로 같은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서로 부딪히고 있는 측면이 있진 않을까?

이에 대한 얘기는 심도깊은 고찰이 필요하겠지만 여기서는 일단 가장 베이직한 사유에 대한 고찰만 얘기하련다.. 게시판 도배하기엔 글이 많아 버리니까.. 아무튼 이것은 들뢰즈 형이상학의 치명성에 다름 아니다..

일단 둘 다 생성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정말 그러한가.. 진정한 생성의 철학자로 불려야할 철학자는 누구일까?

들뢰즈는 사물의 상태와 운동을 다루면서 사물의 운동을 더 극명하게 부각시키고 있는 철학자다.. 예컨대(이것은 이정우, '시뮬라크르의 시대'(거름)라는 책에 씌인 예시이기도 하다) 우리가 야구장에 갔다고 치자. 야구공이 있고 글러브가 있고 방망이가 있고 심판이 있다. 각각은 사물의 성질 혹은 플라톤의 형상에 상응하는 것들이라고 할 때, 공이 글러브에 들어가는 것, 방망이로 공을 때리는 것은 운동에 해당할 수 있다. 여기서 플라톤적 사유에 있어선 사물의 운동이란 것이 단지 사물의 형상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플라톤은 근원적 본질을 형상에 두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들뢰즈는 사물의 형상과 형상 사이에 빠져 나가버린 운동에 주목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플라톤적 사유를 전복하면서 사건이 발현되는 특이성들의 장(場)에 대한 이론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결국 사건 개념을 통해 사물들의 표면효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의미발생의 정치유물론으로 확립시킨다.

마찬가지로 이진경의 텍스트("들뢰즈:사건의 철학과 역사유물론",이것은 '탈주의 공간을 위하여'(푸른숲)에 실려있음)에서 <임(있음)>etre과 <됨>devenir의 구별에 있어서 여기서 전자는 존재를 후자는 생성에 상응하는 개념일 수 있다, 여기서 들뢰즈는 <됨>이란 <임>에서 <임>으로의 변화를 가리키고 있는데, 이진경은 들뢰즈에게 있어서 이 <됨>이란 범주가 들뢰즈의 저서인 <의미의 논리>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한다고 보고 있다. 사물의 상태가 각각 a, b, c, d... 가 있다고 할 때 플라톤적 사유는 <됨>이라는 a에서 b로의 변화에 주목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상의 기술에서 여러분들은 들뢰즈의 치명적인 오류를 찾았는가?

지금 아주 짤막하게 나마 얘기한 부분들은 들뢰즈의 사유에 있어서 가장 베이직한 부분과 관련한 것이며, 이를 통해 그 자신의 형이상학을 축조해 나가고 있다. 그렇다면 들뢰즈가 이러한 베이스에서부터 구멍뚫린 얘기를 해대고 있다면 그가 축조한 형이상학이란 건물은 보나마다 부실 건물이 되기 쉽상일 것이다.

들뢰즈와 화이트헤드의 치명적 차이는 다른 게 아니다. 즉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선 사물의 성질이라는 거 자체가 운동이요, 생성으로 구성된다고 보는 입장인 것이다. 즉 화이트헤드의 체계에 있어선 <임>이란 것은 조금이라도 있을수 없고, 단지 <됨>만이 있을 뿐이며, 우리 일상의 언표사용에 있어선 <됨>이 <임>으로 기술되고 있을 뿐이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뢰즈는 바로 이 <임>이라는 걸 끝내 끊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글러브도 공도 방망이도 그것은 끊임없이 운동하고 있을 뿐이며, 그것이 사물의 성질을 결정하고 있을 뿐이다. <임>etre에 해당하는 나뭇잎이 붉은 <상태>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잘못된 추상에 불과하다. 우리가 사물을 아무리 무한히 미시적으로 쪼개어본다고 한 들 그것은 언제나 벡터 상에 있는 <과정>process인 것이다. 이것은 바로 화이트헤드의 가장 중요한 개념인 <현실적 존재>를 이해한다면 곧잘 알 수 있는 얘기다.

화이트헤드는 이 세계를 구성하는 궁극적 사물을 <현실적 존재>auctual entity 또는 직접 경험의 내용을 <현실적 계기>actual occasion라고 불렀다. 현실적 존재는 관계성의 범주가 성질의 범주를 구성하는 차원이다. 화이트헤드의 말을 빌리면 현실적 존재들은 복잡하고도 상호 의존적인 경험의 방울들drops of experience이며, 과정process의 미시적 단위들을 말한다. 화이트헤드에게서는 <사건>의 최소단위라는 것도 바로 <현실적 존재>에 다름 아니다. 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기조차 힘든 아주 마이크로한 세계를 기술하는 용어라는 걸 알 필요가 있다.

흔히 우리가 들뢰즈의 오류가 잘 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경험상에 있어선 이러한 <임>상태를 알게 모르게 긍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의 경험에서 내 앞에 놓인 컵이 주변사물과 끊임없이 <주고받기>운동을 하고 있는지를 잘 파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미시세계의 기술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꽃을 예로 들어보자. 1초 전의 한 송이 꽃과 1초 후의 한송이 꽃이 있다고 할 때 그 사이에는 온 우주의 맥박이 꽃과 더불어 들숨날숨 하면서 한 송이 꽃을 발현하고 있는 것이다. 결코 주변과 독립적인 별개의 사물이란 있을 수 없다. 이른바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관계성의 운동에 관한 우주론이며, <실재>를 <과정>으로써 기술하고 있는 형이상학인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생성의 철학자라는 명칭은 들뢰즈가 아닌 화이트헤드에게 더 어울린다과 봐야하지 않는가..! 이러한 점을 간과함에 있어서 들뢰즈를 비판했다는 바디우의 주장또한 내겐 나이브한 발상에 불과한 것으로 들린다.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에겐 난해한 것으로 인지되어 많이 알려져 있지는 못하고 잇는 실정이다. 그것은 화이트헤드는 이전의 철학이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고 보면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라는 차원에서 새로운 개념들과 신조어들로 유동하는 우주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곤혼스러워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 뿐인가. 수리논리학자이자 과학철학자였던 그는 20세기 첨단과학의 성과들을 그 자신의 유기체적 세계관의 구상 안으로 이끌어 들였기 때문에 어찌보면 대중적인 일반인들을 더욱 질식케 하는 합리성을 가지고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논하는 형이상학은 언제나 자명한 독단적 범주가 아니라 시험적 정식화에 불과하다고 얘기하고 있다. 즉, 화이트헤드의 우주론은 언제든지 수정폐기 가능한 열려있는 개방계로써, 절대이성이 아닌 문창옥의 표현대로 <실험이성>에 의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러한 실험이성을 결코 멈추어선 안된다. 화이트헤드는 인류의 문명을 발달케 하는 것은 바로 끊임없는 그러한 사변의 모험에 있다고 본 것이다.

언제 한번 본격적으로 둘의 형이상학을 대면시켜 벗겨볼 날이 오길 진정으로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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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공격이 이정우님을 겨냥한 게 아니라 전체 들뢰즈안들을
겨냥한 글이라서 뜻밖에도 베르그송을 전공한 사람의 답변을 받는다..

반론 1


마실(류종렬)님의 글 - 들뢰즈가 무어라 했길래?


[들뢰즈를 변호하며... ]

철학에서 존재와 존재의 내용과 그리고 존재가 외적으로 표현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우선 중요한 존재에 대해서만 언급하자.

