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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삶과 학문적 탐구에 대한 나의 생각..(윌버 비판도 약간..)    
  글쓴이 : 미선이 날 짜 : 10-09-30 11:09 조회(6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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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 탐구 자체에 대한 나의 생각..
 
나는 어차피 종교나 과학도 그리고 예술도 삶 자체에서 나온 여러 가지들이라고 본다..
백두가 말했듯이 학문과 교육의 목적에는
어차피 단 하나의 탐구 주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삶>life(혹은 생명)이다.
 
하지만 이 삶은 부분적으로는 해명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명되어 있지 않은 신비로도 가득 차 있다. 그런 면에서 과학의 차원에서 볼 때도
합리주의와 신비주의는 결국 동전의 양면이라고 본다. 쉽게 말하자면
세계 안에 부분적으로 성취된 합리주의는 이 땅에 <노출된 신비주의>이지만,
세계 안에 해명되어 있지 않은 신비주의란
인간 인식의 한계(이성, 언어 등등)을 넘어서 있는 <미지의 합리주의>라고 본다.
 
합리주의라는 표현은 세계 안에 보다 해명된 측면들을 강조하고 있고,
신비주의라는 표현은 세계 안에 아직 해명되어 있지 않은 불가해한 미지의 영역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인간 지성의 모험이라는 탐구 여정에는 
항상 인간 인식의 한계와 그 한계를 돌파하고 극복하려는
둘 사이의 긴장과 역설 속에 언제나 놓여 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과학을 통해 진정한 신비주의와 그릇된 신비주의는
어느 정도 걸러지고 구분될 수 있다고 보는데 후자를 나는 반합리적인 초자연주의라고 여긴다.
과학이란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일종의 <해명의 체계화>를 지향한다.
 
그럼으로써 가급적이면 이제는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말로서 헛소리 하진 말란 것이며,
신이 태초에 우주 세계를 몽땅 만들었냈다는 식으로 사람들 앞에 군림하지 말란 얘기며,
병의 원인들이 세균 바이러스 때문이 아니라 탁한 영 혹은 마귀나 귀신이 의한 거라고
우매한 대중들을 앞에 두고서 기만하지 말라는 얘기다.
 
하지만 이러한 과학(사실 영어의 science의 의미는 물리과학만 의미하지 않고 
인문과학 사회과학이라는 표현처럼 엄격한 학문적 탐구 자체를 의미)의 공헌과  동시에
과학의 한계도 함께 언제나 맞물려 있다. 인간이 최종적으로 신이 되어 있지 않은 한
해명되고 있지 않은 물음들은 언제나 남아 있기 마련이기에..
 
그런 점에서 좀더 깨어 있는 과학자나 철학자들은
인간 지성의 언표 불가능에 대한 안타까운 감정 없이
자연의 창조적 추이를 명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나는 이론의 정합적인 체계화와 삶을 풍요롭게 하는 삶의 실질적인 유용성은 함께 맞물려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그 이론이 삶의 실질적 적용에서 어긋난 것이라면
그것에는 그 어딘가에 구멍이 뚫려 있는 허술한 이론이라는 것이다.
이론 자체는 적용 경험을 통해 끊임없는 지적 수정 보완 작업을 계속 거쳐야 하며
경험의 지평은 동시에 이러한 이론의 모험과 함께 맞물려 있을 수밖에 없다.
지도도 없이 시카고를 여행하겠다는 건 우스운 것이다. 그렇기에 이론의 작업을 결코 폄하할 순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의 경험 활동 자체 안에
이미 <관찰의 이론 의존성>이 내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결코 부인할 수가 없다.
우리의 뇌 자체부터가 사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하잖은가.
따라서 진정한 경험론자라면 그것은 <체험 지상주의자>와는 또다른 것이다.
 
