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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호모 모미엔스 (김용옥)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8-03-28 05:39 조회(8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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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 나의 기철학적 예술론을 말하는데 있어서 이러한 이야기들이 중요한 것은 인간의 체질이나 성격진단이 아니라 이러한 우리의 전통적 사유방식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고 있느나하는 것이다. 이러한 발상의 가장 큰 의의는 영국경험론에서부터 발달하여 서구라파 근세철학사의 밑바닥에 전반적으로 깔려 있는 얄팍한 감각주의(sensationalism)의 극복의 가능성이란 새로운 인류의 비젼을 제시한다는데 있다.

죤 록크로부터 시작한 근세 영국경험론자들도 감각을 중시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들은 주지주의(오성주의)적 편견(overintellectualist bias) 때문에 인간의 감정을 모두 감관의 감각에 귀속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중세기에서부터 이미 신적 이성의 빛에 대하여 천박하고 더럽고 죄스러운 인간의 육체의 표피적 감각의 개념을 설정해놓은 신화를 그대로 이어받은 말류적 오류에 불과하다. 이러한 오류는 흄이나 임마누엘 칸트에게까지 연결되는 것인데 도무지 인간의 느낌의 구조를 인간 몸 전체의 유기적 통합의 구조로 보지않고 특정한 감각기관의 특정한 활동으로 파악하는 것은 신화에 불과하다(The confinement of our prehension of other actual entities to the mediation of private sensations is pure myth. A. N.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N.Y. : The Free Press, 1978], p.141).

이런 의미에서 불교가 眼·耳·鼻·舌·身이라는 五根과 그에 대응하는 色·聲·香·味·觸의 五境을 설정한 것도 서양철학언어와 동일한 인도유러피안어군에 속하는 산스크리트어적 사고유형에서 파생하는 오류의 한 예다. 불교의 五根은 근세 서구라파 인식론의 근간을 이루는 五官(five senses)과 동일한 것인데, 이러한 五官은 우리의 고유한 前불교(pre-Buddhistic)적 동양문화권에서는 설정되지 않았다. 단지 선진제가들은 九窺(아홉 구멍)니 七窺(일곱 구멍)니 하는 말을 방편적으로 쓰고 있을 뿐인데 이렇게 구멍(입구멍 귀구멍 콧구멍 눈구멍 똥구멍 오줌구멍)의 표현을 쓴 것은 구멍이 단지 標(표면적)的 현상일 뿐 그것이 어떠한 감각기관으로서의 독립된 신체가 아니라는 뜻을 표명한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눈으로 본다"라는 감각현상을 마치 "눈깔"이라는 안구의 작용에 국한시켜 이해하는 착각을 저지르기 쉽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내 눈깔을 후벼 파내어 책상머리앞에 놓아도 그 눈깔은 보는 작용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과연 그런가? 눈으로 본다는 것은 사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본다는 작용에 있어서 눈의 역활이란 전체과정의 지극히 협소한 일부의 구실을 수행하는 것이다.

눈으로 본다고 할 때의 "눈"은 "나"라는 자아개념과 거의 동의어이다. "눈"으로 보는 것은 "내가" 보는 것이며 곧 "나의 몸"이 보는 것이다. "입으로 맛본다"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맛이라는 현상이 마치 혓바닥 아니면 구강속에 고정되어 있는 현상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같은 입맛이라도 내 위나 장의 형편에 따라 혹은 몸전체의 느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우리는 얼마든지 일상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몸살이 났을 때 즉 몸에 살이 끼었을 때(이때 살은 살풀이의 살과 동의어) 분명히 달어야 할 음식이 쓰게 느껴지는 것은 웬일일까? 그것은 나의 구강의 맛이 나의 몸전체가 느끼는 맛의 유기적 과정의 일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입만 맛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내 위도 맛을 느끼며, 내 소장도, 내 대장도 맛을 느끼며, 내 보지도, 내 자지도, 내 똥구멍도 맛을 느낀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말하는 미각이란 우리의 몸의 평균상태에서 파생하는 구강의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여태까지 생각해온 감각의 개념이 전면적으로 재고 되어야 하며, 그러한 표피적 감관의 감각작용에 기초한 서구라파 근세인식론이 전면적으로 폐기되어야 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나는 나의 기철학(혹은 몸철학)적 체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감각"(sensation)이라는 말을 쓰기를 즐겨하지 않는다. 나는 감각 대신에 몸각(mom feeling)이라는 나의 독특한 조어를 사용한다(구상은 전에 된 것이지만 이 글에서 최초로 사용). 감각에 대한 몸각의 회복은 동양적 인간관과 거기서 파생된 모든 예술형태를 이해하는데 가장 결정적 관건이 되는 것이다.