대부분의 철학이 이 다른 차원을 공간이란 "개념"으로 설명하기를 좋아한다. 이 공간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해볼 수 있다. 하나, 소박한 관념론 상으로, 유클리드 수학의의 점과 같이, 크기와 부피가 위치가 없으면서도 정의상으로 어떤 지위를 갖는 것, 규정적 존재, 어떤 존재가 있는 것으로 가정한다. 이 점에서 길이로 너비로 확장하는 세계관(vision, 이것은 시각(visuel)이 아니다)을 갖는다. 다른 하나, 소박한 유물론으로 사물을 부수고 나누어도 더 이상 분할 할 수 없는 어떤 것, 그 무엇, 데모크리토스의 아톰과 같은 것이 있다. 이 규정은 구체적 실재물이 있는 것으로 여기지만, 그 미립자는 인간이 정의한 것이다. 쿼크까지갈까? 그보다 작은 소립자를 규정할 수 없어서 멈춘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기술적 방식이 모자라기 때문인가? 어째든 그 최소의 미립자들이 존재한다고 한다. 이 미립자는 임의적이다. 이 존재로부터 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입장이 외적 사물에 대한 인간의 경험의 한계 내에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점이든 미립자든, 그 존재는 불변하는 단일자 또는 단위로서 인간의 사유의 대상이다. 구체적으로 인간이 그 속에(dedans)에 있지 않으면서도 다룰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를 형상형이상학에 근거한다고 명하자.

다른 한편, 새로운 질료형이상학의 대두는 다르다. 우리가 여러 번 말했지만, 형상형이상학에서 인간의 오만은 자기 자신을 배제하고 다른 사물을 다룰 수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크레타인이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라고 하는 파라독스에서 언어 상으로 주체의 자기배제에서 성립한다고 보는 것은 오랜 인간 종족의 우상에 속한다. 보라, 256개의 삼단론법에서 유일하고 가장 중요한 AAA식 삼단론법의 전제에서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것도 자기를 배제한 형상적 형이상학이 전제되었을 때 가능하다. "말하는 사람도 (미래에) 죽을 것이다."라고 해야 하는가? 이 인간이란 존재자가 자기를 포함하는 사유를 배제한 이유를 기성(폐쇄)종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라는 것만을 우리는 여기서 언급하자. 그 알량한 유일 신앙종교가 얼마나 타자를 배척했던가? 그리고 그 배척에 얼마나 많은 증오심을 담았던가!

다시 돌아가서 자기를 포함하는 단위는 무엇인가? 생명 있는 존재는 자기를 어떤 위치도 크기도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최소한 생명있는 존재의 몸은 그 단위이다. 그 단위도 형상형이상학이 말하는 것처럼 불가분이다. 이 불가분의 반영이 형상론자들의 견해가 아닐까? 이 단위에는 자기를 포함하고 있다. 자기(자아 moi)없다면, 분할 할 수 있는 다양한 내용들로 되어있다. -이것은 이미 인식론적이다 - 이 다양한 내용들로 되어있는 존재(자)의 총체는 생명있는 존재들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형상론자들의 설명으로 안 되는 생성과 진화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새로운 철학의 도래는 진화론 다음에 나올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역사라는 것은 물질계가 전개와 확장을 걷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 세계관에서 보면, 종의 역사라는 것도 물질계를 이용한 물체들의 발명과 새로운 생산에 의해 달라진 것이다. 그래서 달라진 세계에 대한 적응하는 생명있는 존재는 변화한다. 이 존재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단위로서 생명있는 존재의 생명체는 순수공간과 물리공간도 다른 지리 환경적 공간에서 존재(있음)이다. 이 존재론은 기본적으로 자체가 변화면서 유동하는 물질로 되었으므로 생성(변화)하는 존재이다. 자 이 존재의 설명에서 진화의 긴 시간에 변화를 물체적으로 규명한 것이 진화론(transformation)이라 하자. 그런데 이 몸체는 물체처럼 다른 물체와 불연속이며, 세대간에도 불연속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대간의 유전형질에 의하여 대자아(Moi)가 연속된다고 밖에 말할 수 없지 않는가? 어느 생명있는 존재 누구하나, 그 자아(moi)가 저 생명성의 연속적 자아(Moi)로부터 연결되어 있지 않는 것이 있다고 부정하겠는가. 복제 인간이라고? 그것은 유전 정보 없이도 새로운 복제를 만들 수 있는가? 아마도 수소 탄소 질소 탄소 등을 배합하여, 단백질을 만들고 그것을 결합하여.... 한 생명 몸을 만든다하더라도 그 속에 그만한 유전정보를 넣지 않는 다음에야 어떻게 현생의 생명체를 만든단 말인가?

우리는 유전자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생명 있는 존재도 대자아의 연속이 내재해 있다. 이 대자아를 하나의 단위로 삼으면, 그 종의 존재의 총기억(유전 정보해도 좋다)은 하나의 단위이라는 것이다. 이 단위도 또한 불가분이다. 가분된 것은 종의 소멸인 셈이다. 총기억이 어떻게 발현되는가는 인식의 문제이며, 그것이 표면적으로 발생하는 효과(사건, 모상, 시뮬라크르)는 양태로서 실천론(사회 철학적 관심)에 속 할 것이다. 소위 베르그송이 자신의 철학을 과학적 경험론이며, 실증적 형이상학이라고 할 때, 인간 종이 지니고 온 총기억은 이미 인간이 경험한 것이고, 이 경험이 그 개체에 내재(dedans)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이 존재란란 이 네 번째 단위의 존재로서 소위 말하는 추상적 "정신"과 구분하기 위하여, 그는 이것을 심층자아(moi profond, 우리가 대자아 Moi)라 명명하였다. 이 총기억의 이 표출하는 방식은 형상론자들의 순수 공간, 물리공간, 그리고 유기체론의 환경과 다르다는 의미에서 토포스(장소)를 부여하지 않기 위하여 우리가 위상이라 부르고 싶었고, 베르그송은 기억이라는 것의 내재성이기 때문에 시간이라 부른 것이다. 이 시간은 공간적 표현에서의 물리학적 사차원의 시간과 전혀 다른 것이다.