어차피 외계인과 교신했다는 빵상 아줌마의 주관적 체험도 그 사람에게는 주관적 체험인 거다.
마찬가지로 일곱 차크라가 다 뚫린 경험을 했다거나 색계 무색계를 지나 최고의 선정을 경험했다는 사람도
그리고 힌두이즘에서 말한 초월의 영인 브라만과 접속하여 황홀한 일체의 아트만 합일을 경험했다는 사람도
적어도 그 사람에게는 체험은 체험인 것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부디즘의 창시자 불교의 싯달타 체험은 그러한 힌두이즘에 대해 반대해서 나왔었다.
 
다시 말하면 다양한 자기 경험들에 대한 온갖 주장들(이론들, 입장들)간의
다양성과 차이를 강조하는 것도 기본적으로 인정해줄 수 있는 작업이 되어야 하겠지만
그러한 <다양성들 간의 충돌과 갈등> 역시 그저 모호하게 두기보다는
보다 적극적으로 해명되어야 할 필요 또한 있는 것이다.
 
혹자는 거대담론을 폄하하지만 나는 거대담론을 경험의 심층에 깔린 <기초담론>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미시담론을 경험의 표층에 적용될 수 있는 <실용담론>이라고 여긴다.
즉, 우리의 지적 탐구들이 숲을 보는 가운데 나무를 찾아가는 과정 또한 무시할 순 없을 것이다.
 
만일 거대담론을 무시하고 미시담론만 인정할 경우, 그러한 다양한 전문성을 강조한 
전문화의 길이 저도 모르게 파편화된 채로 치달을 수 있다고 본다.
대체로 철학이라는 탐구 영역은 인간 경험의 온갖 다양한 사건들을 그 재료로 하는 가운데
모든 다양한 분과 학문들의 밑변에도 자리할 수 있는 사유의 베이스를 놓는 사유의 기초 작업에 속한다.
 
윌버에 대한 비판
 
나 자신이 켄 윌버를 비판하는 맥락은 그가 통합적 작업을 해서가 아니라
그의 통합적 작업의 이론적 결과물이 여전히 <일자중심주의>라는 근대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윌버가 말하는 <일미>One Taste도 결국은 <진화하는 영(the Spirit of Evolution)의 활동>에 따른 것이라는 얘기다.
그의 통합 작업들은 주로 신플라톤주의자 플로티노스나 독일 관념론자 쉘링과 헤겔의 도식과도 유사상을 띠는데
특히 세계의 온갖 사건들을 절대정신의 현현으로서 이해한 헤겔과는 매우 유사하게 닮아 있는 맥락이 있다.
실제로 윌버는 철학사의 그러한 관념론자들을 매우 추켜세우고 있기도 하다.
 
반면에 현대 철학자들 중의 들뢰즈는 그러한 헤겔을 극도로 혐오했던 철학자였는데
그 이유는 그의 이론적 도식(헤겔 변증법 등등)이 오히려 온갖 차이와 다양성을 말살한다고 보았었다.
물론 지젝의 경우는 그런 들뢰즈를 비판하며 헤겔을 다른 식으로 독해내고 있는 현대 사상가이기도 하다.
최근 나온 <시차적 관점>은 그의 헤겔 해석에 대한 결과물임.(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지젝의 과잉 독해 입장임)
 
반면에 알랭 바디우는 진리는 일자로 수렴된다고 보질 않고 <다수>라고 말한다.
백두의 경우는 모든 현실사건들은 다(多)에서 일(一)로의 영원한 과정상에만 놓여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때의 일은 항상 다에 기반되어 있기에 우발적인 창조성에 따른 일로서
영원불변 혹은 고정불변의 목적성을 지니진 않는다.
그것은 그저 영원한 생성과 소멸의 과정에 놓여 있는 작용인과 목적인의 만남일 따름이다.
 