서구라파 근세 경험론의 인식론은 인간에게서 중세기 때 상실되었던 감각을 회복해 보자는 정신에서 출발하였지만 다시 감각부정이라는 관념론적 결론(버클리나 흄)으로 다시 꼴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감각개념이 너무도 협소하고 천박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마디로 감각주의적 신화의 포로였다. 동양인들은 감각을 중시하지만 그 감각자체가 모든 몸기관 느낌의 역동적 통합태(dynamic unity)로서의 몸각이기 때문에 어떠한 관념론의 공세에도 무너지지 않는다. 관념이나 오성능력 그 자체가 몸각의 복합형태의 일종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마의 사상론이 인류역사에 의미하는 가장 위대한 공헌은 서구의 근세적 인간관이 주로 시각(visual feeling)에 기초해 있는데 반하여, 서구인들이 무시하고 경멸해온 腹感(visceral feeling)의 몸각을 회복시키고 체계화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과학적 검증을 통하여 임상경험에 체계적으로 적용시켰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서양철학자들은 복감을 통해서 얻어지는 우주에 대한 정보를 경멸하고 오로지 시각에만 관심을 집중시켰다는 一針見血의 명언을 한발자욱 더 앞지르고 있는 것이다(Philosophers have disdained the information about the universe obtained through their visceral feelings, and have concentrated on visual feelings. Process and Reality, p.121).
 
서양예술은 기본적으로 시각(혹은 청각)을 중심으로 한 예술이다. 연극이나 무용, 미술이 모두 시각을 중심으로 한 예술이다. 20세기 예술에 결정적 영향을 준 19세기 후반의 인상주의(impressionism)운동도 알고보면 광학이론의 발달에 의한 색깔이론의 시험적 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즉 색깔이라는 감각소여가 대상자체에 고유한 것이 아니라 빛의 반사에 의한 우리의 시각작용에 불과하다는 사실의 인지에서 오는 새로운 시각예술에 불과하며, 이들은 시각의 새로운 미술적 언어를 창출하는데만 급급했을 뿐 그것이 내가 말하는 몸각의 포괄성에 미치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인상주의 미술에 영향을 받아 이러한 인상론을 청각적 효과에 적용해 볼려고 노력한 것이 바로 드뷰시(Claude Debussy)의 인상주의음악 세계다. 드뷰시 인상주의의 공헌은 서양음악사에서 최초로 동양음악이 중심으로 삼아왔던 "음색"의 문제를 중시하고 또 음색의 효과를 살리는 화성의 과감한 시도를 했다는 데 있다. 그러나 드뷰시의 인상주의적 음색도 결국 청각의 단계에 머물러 있을 뿐 내가 말하는 몸각의 단계에까지는 이르고 있지 못하다.

20세기 미술의 가장 큰 주류를 형성한 브라크나 피카소의 입체주의(Cubism)도 결국 시각의 관점에 대한 새로운 감각적 미술언어일 뿐 그것이 우리에게 감명을 주는 몸각의 미술은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관점의 문제는 이미 동양미술사에서 충분히 시도된 기본기(基本技)중의 하나일 뿐이며 동양미술이 지닌 입체성과 추상성의 몸각적 폭에 미칠 바가 아니다. 서양미술하는 사람들은 나보고 국수주의자라고 비판을 퍼붓겠지만 나를 국수주의자라고 말하기 전에 광대무변한 동양미술사의 세계를 천착해 들어가 보는 탐구자적 진지성을 먼저 길러야 할 것이다. 나는 묻는다. 과연 이 땅에서 누구 한사람이라도 진지하게 똥 치창(董基昌, 1554~1636)의 화론(畵論)을 한 자 한 자 고증하면서 읽어보았느냐고ㅡ. 나는 말한다. 그래도 이 도올선생은 사계의 전문가들과 수년 머리를 맞대고 그 애매모호한 문자형상의 체계를 독파해 버리는 진지성은 가지고 있노라고ㅡ. 하여튼 우리나라에서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피카소의 우상화는 철저히 반성되어야 한다. 피카소라는 위대한 이름이 빚어놓은 상업적 작품들의 흉내를 내는 우리나라 화단의 그림들이 과연 우리게게 무슨 감명과 감동을 주고 있는가? 그렇다고 똥 치창 숭내를 내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고 운보를 숭배하라는 것도 아니다. 진정 나의 몸에서 우러나오는 우리의 그림을 그려야하지 않겠는가?