이 네 번째 단위의 입장에서 세계관은 생명있는 세계관이다. 이 세계관에서도 세상의 총합(집합이 아니다)을 해명해야 할 것이다. 이 총합은 우리가 관련시킬 수 있다면 사회형성체(공동체 형성체)와 연관시킬 수 있다고 본다. 기억의 총합이 질적 다양성으로 새로운 환경에 대처해 나가면서 자기의 세계를 변혁시키고 그리고 상호적으로 자신도 기억도 변하면서 확장한다. 공동체의 조직화도 이런 방식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것을 해명하고자 하는 것이 들뢰즈의 정치적 입장이라고 본다. 대자아라는 단위의 생성자체가 존재이지, 존재라고 따로 존재를 설정하는 것 자체가 이미 형상적 존재론으로 빠지게 된다. 그런 파라독스에 빠지면 안된다고 강조한 것이 들뢰즈의 철학적 서술방식이라고 본다. 들뢰즈의 여러 책들은 사실상으로 이런 단위를 순수공간, 물리공간, 생명유기체적 해석으로 철학의 존재론를 본 것이 얼마나 파라독스에 빠진 것인가를 보여줄려는 노력이라 본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영혼적(orgiaque) 조직화의 방식은 이런 동굴의 우상에 빠진 자들에 대한 문제제기(problematique)이다. 그런데 대부분은 이 노력의 일부분을 보고서 들뢰즈의 철학도 형상철학의 한 부류 주위를 돌고 있다고 여기는 것은 우리가 보기에 잘못이다. 그리고 우리의 풍토상, 이런 영혼적 조직화(대자아의 조직화 즉 구체적 형성체 실현화)에 대한 거론이 어려운 것은 소위 말해서 민중 자의식의 억압, 좌파의 부재에서, 속 좁은 이성이 이들을 배제하면서, 어둠, 악마, 사탄으로 불렀던 것들에 대한 조그만 이해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에 관심을 가지면 무신론이라 하고, 좋게 표현해서 범신론이라 칭한 자들이 누구인가? 이것의 배경은 냉전적 사고에 오래서 극장의 오류에 빠진 것도 있지만, 아들러식의 정신분석적 견해가 스며들어 프로이트를 왜곡되게 이해한 이 땅의 지적 풍토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존재론에 대한 문제를 넘어서, 인식론에서도 본능은 인식이 아니다는 견해가 팽배한 것도 한 문제에 속한다. 시각(la vue)의 최종 결정은 촉각(le touche)에 있다. 모든 인식의 촉발은 신체에 있다. 그러나 반성적 인식은 기억에 있다. 우리가 보기에, 경험과 실증의 철학에서 과거가 현전(presence)하고 있다고 함에 있어서, 이 현전을 지성(속 좁은 이성)의 선 전제로 보는 관점에 대한 착각을 버려야 할 것이다. 무의식의 현실화는 탈주가 아니라 실현의 노력이다. 프로이트에서 보면, 현실화의 노력의 좌절로 다시 되돌아가는 것, 즉 이전의 선 전제(형상존재, 착각일 뿐인 것)로 되돌아가는 것이 도망(fuite, 탈주)이다. 생성 존재의 자기확장이 없는 되돌아감은 유아적 발상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같다. 다른 한편으로 소위 존재의 양상의 다양성에서 다양한 효과(결과물, 성공물)로서 시뮬라크르는 존재의 다질성의 가능한 측면들인 셈이다. 즉 (생성하고 있는 질적이고 유동하는) 존재는 거의 무한정한 실재성으로써(기억의 무한정 - 우리가 다 셀 수 없다는 의미에서, 물론, 수학자는 10의 n승으로 셀 수 있는 수로 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수는 실재(le reel)도 아니고 표지(signe)도 아니고, 기호(상징, symbole)일 뿐이다.) 환경적 현실에서, 우리가 자주 말하는 지정학적 위상에서, 행할 수 있는 것만을 (가능하게) 시뮬라크르 한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실재적인 것은 가능적인 것 보다 많다고 했다. 다시 말하자면, 형상론자에 동의하는 유일신앙적 종교에서 무한한 신이 이 세계를 모상(시뮬라크르)하는 반면에, 질료론자에서도 내재적 기억인 총체적 자아도 현실에서 가능한 시뮬라크를 생산한다. 이런 양태로 생산된 산물을 다루는 것은 존재론이라기보다 실천론이다. 왜 좌파의 시뮬라크르가 저기서는(프랑스) 현실화하고, 우리와 같은 곳에서 시뮬라크르로 되지 않을까라는 문제일 것이다. 역사가 다르다고 할까? 그래 기억이 다르다고 하자... 무엇을 논의해야 할까? 그래도 시뮬라크르...(?)... 우리가 보기에, 들뢰즈의 의도는 (대혁명도 경험하고 소비에트도 경험하고,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려는 혁명들을 경험했는데) 경험한 그 존재의 내재성이 왜 발현되지 않느냐고 문제 삼는다. 들뢰즈의 권능적 형이상학은 이 존재권능의 발현을 문제 삼는다. 이 존재의 권능이 구성하는 것도 구축하는 것에 아니라, 자신의 권능이 천상에 양도될 수 없는 그런 조직화(l'organisation orgiaque)에 대한 관심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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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의 글 - 들뢰즈가 헛소리 약간 했습져^^;



뭐..요밑의 제 글을 이해하시고 쓴 글인지..떱..

걍 쉽게말하져.. 머..어려운말 길게 필요없이
상식적이고도 일반적인 수준에서 생각해보세염..

것두 이정우님과 더불어 들뢰즈에 대해 한 가닥 하시는
이진경님의 텍스트에 나온 예를 들어서 말해보져..

나뭇잎이 붉다는 것은 <임>에 해당하는 상태고, 나뭇잎이 붉게 된다는 것은 <됨>이라더군여.. 근데 제가 글에서 지적하는 건 바로 사물의 상태를 말한 <임>이라는 게 사실의 범주에 들수없는 거라는 얘기올시다..

그러한 상태란 나뭇잎이 붉게 되어가는 과정상의 한 켠을 꽁꽁 얼려버린 개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져. 그것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죽은 개념일 따름임다욤..

걍 대가리 돌릴 필요 없이 쉽게 생각해봐염. 이 세계의 모든 사물들은 변화와 유동의 한복판에 있는데 어떻게 사물이 정지되고 정태되어 있을 수 있단 말인가여? 과연 그러한 경우란 것이 존재할까여? 그런데도 들뢰즈는 사물의 고정된 정태적 상태가 있다는 그 자체만큼은 인정한 채로 그는 '됨'을 강조하고 변화를 얘기하고 있는 것뿐이져..

제가 보기에 들뢰즈의 체계는 생성의 철학이라기보다
그저 생성을 강조한 철학일 뿐임다욤..

글구 화이트헤드에 대해선 왜 아무 평가와 언급이 없는지..떱..
언제기회되믄 화이트헤드와 베르그송의 시간관에 대한 차이도 언제함 글올리져..이것은 연세대 철학과 교수인 오영환선생님의 '화이트헤드와 인간의 시간경험'(통나무)에 이미 자세히 나와와 있긴 해염..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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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류종렬)님의 두번째 글 - 들뢰즈에게 의미란(?)


들뢰즈에서 존재<됨>과 의미화(signification)

우리의 철학적 사유에서 곡해 될 수 있는 것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 존재사의 두 종류 <임>과 <있음>도 그 종류에 속한다. 형상형이상학이 이 두 문제를 골몰한 것은 정의적이거나 임시적이다. 우리가 말하고자하는 질료형이상학론에서는 <있음>은 <생성>이며, <임>은 효과(결과)이다. 왜냐구요? <있음>인 '존재'는 다른 방식으로 논의되어왔죠. 우선 존재에 대한 것을 제쳐두고 보면, <임>인 '존재하는 것'에 대한 것은 제 과학의 담론이죠, 이 담론이 의미있다는 것을 부정한 것이 아니고, 표출로서 의미화의 한 부분, 그래서 각 분과학은 성립하는 거죠, 그것<임>은 그들이 탐구하는 구체적 학문의 자료에 속하겠죠. 그러나 그 재료에 대한 반성은 다르죠. 구체적 자료를 해명한다는 의미에서 형상형이상학이 경험에 근거하거나 경험을 이용하고 있지요. 그러나 형상형이상학이 존재<있음>를 말할 때는 매타적 의미로서 이미 경험을 떠난 것이죠. 그러면 질료형이상학은 어떤가? 질형학도 경험을 다룹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반성의 자료로 삼지요, 그런데 그 질료로부터 이완되어 다룰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죠. 반성에서 이완 될 수 없는 자료가 무엇입니까? 이 이렇게 그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생성>는 형상론자의 반성과 다르다는 것이죠. 우선 세 가지 측면의 차이 중에서 지시적 차이만을 이야기 할 수 있죠. 형형학의 존재와 질형학의 존재는 이렇게 "의미논리학"(우리는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의 저술은 또 다른 하나의"논리학"이라 보죠)에서 여러 파라독스로 보여주고 있죠. 소위 물자체를 인식의 대상이 안 된다는 칸트 이후로 사물에서 벗어난 반성이 사물의 <됨>을 말할 수 있는 것도 원자론적 입장이 아니라 장의 입장이죠. 그 장의 속에서 물질을 다루지만, 인간의 인식은 밖에 있습니다. 한번 더 경험에 대한 무매개적 관계를 찾아보니, 생명현상에서는 그 질료 밖에서 반성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죠. 이런 의미를 확장하면... 기억, 역사, 지정학과의 연관을 말할 수밖에 없지요.