물론 나는 윌버 역시 일정부분 니체의 후예들인 탈근대주의자들에 대해서도
비판과 함께 이들의 공헌도 인정한 바를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이론적 도식 역시
알게모르게 탈근대주의자들이 그토록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일자중심주의로 인도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일자중심주의라는 이 표현은 일로서의 통합 자체를 반대하기 보단
윌버에 도식이 갖는 비정합적인 반합리적 맥락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이에 대해선 본인의 논문 참조).
예를 들어 윌버는 좌측상한의 상세한 분석에 상응될만큼의 우측상한을
상세한 분석적으로서 마련해놓고 있진 못하다. 만일 윌버의 이론이 합리주의적 경험론이라면
그의 지론대로 함께 사상한 전체가 골고루 구체적인 분석으로서 마련됐어야 했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윌버 사상한의 좌측하한은 나와 타자를 뭉뚱그려서 <우리>We로서 설정해놓고 있는데(그는 이 우리를 '2인칭'이라고 말한다)
사실 이를 주도면밀하게 살펴보면 그때의 '우리'라는 것은 사실상 <타자가 자아화된 우리>에 해당된다.
만일 그게 아니라면 주체적 직접성으로서의 자아 초월은 좌측상한에 마련되어 있으나 이와 동등한 관계로서의
타자 초월의 지점마저 간과되어선 안되는 것임에도 윌버 사상한에선 그저 뭉뚱그려져 있는 <우리>로서 되어 있는 것이다.
 
쉽게 풀어서 말한다면 윌버 사상한에선 <나>와 <타자>가 동등한 관계로서 설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에겐 자기 초월의 지점은 있어도 타자 초월의 지점은 분석적으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사실 이 부분은 윤리철학자 레비나스(E. Levinas)가 하이데거 철학의 전체주의적 요소를 비판했던

"reduction of the Other to the Self"맥락과도 정확히 일치하는 부분이다. 레비나스가 보기에 

그때까지의 서양철학사는 대체로 타자에서 자아로의 환원 작업에 가까운 점이 있어

결국 이것이 과도한 <자아중심주의>로 이어진다고 본 것인데, 내가 볼 땐

윌버의 도식에도 바로 이러한 점들이 충분히 엿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신(God)이든 이데아(Idea)든 대문자 영(Spirit)이든 하나로 수렴되고 통합된 일자가 있고

세상의 다양한 만물과 사건들은 그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것으로서 보는 맥락들은

자끄 데리다가 그토록 비판했던 <로고스중심주의>의 맥락과도 하등의 다를 바 없다.
이 로고센트리즘이 놀랍게도 <자아센트리즘>으로 이어지면서 독단적 위험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자기 이론을 진리라고 주장하는 자들의 진리 담론의 횡포가 있게 마련인 것이다.
 
다양성을 꿰어내는 통합적 작업 자체는 언제나 그리고 부득이 필요한 것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윌버의 그 통합 작업이 갖는 시도 자체는 높게 평가하고 싶다.
단지 보다 엄격하지 못하고 엄밀하지 못한 점이 있어 다소 설렁설렁한 느낌을 지울수 없지만 말이다.
그런 점 때문인지 실제로 다른 강단 학자들의 저서들을 보면 간혹
윌버를 언급할 때마다 그 앞에 아직 학문화하기 힘든 어쩌구저쩌구 하는 수식들을 심심찮게 붙인 경우도 보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내가 말하고 싶은 바는 통합적 작업이라는 그 시도 자체는 의미 있다는 얘기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던의 성과인 다양성과 차이에 대한 존중(똘레랑스)만 갖고 얘기하는 것또한 여전히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실은 인간의 인식 활동 자체가 모호한 다양성들과 온갖 다수성들 가운데서 
하나의 패턴을 읽어내는 <단순성>을 추출하는 활동이기도 한 것이다.
 
인간의 의식 활동 자체가 무의식상에 모호하게 방치되어 있는 무수한 경험들을
단순화시켜 보다 명료한 경험으로 추출해내려는 일종의 변환 과정의 활동인 것이다.
 
그렇기에 어떻게 보면 인간의 인식 활동과 언어 사용 자체가
그 어떤 다수의 사건들을 읽어내고자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통합 활동에도 해당된다.
아마도 수학은 그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다. 1+1=2는 많은 다양한 경험들에서 추출될 수 있기도 하다.
만일 우리가 이를 무시할 경우엔 당장 물건을 사는 것부터가 힘들어지는 온갖 낭패를 겪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의 언어 사용도 다양성을 사상한 일의성을 지닌다.
 