우리 전통음악의 이해에 있어서도 우리에게 가장 문제시되고 있는 것은 감각과 몸각의 혼동이다. 판소리를 단순히 시각의 예술, 청각의 예술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한다면 그것은 정말 보잘 것 없는 예술이다. 청각이나 시각의 효과를 극대화시킨 오페라에 비한다면 너무 보잘 것 없는 초라한 무대예술처럼 보인다. 그러나 판소리가 서양의 어떠한 장대한 오페라도 미칠 수 없는 힘을 가지는 것은 그것이 바로 몸각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매우 특수한 초인적 몸의 단련과정을 거쳐서만 달성되는 비범한 몸의 예술이다. 판소리를 귀로 듣는다는 것은 판소리에 대한 모독이다. 화이트헤드의 말대로 판소리는 복감으로 들어야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판소리를 들을 때 창재기가 뒤틀리지 않는 놈들은 판소리를 들을 자격이 없다. 송만갑은 판소리를 목으로 한 것이 아니라 장부(臟賦)로 한 것이다. 구례골에서 그가 소리를 질렀을 때 그의 창자가 움틀렸고 그 소리를 들었던 까까중님들의 창자가 움틀렸다. 지금 판소리가 점점 골동품화 되어가고 대중들에게서 소외되어 가는 일로에 있는 현상은 바로 몸각을 상실하고 감각만 발달된 현대인의 비극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이다. 그리고 또 창자 자신이 청중의 몸각을 뒤흔들만한 자기자신의 몸각의 파우어가 결여되어 있다는 실정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동양음악의 바이블이라고 할 수 있는 『禮記』 「樂記」에 보면 동양인들이 음을 감지한 태도를 잘 알 수 있다. 그 바로 첫머리에 :대저 음의 일어남은 사람의 마음을 통하여 생성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의 움틀림이란 사물이 그러하도록 하는 것이며, 또 동시에 사람의 마음이 사물에 감(感)하여 움틀리는 것이다. 그러한 움틀림이 소리라는 매체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형상화되는 것이다."(凡音之起, 由人心生也. 人心之動, 物使之然也. 感於物而動, 故形於聲.)이러한 관점은 「樂記」의 주된 테마로서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樂者, 音之所由生也. 其本在人心之感於物也."(樂이라는 것은 음의 집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그 근본은 사람의 마음이 사물에 感한다는 데 있다) 라든가 "凡音者, 生於人心者也. 樂者, 通倫理者也."(대저 음이란 사람의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악이란 인간무리[사회]의 이치에 두루 통하는 것이다)라든가 "人生而靜, 天之性也. 感於物而動, 性之欲也."(사람이 태어난 그 자연상태는 고요하다, 그 고요함은 하늘 그대로의 본성이다. 그러나 그 고요함은 사물에 감하여 움직이게 되는데 이 움직이야 말로 모든 것을 분별하는 본성의 욕망을 형성시킨다)라는 등등의 발언은 바로 음에 대한 동양인의 관점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용한 것은 음을 고막의 진동이라는 청각의 문제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음의 생성을 가능케 하는 "움틀림"(動)의 문제며 "느낌"(感)의 문제라고 파악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느낌과 움틀림"(感動이라는 말의 어원)의 성립이 어디까지나 동적인 관계(dynamic relation)로 이해되고 있는데 이것은 "사람의 마음"(人心)과 "사물"(物)의 상호적 만남(mutual encounter)으로만 설명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바로 "사람의 마음"(人心)이라는 것이 서구라파 이성주의적 인식론에 기초한 "마인드"(mind)가 아니라 이제마가 말한바 대로 곧바로 복감(visceral feelings)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예기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시해야 할 형이상학적 근거다. 최근의 제학설은 이러한 문제를 등한시하였고 서구적 편견에 의하여 처리하였을 뿐 아니라 고전적 이론도(예를 들면 퇴계나 율곡의 이론도) 나의 "몸각"이론에 대한 불철저한 이해에 그치고 있을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 예기의 구절들이 얼마나 주요하고 광범한 근세신유학의 쟁점이 되어왔나 하는 것은 음악이론만을 공부해온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잔소리를 걷어치운다면,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다! 감각에 대한 몸각의 회복이며 몸각에 의한 새로운 예술론의 정립이다. 이러한 정립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하루속히 호모 사피엔스(homo saspiens)의 죄악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 즉 이성적 인간으로 규정될 수만은 없다. 그것은 희랍인들의 이성주의적 광기가 낳았던 매우 편협한 인간규정이며 희랍문화에로의 복귀를 외쳤던 르네상스적 인간관이 양적과학을 강조하면서 파생시킨 매우 편협한 인간규정이다. 나의 기철학적 체계내에서 인간은 어디까지나 호모 모미엔스(homo momiens)일 뿐이다(몸이라는 우리말을 학술용어로 승화시킨 명명법인데 이미 나는 이 용어를 87년 1월 싱가폴국제회의에서 사용하였다).
 
인간은 인간의 몸이라는 유기체적 전체를 떠날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은 반드시 이러한 유기체적 전체성 속에서 분석되고 종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의 호모 모미엔스관은 금세기 신칸트학파의 거장 에른스트 카씨러가 인간을 "상징적 동물(animal sysbolicum)로 규정한 것보다 휠씬 더 포괄적이며 근원적인 인간규정이 될 것이다. 그가 말한 상징성이란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 플라톤의 이데아론의 근대적 변용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상징성은 결국 에이데딕(eidedic)한 것이며, 그러한 형상성은 그 포괄성의 확보를 위하여 다시 현상성을 초월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인간은 결국 몸적 존재다! 몸의 전체를 떠나서 몸의 일부 기능인 상징성만으로 인간을 일관되게 규정하는 것에는 많은 무리가 따름을 변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에서 호모 모미엔스로! 호모 사피엔스여 사라져라! 호모 모미엔스여 일어나라! 이것이야말로 나의 기철학의 귀결점이다.
 
<아름다움과 추함>, 김용옥, 57쪽~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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