그리고 <임>에 대해서 효과라고 하는 것은 <임>은 상식에 근거하죠 그러나 <임>들과의 관계는 상식으로 잘 해명이 안되죠. 여기는 우연(hasard)도 있고, 우발(contingence)도 있고, 돌발사건(accident)도 있죠. 여기서 이들의 관계들이 사건(l'evenement)이죠. 이것을 해명하는 인문 사회과학이 얼마나 개연성에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죠. 자연과학적 사실조차도 법칙 정립적이 아니라, 개연성의 일부를 법칙화한 것이죠. 단지 이 관계의 개연성이 자기의 한계 내에서 조금 길게 계속되고 있을 뿐이죠, 이런 임의 관계를 생명있는 존재들과 인간들이 사는 삶에서 <임>의 관계를 정립해 보려고 한다면, 모든 부분에서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는 것을 실감하리라 봅니다. 그러면 도대체 질형학에서 <임>은 무엇인가? <임>은 생성<됨>의 외화된 표출의 일부분이죠, 이렇게 단계적으로 들어가면, 이미 인식론의 차원으로 들어간다고 하죠. 그러나 <임>이 상식적으로 결과(효과)이죠. 이런 효과는 어떻게 현실에서 연관을 맺죠. 참으로 서로 관계없어 보이는 두 개의 사건, <배 떨어지다> 와 <까마귀 날다>은 인간의 해결할 수 없는 불가사의를 포함하고 있을까요? 배 떨어질 때가 되었고, 까마귀 날 때가 되었다. <만경대정신...우짜구 저짜구> 할 때 되었고,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우짜구저짜구> 할 때도 되었다. 도대체 <임>에서 무엇이 관계일까요. "의미논리학"에서, 우리가 보기에, 실천론과 관련하여 양태론이라고 말할 때, 이런 <임>의 관계를 내재적 <생성>의 자기 의미화(signification)에 대해 문제 삼아야함을 말합니다. 배의 의미화와 까마귀의 의미화는 다른 것이죠(차이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이런 양태와 관련 있는 것을 구조주의 언어학은 잘 보여주고 있죠. 이미 실재 대상은 기표와 기의와 무관하다고 했죠. 그리고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임의적이지, 법칙적 관계가 아니라고 합니다. 프로이트가 더 재미있죠. 이 기표로 등장한 것이 기존의 기의와 관련 없이도 의미가 있다고 했죠. 왜 기존의 상식적 차원과 다른 의미가 존재한다고 했을 까요. 이 다른 의미로 등장한 것 경험도 아니고 기표도 아닐까요? 그것은 기억의 문제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무의미하다고 여긴 것, 이것이 의미 있는 것이고, 또한 이 의미의 실현을 인간본연의 실현(승화)라고 보죠. 무의미한 것, 기표로서 내보이지도 못한 것, 이제까지 기의로서 정립하지 못한 것, 민중의 분노, 미친자의 광기, 이것들도 의미 있고, 그리고 현전(presence)에서 양태로서 표출되고 있습니다. 이런 표출에 대하여 들뢰즈는 줄여서 세 가지가 있다고 했었지요. 우리의 과거의 사실이 과거의 추억으로만 있다라고 믿는다면 할 말 없지만, 수많은 무의미가 도처에 지금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한 것입니다. 그것이 <임>들의 양태입니다. 안보고 살 수 있다면, 형형학처럼 그 자신은 이미 배제된 논리에 있죠. 수학과 물리학이 소위 말하는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도 마찬가지죠. 그러나 질형학에서 우리들은 그 속에 있으면서 느끼죠. 단지 안보려고 하거나 없었던 것으로 무시하려하죠.

우리들, 기표들은 한번 태어나서 가면 되돌아 올 수 없습이다. 이 세상 누구도 갑니다. "의미논리학"은 이것을 잘 느껴보라는 것입니다.

가기 전에 새로운 공동체는 가능할까? 지금까지 지속하고 있는 <됨(devenir)>이 새로운 <임>이라는 의미 있는 공동체를 표출할 수 있을까? - 그것은 유토피아인가? 어디에도 장소(topos)가 없다. 이 두 부정적 개념을 바꾸면, 딱 한군데 그 장소가 있다. 그 사물 속에(dedans), 우리가 표현한다면, 생성 속에... 그래서 그것은 양태로서 표출이 가능할 것이다. 생성에는 가능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빙산의 일각처럼, 빙산(생성)에 더 많은 의미가 있다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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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의 글 - 들뢰즈에게 의미란(!)


<있음>이 생성이라녀?? 이진경님의 텍스트에는 분명히 <됨>(혹은 되어감becoming, werden)이 생성이라고 나오던뎅.. 눈씻고 찾아봐도 <있음>이 생성이라는 언급은 못봤슴니다욤..

그렇다면 님이 말한 <있음>과 <됨>(되어감,becoming,werden)은 같은 건가여? <임>이 효과라는 건 이미 저도 밑에서 짧게나마 언급한 것이구..

들뢰즈에 있어서 <의미>란 표면효과로서의 사건에 다름아니었져.. 그것은 물체들이 운동할때 그 표면에서 발생하는 하나의 효과였구.. 뭐 이정우님의 텍스트에도 나온 얘기지만..떱

또한 제 글은 구조주의 언어학을 멀라서 제기한 문제도 아니었슴다.. 요컨대 그것은 세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들뢰즈의 내적 체계로써도 기술될 수 있겠지만 화이트헤드적으로도 얼마든지 기술이 가능하다는 얘기였슴다.. 여기서 그 차이에 따른 문제제기였고.. 전 거기서 화이트헤드에 더 손을 들어준 것이구염..떱..

근데 여긴 화이트헤디언의 글은 어디 없나봐염?
요기 게시판은 들뢰즈와 관련된 얘긴 닿고 물리도록 논술하는뎅..--;

사실 전 들뢰즈를 많이 아시는 분들도 화이트헤드에 대해선 잘 모르시고 계시는 분들이 많다고 봄다..
솔직히 저는 이정우님 또한 화이트헤드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슴다욤.. 이정우님은 화이트헤드에 대해서 말하길 화이트헤드는 자연과학에만 몰두한 반쪽 지식인이요, 아쉬운 형이상학자라고 하던데..

화이트헤디를 비판적으로 공부한 사람 중에도 이정우님의 이같은 얘길 받아들일 사람이 누가 있을런지..떱.. 걍 제 설명 필요없이 요기 철학 아카데이에서 강의하시는 문창옥 선생님께 바루 여쭤보시던가 아님 화이트헤드 관련자료를 보시던가 하셔두 될 듯..

암튼지 존얘긴 감삼다염..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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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류종렬)님의 세번째 글 - 들뢰즈의 존재, 생산하는 중


자연(존재)은 <생산하는 중>, 즉 생성이다.

존재가 부동으로 <있음>으로 여긴 것은 서구 철학사의 겉보기의 주요 흐름이었습니다. 이것을 잘 해명하지 못한 것은 인류의 인식 수준이 낮았다고 해야할까 봅니다. 플라톤 이래로 2500년 동안 철학사의 주류였던 부동의 존재론이 변환을 가져온 것은 19세기에 와서야 가능한 것이 이상하지요. 존재가 부동이 아니라 유동이라는 문제제기는 여러 방향에서 있었지요. 물론 의문제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성립도 가능했다는 것을 먼저 언급해야겠지요. 자, 물리학에서는 물질이 원자라는 입장보다 장이라는 입장이라는 파라데이와 맥스웰의 가설이 있었습니다. 열역학에서는 열열학 제1법칙에 맞지않는 제2법칙에 대한 까르노의 논의(엔트로피)가 있었지요. 그리고 과학이 일정한 자기 한계 내의 개연성과 확률론에 근거한 관계법칙일지 모른다는 문제제기를 꾸르노가 했지요. 생물학에서 생명있는 존재가 자기변형을 한다고 본 프랑스 진화론자(transformiste)다음으로, 스펜서의 심리학의 진화론(l'evolutionisme)과 더불어 다윈의 진화론이 나왔지요. 그리고 인간의 본성이 이미 주어진 부동의 형상으로부터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생성, 즉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정신병리학(이 학문은 정신분석학의 전신이다)에서 문제제기를 한 것이죠.