우리는 분필을 종종 <하얀 분필>이라고 말하지만,
실은 그 분필도 가만히 세세하게 살펴보면 다양한 색깔들이 알알이 박혀 있다.
거무튀튀한 색, 검은색, 빨간 색, 파란 색 등등 온갖 것들이 소수적이지만 아예 없진 않다.
그렇기에 어떤 점에선 <하얀 분필>이라는 언어 표현은
그런 다양한 소수의 차원들을 무시한 것이기에 정확한 사실로서 들어올 수 없는 것이다. 
 
즉, "하얀 분필"이라는 표현은 엄밀하게 말해서 사실적인 표현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의 소통에선 우리는 <하얀 분필>로 통용하더라도 별다른 불편이나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
물론 언어의 지시성에는 한계가 있다. 그것은 언어가 지닌 운명과도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호한 전체를 언어로 풀어놓으며 해명하려는 작업마저
무용하다거나 불필요하다고 주장한다면 그것또한 과잉한 비판이라고 보는 것이다.
 
어차피 관계적 지평에서의 나와 타자는 함께 엮여 있기에 그 간의 관계 소통을 위해서라도
이를 전달할 수 있는 지시적이고 상징적인 통용 매개들 또한 부득하게 필요할 수밖에 없다고 여겨진다.
 
결국 우리에게 통합의 작업들이 필요한 이유는
적어도 다양한 사건들의 전체 맥락들을 놔두고서 그저 미시적인 세세한 면만 살피기보단
좀더 일반화될 수 있고 좀더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도록 시도하여
<소통 가능한 예견의 체계>를 위해서다. 그럼으로써 다음 행보를 내딛기 위해 
좀더 현재의 불확실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체계가 도대체 얼마만큼 엄격하게 정합적이며, 실제적으로 적용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기초담론을 쌓아가는 이론의 작업 자체는 불가피하며,
이는 결국 1)논리성, 2)정합성, 3)적용가능성, 4)충분성에 대한 시도라고 본다
 
1과 2는 이론적 차원이고 3과 4는 경험적 차원인데, 이것이 따로 동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적어도 이론과 경험이라는 두 차원이 상응될 때 진리로서의 설득력을 획득한다고 여겨진다.
물론 그러한 작업에는 당연히 나의 경험과 반대되는
다른 사람들의 경험 차원까지도 충분히 설명되어져야만 할 것이다.
 
결국 모든 주장들, 모든 입장들, 모든 이론들 간의 우위 문제는
온갖 다양한 경험 사건들을 일관된 맥락에서 읽어낼 수 있도록 하는
그러한 이론들을 찾아내고자 하는 모험의 과정에 놓여 있듯이 마찬가지로
온갖 삶의 모호한 다양성들에 적용될 수 있는 <정합적인 설명력 확보의 문제>이기도 하다.
 