이런 문제제기(problematique)는 존재가 부동으로 <있음>이라 설명하고 해석하기보다,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라는 존재<생산하는>를 담론의 장으로 만든 것이 베르그송입니다. 물론 이미 눈치챘겠지만, 이런 담론이 이미 스피노자에 있었지요. 왜 스피노자를 소박한 관념론자가 무신론으로, 통속적 유물론자가 범신론으로 몰아 부쳤던가를 반성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물리학에서 생성(운동, 유동)하는 사물의 장을 담론으로 삼든, 에너지론에서 변화하는 내용의 변질을 엔트로피의 역행으로 문제삼든, 다양 다질, 즉 내적 변화를 겪는 재료들을 수집하면서 결과들을 중시하면서 (예외를 제외한) 법칙을 삼으려고 하든, 생명의 존재의 세분화(수학의 미분화와 다르다)를 겪으면서가지 존재자들의 다양성과 다질성을 외적으로 표출하려고 하는지를 문제 삼든 간에, 이들에게 논의는 인간이 논의의 장밖에, 우리가 표현하는 담론의 위상밖에 있다는 것이다. 정신병리학에서 인간은 자신이 밖에 있을 수 없는 변질하고 변화하는 존재임을 잘 경험(실험, experience)하는 장(또는 위상)이라는 것이죠. 인간을 담론으로 삼는 경우에 인간 스스로가 예외일 수 없지요. 이런 존재에 대한 담론의 장을 "시간"이라 표현한 베르그송은 존재가 "지속"이라고 했죠. 지속이란 말을 통하여, 물리적으로 <운동>하고, 에너지적으로 <변화>하고, 분자적으로 <진동>하고, 생명적으로<생성>하고, 질료적으로 <유동>하는 존재에 대한 학, 우리가 보기에, "존재론"을 성립시킨 것이지요. 인간의 본성에 대한 반성으로 낌새를 알린 것은 키에르케로르,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트등이고, 형이상학에서 이 눈치를 챈 것이 후기 구조주의라고 보죠. 2500년 존재는 <있음>에 대한 논의였는데, 이제는 <생산하는>을 다룰 때가 되었다는 것이죠.

이 생산하는 자연,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학문이 생긴지 얼마 안되어서 곡해가 많은 것이기도, 하고 소위 말해서 베이컨이 말하듯 (2500년 계속된) 종족의 우상에 빠져,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지요. 인간은 이상하게도 자기가 배우고 익힌 영역을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 난제입니다. 다시 태어나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 이 <생산하는>본성(장, 위상)에는 가역성이 없죠. 어느 놀이의 길을 가든 살다가 가면 되돌아 오지 않습니다. 물리적으로 <운동하는> 담론으로 가든, 에너지적으로 <변화하는> 담론으로 가든, 생명적으로 <생성하는> 담론으로 가든, 질료적으로 <유동하는> 담론으로 가든, 그 표지(signe)들이나 기표들에 매이지 말고 그 본성(생산하는)을 다룰 때, 그 기의가 존재론이라는 것이죠. 욕망하는 기계(la machine desirante)라는 메타퍼적 표현도 이미 유동하는 인간이라는 의미이죠. 한 인간이 한꺼번에 여럿을 다룰 수 있는 신적 권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람들은 여러 부분에서 제각기 다른 담론의 놀이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 담론의 놀이가 많다는 것이 다른 종과 차이(세분)이겠죠. 우리가 이 담론의 위상들을 담론의 놀이터 즉 담론꼬뮨(마실, commune)이라고 부르고 싶었습니다. 인류는 이 꼬뮨들을 토대로 공동체의 실현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보죠. 그러나 인간 개체는 간다는 것, 즉 각 개인은 불연속입니다. 그러나 인류는 멸망할 때까지만, 꾸르노의 개연성의 개념을 빈다면, 연속성입니다. 이 연속성 총체를, 언표로 표현 할 수 있다면, <생성(le devenir)> 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겠지요. ... ...

<생산하는>는 명사가 아닌데... 그리고 지시의 표현은 명사<생성>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지시(la desigantion)의 파라독스 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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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의 글 -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에 빠진 들뢰즈(전문)

*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에 빠진 들뢰즈(전문보실려믄..--;)


우리시대에 들뢰즈의 권위가 아직은 견고한 철옹성인가 봄다.. 젤 첨 문제를 야기한 제 글이 들뢰즈의 그러한 권위에 다소 도전적으로 댐벼 보인다는 점 익히 잘 알고 있는 바임다욤.. 물론 택두 안되는 오만방자한 넘의 치기어린 생각으로 볼 수도 있을것이구..

그래서 그 글에 대한 전문을 걍 아예 소개할까 함다.. 젤 첨 밑에 썼던 제 글은 전문에 대한 핵심적 요약만 걍 쉽게 썰을 플어 썼던 글이져.. 그런데 저의 전문도 짧은 글이기에 정확하게 말하자면 들뢰즈의 텍스트원전보다 이진경님이나 이정우님이 쓰신 글에 나타난 들뢰즈를 비판적으로 보고 있을뿐임다.. 물론 그럴경우에도 제가 독해한 들뢰즈가 조금이라도 잘못된 부분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지적바람다..

근데 요밑에서도 제가 들뢰즈에 대해 잘못 기술한 게 있던 가여? 오히려 사물의 상태라는 거 자체가 사실경험의 범주에 들어올 수 없는 죽은 개념이요, 잘못된 상상적 추상에 불과하며, 그것은 단지 언표사용에서 그렇게 기술되고 있는 차원에 불과하다는 제 얘기를 되려 못알아묵으신 분위기 같은디..

그렇기에 죽은 사물을 다루는 들뢰즈의 형이상학은 이에 대한 분절 혹은 접합 또는 계열화에 따른 유물론의 운명을 지닐 수 밖에 없는 것이구.. 이것은 또한 그 베이직한 사유에서부터 위상학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을 수밖에 없었음을 징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구염..

무엇보다 들뢰즈를 독해하는 분들 중에는 20세기의 또다른 형이상학인 화이트헤드의 철학에 대해서 아시는 분들은 정작 얼마나 있을련지..떱.. 그래서 전 제발 원컨대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비판적으로 독해하시는 분들의 글이라면 더욱 좋겠슴다욤..ㅡㅡ;

이제 앞서 제가 썼던 글에 대한 본래 전문을 보시길 원하신다면, 아직 미완성인 저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이지만 아래의 주소를 드래그 하셔서 가시면 각주까지 볼 수 있는 전문을 다운로드 할 수 있슴다욤..(요기 게시판은 첨부화일 기능이 없어서리..ㅡㅡ;)
 
 
  
사실 들뢰즈가 화이트헤드에 대해 기술한 부분은 고작 주름에 아주 짧은 몇귀절이라고 하더군여.. 아직 그 책은 번역되진 않은 걸로 압니다만 예전에 이정우님이 그 부분을 번역하신 글을 읽어보긴 했는데.. 별 특별한말은 없더군여.. 그래서 전 화이트헤드를 비판적으로 독해하시는 분의 글을 기대하고 있는 것임다욤.. 물론 정합적인 근거에 바탕해서염..


-아참.. 요밑의 마실님의 글, 제가 기대한 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참 좋았슴다염..(적어도 저밑에 하나마나한 얘길 계속 하시는 어떤분보단..^^;) 특히 담론꼬뮨을 토대로 인한 공동체의 실현.. 평소에도 정말 공감하고 있는 부분이걸랑염.. 화이트헤디안의 쓴 글 중에도 이런 글귀가 있더군여.. 조금 통하는 뜻이라고 보여지는..

"철학은 진정한 의미로써의 Dailogos(대화)의 산물이다."

그냥 <대화>두 아니구 <진정한 의미로써의 대화>라는 군여..
부디 다양하고도 생산적인 얘기가 오고가길 바라며..
구롬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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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국내들뢰즈안으로 일가견이 있다는 이정우님을 향한 글이다..

본인의 글 - 이정우님께..(들뢰즈사유의 구멍뚫림(?!)에 대한 질문)


이정우님의 책에 나오는 사례를 들어서 글을 올리져.. 예컨대 책에 보면 야구장에 갔을 경우 글러브, 야구공, 야구방망이, 운동장, 선수, 심판 등등이 있다고 나옵니다.. 이것은 각각 플라톤의 형상에 대응할 수 있는 사물의 성질이라고 하셨더군여.. 그러시면서 반면에 운동장에는 야구공, 글러브, 방망이만 있는 게 아니라 운동이 있다고 했슴다.. 즉, 공이 글러브에 들어가는 것, 방망이로 공을 치는 것, 심판이 아웃 혹은 스트라이크라고 외치는 것 등등을 말하져.. 이정우님은 말하길 그 운동하나하나 사건하나하나의 차원이 부정법의 특이성이라고 말씀하더군여.. 곧, 특이성은 형상과 형상 사이에 빠져나가버린 운동성, 바로 그것을 포착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셨슴다.. (마찬가지로 이진경 씨의 책에는 나뭇잎의 변화를 예를 들면서 <임>etre과 <됨>devenir을 논하고 있습져..)

일반화시켜서 말할 경우, 사물이 A, B, C, D 있다면 플라톤의 형상은 곧 이들에 또는 이들의 성질들에 각각 대응하지만 특이성은 바로 A에서 B로, B에서 C로, C에서 D로 가는 운동, 사건에 대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슴다..

이상에서 볼 때 제가 보는 들뢰즈 사상의 구멍뚫림은 들뢰즈에게서는 글러브, 방망이, 야구공 등등 그 또한 하나의 운동이며, 사건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얘기가 바로 제 지적이었슴다.. 어떻든 간에 우리가 제아무리 사물의 <됨>devenir을 강조한다고 해도 그것이 사물의 <임(있음)>etre을 인정하고 들어갈 경우, 그것은 경험세계의 사실의 범주에 들 수 없는 추상에 불과할 뿐더러, 결국 그것은 과정상의 세계가 아닌 꽁꽁 얼려버린 죽은 사물들의 접붙임을 논하는 유물론으로 치닫을 수 밖에 없다고 봐짐다..

즉 들뢰즈는 플라톤을 완죤히 거부했다기보다 그저 플라톤과 또다른 대척점에 서있는 것뿐이라는 얘기져.. 이 점에서 현대 프랑스 철학의 주된 경향인 반플라톤주의에 정면으로 맞서서 플라톤주의 진영을 구축하고자 하는 알랭 바디우의 들뢰즈 비판또한 그저 평행선적인 아규먼트에 불과한 걸로 보여질 뿐임다..

반면에 들뢰즈와 또다른 차원에서 생성의 철학자로 평가되는 화이트헤드에게서는 사물의 성질이란 것도 끊임없이 생성하는 사건으로써 구성될 뿐이기에 오히려 야구공, 글러브, 방망이 등등 그 조차도 화이트헤드에게서는 사건에 해당한다는 것임다..

무릇 화이트헤드에게서는 모든 게 변화와 유동의 흐름에 가운데 있기 때문에 도대체 사건 아닌 게 없는거져.. 저 먼 우주에 있는 하찮은 먼지 하나도 일단은 기본적으로 사건에 속한다고 보져..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우주는 매순간 끊임없이 생성되는 무수한 사건들의 연계망으로 이뤄져 있슴다..

예컨대 분자는 현실적 계기들의 역사적 경로historic route이며, 이러한 경로가 곧 하나의 <사건>일 수 있는 거져.. 극단적 유형의 사건의 가장 최소단위가 바로 <현실적 존재(계기)>구염(과정과 실재 p.179).. 단지 현실적 계기에 따른 그 기능과 등급에 의해 의미의 비중 또한 차이를 둘 수 있을 뿐임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생성과 사건의 철학자'라고 불러야할 사람은 누구인지.. 밑에 논쟁들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전 들뢰즈가 아닌 화이트헤드의 편을 들어준 것이구염.. 이제 이러한 제 의도가 마냥 근거없는 일방적 억지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이해하시길 바랄 뿐임다..떱..=='''

들뢰즈는 작가를 무덤 속에서조차 울게 만드는 글은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는데 저또한 심적으론 그러합니다. 하지만 합리주의를 향한 모험은 언제나 끊임없이 계속될 수밖에 없기에 저는 단지 정직한 의문만을 가지고 옳고 그름만을 논해보자는 차원일 뿐인데, 이것이 들뢰즈 사상 흠집내기로 비춰질 수도 있다는 점 또한 익히 잘 알고 있는 바입니다.. 무엇보다 세계 안의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이들에게 들뢰즈의 사유가 줬던 영향과 가치 또한 조금이라도 폄하되어선 안될 것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모든 철학사상들을 보면 그것은 언제나 참신한 개시와 비극적 종말로 점철되어 왔슴니다. 여기에는 들뢰즈도 물론 화이트헤드도 예외일 수 없겠져.. 그렇기에 모든 합리적 비판에 서 있는 국면에서 볼 때 우리가 선택하는 철학이란 고작 지금 최선의 철학일 수밖에 없을 따름이져.. 그 어떤 것을 자명하고도 완벽한 이론이라고 볼 경우 거기에선 앞을 향한 통찰의 느낌을 찾기 힘들어 집니다..

우리시대에 들뢰즈의 권위는 너무나 자명한 걸로 여겨져 있슴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진보는 언제나 자명한 것을 초극함으로써 이뤄져 왔져.. 그렇기에 들뢰즈를 참으로 생성의 철학자, 사건의 철학자로 볼 수 있을는지여.. 저는 이에 대해 무척 회의적인 입장이걸랑여.. 아카데믹한 철학의 발전적 논의를 위해 이정우님께 한 수 듣구 싶어서 이렇게 글을 올림다.. 그럼 답변을 기다리겠슴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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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님의 답변

사건이란 "무엇인가가 일어났다(something happened)"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모든 것이 사건이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푸른 잎도 사건이고, 붉은 잎도 사건이고, 푸른 잎에서 붉은 잎으로 '됨'도 사건이라면, 결국 사건에서 사건으로 또 사건으로 간 것이므로 역설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 됩니다.
즉, 우리에게 푸른 잎으로 보이는 경우와 붉은 잎으로 보이는 경우가 그 사이의 됨과 전혀 구분되지 않습니다. 아무런 구분도 없는 곳에서는 아무런 사건도 안 일어납니다.

사건이란 관계 속에서 성립합니다. 깃발이 흔들리는 것은 사건이지만, 모든 깃발이 원래 흔들리고 있었다면 사건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중 어느 한 깃발만 멈춘다면, 오히려 그것이 사건이지요. 사건이란 반드시 상대적으로 발생합니다. 모든 것이 운동할 때에는 멈추는 것이 오히려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건은 차이에서 생깁니다. 그런데 차이는 언제나 일정한 맥락에서만, 즉 두 존재론적 층위가 갈라지는 접면에서만 성립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장님이면 눈 뜬 사람이 차이입니다. 즉, 일반성의(ordinary) 지평 위로부터 특이한(singular) 경우가 발생할 때 차이가 생기고, 사건이란 항상 이 차이로부터 생깁니다.
운동장에 글러브, 공, 방만이가 그냥 쌓여 있다면 아무도 돈과 시간을 내서 운동장에 오지 않습니다. 방망이가 공을 치고, 글러브가 공을 받을 때에만 사람들은 시간과 돈을 들여 운동장에 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요컨대 사건, 생성만이 존재할 때에는 역설적으로 사건, 생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상대성, 차이, 층위의 갈라짐, 관계와 맥락 등등을 조건으로 해서만 사건과 생성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화이트헤드의 미시적 분석은 당연히 들뢰즈의 사유속에 흡수되어 있습니다. '분자적'과 '몰적' 같은 개념들이나, dx 기호를 사용한 '미분적 관계'의 분석, '발생적 요소들과 통합'의 개념 등등이 모두 미시와 거시의 관계를 논한 개념들입니다.
이런 개념들은 멀리로는 스피노자("에티카", 2부)와 라이프니츠에게서 연원하고, 가까이로는 베르그송과 화이트헤드에게서 연원합니다. 들뢰즈는 화이트헤드의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화이트헤드가 들뢰즈보다는 오히려 훨씬 고전적인 철학자입니다. "과정과 실재" 도입부에서 필연성, 보편성 등을 강조하고 있으니까요.굳이 억지로 말한다면, 들뢰즈보다는 화이트헤드가 플라톤에 오히려 더 가깝다고 해야겠지요.