영원한 현재적 과정(Process)으로서의 삶과 학문의 여정
 
모든 학문의 여정들은 언어의 한계를 운명처럼 지니면서
동시에 그 한계를 극복하려는 역설의 시도가 중요하다.
나는 그러한 실험적인 시도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는 그것이 닫힌 체계가 아닌
오류와 수정가능성으로 언제나 열려 있는 열린 체계여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언제나 양립가능한 다양성을 인정해줄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근대는 이성의 독단과 언어의 자만심에 사로잡혀 있었고,
탈근대는 이성의 폐해와 언어의 한계에 주로 사로잡혀 있었다.
기표는 기의를 갖지 않는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볼 때는 언어는 진리가 아닌 끊임없는 실험으로서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삶은 모호한 전체로서 신비로운 것이다. 경이롭다는 표현이 혹은 더 알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삶은 다양한 온갖 것들을 체험하는 가운데 주저리주저리 풀어놓는다.
정서적 차원과 인지적 차원의 화해에서 보다 온전한 치유가 일어날 수 있듯이
바로 그래서 우리의 삶은 내가 "무엇(What)을 느끼고 경험했는가?"의 차원도 있지만,
"도대체 왜(Why) 그러한가?"에 대한 해명의 차원도 여전히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아직 충분한 납득이 되지 않는 온갖 혐의들을 떨쳐내고자 하는 가운데
불확실성을 운명처럼 가지면서도 동시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불확실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온갖 탈출과 실험의 시도들로 들끓고 있는 지점이 바로 학문적 탐구의 노력과 여정들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삶은 언제나 호기심어린 이해와 한계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불가해함의 중간에 걸쳐 있다. 그러한 긴장 속에서
과정적인 우리의 삶은 더욱 풍부한 정서적 향유와 인지적 해명에서 오는 끔찍한 즐거움마저 함께 누리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모름의 영역들이 있기에 온갖 앎에 대한 시도들 또한 의미가 있는 것이고
앎의 시도들이 있기 때문에 모름의 영역 또한 여전히 신비롭게도 느껴지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오류>와 <비극>에 대한 성찰들이다. 반증가능성을 내포하지 않은 이론이나 과학이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결국 과거에 해명된 지식들은 아직 해명되어 있지 않은 무궁무진한 미래로의 탐험을 위한 기반으로서
필요할 따름이다. 이 지점에서 특히 시행착오의 경험들은 좀 더 나은 미래로 향한 더없이 소중한 지침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과거와 미래는 영원한 현재적 순간이라는 찰나 속에 경이롭게 함께 얽혀 있다.
 
우리에게 현존하고 있는 것은 언제나 이러한 현재적 순간으로서만 영원히 현존하고 있는 것이며,
<지금 여기>라는 이 현재적 순간이야말로 진정한 <실재>reality이자 <과정>process으로서
언제나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고 있는 성스러운 지반이 되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우리 삶의 모든 것들은 다름 아닌 "Now and Here!"에 대한 다른 이름에 속할 따름이다.
 
지혜를 쫓는 일이란, 바로 그러한 현재적 찰나 속에 깃들어 있는 온갖 것들 가운데서
유동하는 현실의 차원을 보다 유용하게 꿰어내고자 하는 영원의 광맥을 찾아나서는 모험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한쪽에는 깃대의 굴레에 묶여 있으나 한편으로는 바람에 나부낄 수 밖에 없는
영원한 노스탤지아를 그리워하는 유치환의 시(詩) 깃발의 이미지와도 같은 그러한 여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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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무정체성/다정체성 혹은 상대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우화 정강길 7738 11-10
15 다양성의 생산과 다양성 간의 충돌에 대한 고찰 정강길 7474 07-10
14 슬라보이 지젝Slavoj Zizek 정신분석학적 사회이론 양운덕 7781 10-08
13 [펌] "포스트모더니즘" 에 대한 촘스키의 견해 정강길 10117 10-08
12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계 개념 (서동욱) 정강길 10637 10-08
11 [책] 『라깡의 재탄생』 김상환ㆍ홍준기 엮음 관리자 8754 10-08
10 자연과 신과 인간, 그리고 근대 학문의 탄생 이현휘 7115 10-08
9 [20세기 사상을 찾아서] 질 들뢰즈의 철학 정강길 10698 10-08
8 [펌] 모더니즘 정강길 8649 10-08
7 [펌] 타자의 현현, 윤리의 지평(레비나스 사상 소개서) (3) 정강길 9167 10-08
6 레비나스 사상에 대한 좋은 개론서 정강길 7913 10-08
5 [펌] 레비나스를 아시나요? (1) 정강길 9708 10-08
4 [참고자료]본인과 이정우(들뢰즈안)와의 논쟁 글모음 정강길 11016 10-08
3 [펌] 아퀴나스, 하이데거, 화이트헤드 정강길 6434 10-08
2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에 빠진 들뢰즈 (2) 정강길 12545 05-01
1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 (1) 정강길 13035 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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