들뢰즈와 화이트헤드의 차이는 화이트헤드가 물리학, 생물학 등을 토대로 우주론(cosmology)를 건설한데 비해, 들뢰즈는 '표면(surface)' -- 자연과 문화의 접면 -- 을 보다 적극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문화의 이해에 큰 기여를 한 점에 있습니다. 같은 존재론적 토대 위에서 주안점을 달리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가 플라톤주의자라는 생각(바디우)이나 화이트헤드가 플라톤적이냐 반플라톤적이냐라든가 하는 생각 등등은 적절한 질문이 아닙니다.
플라톤 자신이 "소피스테스"에서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플라톤"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이미 존재의 본질을 'dynamis'로 보는 입장을 전개했습니다.
'생성이냐 영원이냐', 또는 (영미 철학의 화두인) '실재론이냐 유명론이냐', ... 같은 이분법적 질문들은 소모적인 질문들입니다. 문제를 이렇게 설정해 놓고 이야기하면 항상 시계 불알이 왔다갔다하는 형국이 됩니다.

그리고 어떤 철학자를 단적으로 숭배한다든가 단적으로 거부하는 태도는 학문적 태도가 아니라 종교적 태도입니다.
누군가를 '평가'하려고 하기 전에 우선 그를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평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각 철학자들의 텍스트들을 꼼꼼히 읽으면서 그 구체적 내용을 이해하면 됩니다.


............................................
본인의 재반론


안녕하세요.. 답변 감사합니다.. 그럼 다시 반론을 드리겟슴다..

먼저 이정우님은 모든 것이 사건이라면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모든 깃발이 흔들리고 있다면 그것은 사건이 아니라고 하셧습니다.. 더 나아가 이를 두고 사건/생성만이 존재할 때는 역설적으로 사건/생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같은 언급은 먼저 번 제 글의 어느 한 부분을 간과한 얘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현실적 계기로써의 사건이요 생성일 뿐입니다.. 단지 그것은 사건의 등급과 기능에 의해 의미의 비중이 나뉘어질 뿐이라고 먼저 번 글에서 분명히 말씀 드렸습니다..

즉 경험세계의 범주에 있어서 모든 깃발이 동일하게 흔들리는 상황이란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거져.. 차이에서 사건이 나온다는 점을 잘 아신다면 이 우주를 이루는 조그마한 입자마저도 결코 같은 동일함을 가질 수 없다는 점 또한 잘 아실 것임다.. 그렇기에 기본적으로 상대적인 게 아닌 게 없는 거구, 또한 화이트헤드에게서도 관계적이지 않은 게 없는 거져..

그리고 이정우님은 모든 사람이 장님이라면 눈뜬 사람이 차이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본다면 여전히 상대적이니까 장님은 눈뜬 사람에 대해서 또한 차이일 것입니다. 요컨대 들뢰즈안들에게서 느끼는 점은 이들이 말하는 사건이라는 게 그 차이를 느끼는 주체자가 부여하는 일종의 의미부여같은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염.. 그럴경우 다분히 상대적인 사건들의 나열에 있어서 정치적으로 어떤 유효한 의미의 코드를 택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귀결되기 쉽상일 것임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또다른 문제로 이어지는 데 그것은 인식과 지각의 문제와도 필히 연관된다는 것임다.. 그것은 사태를 인지하는 주체자가 처한 상황과 그리고 그와 관련한 느낌의 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져.. 그렇다면 사건/생성으로써의 현실적 계기의 등급과 기능은 다분히 느낌의 강도와 처한 상황과 연관지어짐으로써 그렇게 나뉠 수밖에 없다고 보여짐다..

모든 게 사건, 생성 아닌 게 없다는 것이 화이트헤드의 입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정우님은 그럴 경우엔 역설적으로 사건, 생성이 존재할 수 없다고 하셨슴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정우님의 언급안에서조차 화이트헤드와 들뢰즈는 서로 다르고 있지 않슴까.. 결국 화이트헤드에 미시적 분석이 들뢰즈 안에 녹아 있다는 이정우님의 얘긴 무언가 어페가 있다고 보여짐다..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이 들뢰즈보다는 플라톤에 가깝다는 점은 공감합니다.. 그것은 들뢰즈처럼 플라톤과 대척점이 아닌 오히려 플라톤의 사유도 부분적으로 흡수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여전히 플라톤과 변별적인 것에 속합니다..


다음은 이정우님의 언급을 그대로 옮겨 본 글입니다..
"-들뢰즈가 플라톤주의자라는 생각(바디우)이나 화이트헤드가 플라톤적이냐 반플라톤적이냐라든가 하는 생각 등등은 적절한 질문이 아닙니다. 플라톤 자신이 "소피스테스"에서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플라톤"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이미 존재의 본질을 'dynamis'로 보는 입장을 전개했습니다. '생성이냐 영원이냐', 또는 (영미 철학의 화두인) '실재론이냐 유명론이냐', ... 같은 이분법적 질문들은 소모적인 질문들입니다. 문제를 이렇게 설정해 놓고 이야기하면 항상 시계 불알이 왔다갔다하는 형국이 됩니다."

이또한 이정우님께서 제 질문의 문맥을 잘못 파악하신 듯 함다.. 제 글을 읽어보셨으믄 아시겠지만 저는 화이트헤드가 플라톤적이냐 반플라톤적이냐를 가지고 질문하지 않았었져(이 부분은 이미 요밑에 다른 분의 글의 리플에 얘기된 부분이구염..) 제 글은 생성이냐 영원이냐 실재론이냐 유명론이냐는 그러한 소모적인 질문이 아니었구, 들뢰즈의 사유에 대해서 그것이 오류를 내포할 뿐더러 그렇기에 오히려 들뢰즈를 생성의 철학자로 말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냐는 질문이었져..

그리고 평가와 이해와 관련한 이정우님의 글은 아마도 평가는 이해에 기반해서 나올 수 있는 것이기에 먼저 텍스트를 꼼꼼히 이해함이 중요하다는 말씀으로 제가 받아들이겠슴다.. 그렇다면 이해가 중요하면 평가도 중요한 것일테져..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경우 이정우님의 글은 무언가 제 질문의 요지를 잘못 파악한 듯 싶슴다..이정우님 말씀대로 운동장에 글러브, 공, 방망이가 쌓인 걸 보러가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야구공도 방망이도 하나의 사건/생성이지만 그것이 주는 느낌의 강도자체가 그다지 대수롭지 않고 크지 않을 뿐이져..

야구공에 묻은 먼지 하나도 그 또한 사건/생성에 의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의 중요성은 가끔 투수가 공을 던질 때에 보다더 정확하고도 세밀한 볼 던지기의 테크닉을 구사하기 위해 잠시 주목받을 수 있을 뿐임다(가끔 먼지 묻은 공을 바꾸기도 하잖아염).. 동시에 관객들은 아무도 투수 글러브 안에 있는 야구공의 묻은 먼지에 신경을 쓰진 않고 있져.. 단지 투수가 공을 어케 던질까에 신경을 쓰고 있을 것임다..

요컨대 모든 사건/생성의 중요성은 개별자가 처한 상황에 의해 저마다 달리 다가오게 될 뿐이라는 것임다.. 그렇다면 선수가 방망이로 공을 치고 글러브로 공을 받는, 그러한 좀더 큰 스케일의 사건/생성에 주목하러 사람들이 야구장에 가는 게 아닐런지.. 꾸벅~ 그럼 답변 기다려봄다..


.........................................................

이정우님의 세번째 글 - 정강길님께..


정강길님이 제시하신 여러 예들은 제가 말한 내용과
상반되는 내용이 아닙니다. 들뢰즈의 텍스트들과
화이트헤드의 텍스트들을 좀더 비교해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말씀하신 인식 주체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사건의 '나타남'이란 반드시 주체를
전제합니다. 나타난다는 것은 반드시 "어디어디에 나타남"인데,
인식 주체가 전제되지 않은 나타남도 물론 수없이 존재하지만
실제 맥락에서 그 나타남을 포착하지 않은 주체가 전제되지
않은 나타남(예컨대 방안에서 누군가의 팔이 가려운 것)이란
일반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죠.
들뢰즈 사유의 공헌은 이런 나타남이 성립하기 위해 우리가
먼저 인식해야 할(즉, 원인의 인식이 결과의 인식에 선행한다는
스피노자적 맥락에서) '전개체적-비인칭적 장'을 드러낸 것에
있습니다. "차이와 반복", "의미의 논리"는 바로 이 장을
드러내려는 기획이었습니다.
그런데 들뢰즈는 그 나타남에 있어 주체의 측면을 섬세하게
파악하는 데에로는 나아가지 않습니다. 이것은 들뢰즈가
구조주의의 연장선상에서 반성철학을 단적으로 배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해 들뢰즈는 반성철학을 결여한 것이 아니라
반성철학을 사회-역사적 맥락으로 바꾸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즉, "의미의 논리"가 끝나는 곳에서 "자본주의와 분열증"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미, 지각, 주체, ... 이런
문제들이 결여된 것이 아니라, 그런 문제들을 더 이상
반성철학적으로 사유하기를 거부한 것이죠.
어쨌든 정강길님이 제기하신 문제는 좋은 문제이고 앞으로도
'존재론'과 '사회철학'의 매듭에 존재하는 (반성철학과는
또 다른) '주체론', '인성론'에 보다 많이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핵심 개념들은 바깥과 주름, 그리고 'subjectivation'
의 문제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정강길님이 일단 들뢰즈를 좀더 보시고 논의를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

본인의 글 - 논쟁을 접으며..(정리)


왠지 이정우님에 대한 답변을 쓰기가 망서려졌슴다..
들뢰즈를 좀더 알아보고 얘기하라는 분들이 많은 거 같아
걍 이 정도에서 제가 깨갱하고 논쟁을 접을까 함다..
아무래도 계속 들뢰즈를 좀 알아봐야 하니깐여..

하지만 그렇게 말한 들뢰즈안들이여..!
내가 쓴 글 중에 내가 말한 들뢰즈가 조금이라도 틀린 게 있으믄
어디가 어케 틀린지 구체적으로 지적이라두 해주던가..아니면
내가 들뢰즈를 설령 쥐꼬리만하게 알고있는 것만큼이라도
니네들이 화이트헤드라두 좀 알고서 얘길 풀어놓던가..
자기들은 그렇지도 않으믄서 내게 들뢰즈 공부나 좀더 하라니..
솔직히 너무나도 가소롭게 들리지만 그냥 내가 접구 들뢰즈 계속 탐독하리다..


그리고 이정우님께.. 글을 올림다..
눼에.. 알겠슴다..
결국 제가 말한 거랑 이정우님 얘긴 같은 거였군여..

그래서 오늘 다시 '의미의 논리' 텍스트를 다시 봤슴다..
하지만 들뢰즈의 사건 개념은 여전히 플라톤의 도식을 전복한 스토아학파의 사유를 토대로 해서 나왔다는 점만 재확인 밖에 못했슴다..
들뢰즈에게서 사건의 발생은 곧 의미의 발생과 불가분일 것입니다. 그것은 물체적인 것들의 표면효과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이었져.. 알다시피 들뢰즈는 사건을 존재하다exist가 아닌 존속하다subsister 혹은 내속하다insister라는 표현을 쓰져.. 즉 야구장에서 공을 '딱' 하고 칠 때 사건은 순간 나타났다가 다시 잠재층으로 들어간다는 얘기였져.. 그러기에 의미의 발생은 존재에서 표면으로 순간 솟아오른다고 쓰셨던데..
나뭇잎이 푸른 상태를 A라고 하고 붉은 상태를 B라고 할 때 A에서 B로의 변화와 생성에서 사건이 발생하고 의미가 발생한다는 게 들뢰즈의 사유로 알고 있슴다.. 여기서 의미발생이 일어나는 A에서 B사이로의 <됨>은 들뢰즈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접면>에 해당할 수 있겠구염..

반면에 화이트헤드에게서는 <있음>자체가 <생성>으로 구성되져.. 이것을 <과정의 원리>라고도 부르는데, 즉 '현실적 존재가 어떻게 생성되고 있는가'(how an actual entity 'becomes')가 '현실적 존재는 어떤 것인가'(what that actual entity 'is')를 결정한다는 것임다. 화이트헤드에게서 <사건> 개념은 바로 이 세계를 이루는 궁극적 사물인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 혹은 <현실적 계기>actual occasion들의 작용에 다름 아닌거져.. 그리고 그것은 극단적으로 하나의 <현실적 계기>에까지 소급해 들어가기까지 함다.. 사실 화이트헤드의 사건 개념은 특히 초기 저작에서 중심에 놓여 있으며, 후기에서는 현실적 존재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에 더 중점을 두고 있져..

화이트헤드에게서 <현실적 존재>란 이 세계를 이루는 궁극적 사물로써 그것은 과정의 미시적 단위이자 상호 관계/의존적인 경험의 방울들인데, 사건이란 것도 바로 이것들의 운용에 불과한 것임다..

화이트헤드에게서는 현실적 존재(계기)가 바로 <됨>에 해당하며, 세계는 바로 이것에 의해 이뤄져 있다고 보고 있슴다.. 나뭇잎이 정지된 푸른 상태라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사태져.. 그 또한 하나의 끊임없는 생성이 이뤄지고 있을 뿐임다.. 즉, 것두 결국 미시적으로 쪼개어본들 그 역시 과정적 변화 상에 놓여있는 단위적 존재라는 것이져..
그렇다면 이것과 들뢰즈가 말한 물체적인 것과 비물체적인 것의 사이에 해당하는 <접면>과 같은 거 였던가여? 백번양보해서 그렇다고 할 경우 이또한 그 <접면>안에는 화이트헤드가 말한 <합생>이라는 내적 작용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는 얘긴데..떱.. 이런 얘긴 화이트헤디안들이 들으면 점점 황당해지는 얘기밖에 안된다고 봐염..--; 암튼 저는 화이트헤드와 들뢰즈는 서로 다른 사유의 베이스를 갖고 있다고 보고 있는 넘임다..

이제 더 이상 게시판의 논쟁은 접을까 함다..
들뢰즈의 사건/생성과 화이트헤드의 사건/생성이 같은지 다른지는
지금까지의 글로써도 이미 충분히 감이 올 사람은 오리라고 보며
판단은 이 둘을 깊이 공부한 또다른 식자들의 몫으로 돌리도록 하져..

그럼 안녕히.. 꾸벅~

...........................................


이외에도 여러 글들이 있는데..
사실 논쟁의 분위기는 좀 격렬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이정우님은 논리적 답변은 회피하고
도덕적 결말로 논쟁의 끝을 내려버린다..
그렇기에 실제로 명확한 결말이 났다고는 할 수 없다..

궁극한 분들은 아직 삭제되진 않았기에
직접 확인해보길 바란다..
바로 갈려면 아래의 주소로 가면 된다..

http://www.acaphilo.co.kr/center/defort/frame1.htm


아카데미논단의 152번 글부터
한 명의 화이트헤디안과 여러명의 들뢰즈안과의 논쟁이 시작되고 있다..
2001-12-13 06:5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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