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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알튀세의 '호명'에 대한 비판적 독해 (진태원)    
  글쓴이 : 미선 날 짜 : 17-05-07 04:03 조회(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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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명이라는 개념은 프랑스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 1918-1990)가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1970)(이하에서는 AIE 논문으로 약칭하겠다)이라는 논문에서 처음 소개한 이후 현대 인문사회과학에서 가장 널리 활용되는 개념 중 하나다.(“Idéologie et les appareils idéologiques d’État”, La Pensée, no. 151, juin 1970. 이 논문은 알튀세르의 저서 Postions, Éditions sociales, 1976에 재수록되었으며[국역본: 『아미엥에서의 주장』, 김동수 옮김, 솔, 1991], 알튀세르 사후 유고로 출간된 Sur la reproduction, PUF, 1995[국역본: 『재생산에 대하여』,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7]에도 포함돼 있다. 이 글에서는 불어 원문으로 Sur la reproduction에 수록된 글을 이용했으며, 국역본으로는 『아미엥에서의 주장』에 수록된 글을 참고했다.) 

   엥테르펠라시옹은 원래는 상당히 특수한 의미를 가진 단어다. 이 단어는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이 정부 각료에 대해 질의를 하는 것, 또는 정부 각료가 의원들의 질의에 대해 답변을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하지만 이 단어가 일상적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은 경찰이 길거리에서 검문검색을 하는 경우다. 곧 범죄자나 수상한 사람들(간첩, 또는 프랑스의 경우는 이른바 ‘불법체류자’ 등)을 찾아내기 위한 목적으로 누군가의 신원을 조사하는 (불심)검문 행위가 엥테르펠라시옹의 대표적인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알튀세르는 처음 호명을 이론화하면서 경찰이 길을 가는 사람을 불러세우는 경우를 호명의 예로 든다. ““어이, 거기 당신!” 만약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이론적 장면이 거리에서 일어난다고 가정한다면, 호명된 개인은 뒤를 돌아본다. 이 180도의 간단한 돌아섬에 의해 그는 주체가 된다. 왜? 그는 호명이 ‘분명’ 그에게 전달되었다는 것, ‘호명된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분명 그였다’는 것을 재-인지했기 때문이다”.(Sur la reproduction, p. 305; 『아미엥에서의 주장』, 119쪽—강조는 알튀세르. 이하 해당 국역본의 쪽수를 표시하겠지만, 번역은 필자의 수정된 번역임을 일러둔다. 그러나 수정된 사항을 일일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검문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호명 개념은 부르주아 계급 지배의 메커니즘을 해명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알튀세르는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 이론이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데서 근원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보고, 스피노자 철학과 정신분석 이론을 원용하여 매우 독창적인 이데올로기론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 이데올로기론에서 핵심 요소로 작용하는 것이 호명 개념이다. 따라서 호명 개념은 처음에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긴밀하게 결부돼 있었지만, 알튀세르 이후에는 철학과 문예이론, 정치학 및 사회학, 여성 이론, 민족(ethnic group)과 인종주의 이론 등에서 종속적인 주체 생산의 작용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 개념이 이처럼 많은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은 호명 개념에는 마르크스주의와 근대성, (후기) 구조주의의 핵심 쟁점들이 복합적으로 함축돼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적인 관점에서 보면 호명은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가 어떻게 재생산되는지 구체적으로 해명하는 데 관건이 되는 개념이다. 우선 추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호명은 흔히 자유로운 것으로 간주되는 개인들 내지 주체들이 바로 그 개인들 내지 주체들로서 존재하는 양식이 사실은 계급 지배의 메커니즘과 내재적으로 연루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인간의 개인적인 실존 양식, 개인성 그 자체가 계급 지배 및 권력에 대한 예속을 전제로 한다면,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생산양식에 대한 분석을 넘어서 이데올로기적 권력 또는 상징적 권력에 대한 분석을 필수적인 요소로 포함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비록 알튀세르 자신은 간단한 소묘 이상을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역사적 차원에서 본다면 호명 개념은 자본주의 사회의 제도 속에서 어떻게 개인 주체들이 구체적으로 형성되는지 분석할 수 있는 이론적 지침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가령 그의 제자였던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가 이론화했던 것처럼, 호명은 국민국가의 제도 속에서 각각의 개인들이 일차적으로 국민적 개인(한국인, 일본인, 프랑스인, 독일인 등)으로서 형성되고 정체화되는 과정을 설명해줄 수 있다.

   근대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호명 개념은 근대 주체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제기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주지하다시피 칸트 이래로 주체는 근대철학의 핵심 범주로 존재해왔다. 근대 철학의 기본 범주로 이해된 주체는 인간의 모든 인식 및 (도덕적) 실천의 토대로 기능하며, 따라서 그보다 상위의 원리에 종속되지 않는 자율적인 존재자로 간주된다. 하지만 호명 개념에서 주체는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 질서를 재생산하기 위한 메커니즘의 파생물로, 이데올로기의 산물로 제시된다. 이렇게 되면 주체는 정의상 종속적인 주체인 셈이며, 근대철학의 가정과는 달리 본질적으로 ‘종속화’(assujettissement)의 산물인 셈이다. (여기에는 어원적인 함의도 들어 있다. 불어의 sujet나 영어의 subject는 ‘복종’ 내지 ‘종속’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중세 및 근대 초기의 정치신학에서 신민(臣民)을 뜻하던 단어는 ‘subjectus’였다. 따라서 칸트 철학 이후 보통 자율적인 존재자로 간주되는 주체라는 개념의 어원에는 종속적인 존재자라는 뜻이 담겨 있는 셈이다.) 근원적으로 자율적인 존재자로 간주되는 주체가 사실은 종속화의 산물이며 주체의 자율성 주장은 사실은 이러한 종속화의 메커니즘을 은폐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면, 근대성의 원칙 자체가 근원적인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후기 구조주의의 이론적인 맥락에서 본다면 알튀세르의 호명 개념은 68년 학생ㆍ노동자 봉기 이후 프랑스 철학의 방향 변화를 예고한 개념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실제로 들뢰즈와 가타리는 1972년 『반오이디푸스』를 출간하고 푸코는 1975년 『감시와 처벌』을 발표하는데, 이 저작들은 모두 어떻게 자본주의적인 지배가 개인들의 종속적 생산의 메커니즘과 결부되어 있는지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또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나름대로의 답변)을 제기한다.

   1) 호명 테제

   알튀세르의 호명 테제는 우선 다음과 같은 형태로 제시된다.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들로 호명한다idéologie interpelle les individus en sujets.(Sur la reproduction, p. 302; 아미엥에서의 주장, 115)

   또는 이 테제는 다음과 같이 좀더 세부적으로 정식화될 수 있다.

   주체 범주는 모든 이데올로기에 구성적이라고 말하자. 하지만 여기에 곧바로 다음과 같은 점을 추가해두자. 주체 범주가 모든 이데올로기에 구성적인 것은 모든 이데올로기가 구체적 개인들을 주체들로 “구성하는” 것을 자신의 기능(이는 이데올로기를 정의하는 기능이다)으로 갖고 있는 한에서다. 바로 이러한 이중적 구성 작용 안에서 모든 이데올로기의 기능작용이 실존하며, 이데올로기는 이 기능작용의 실존의 물질적 형태들 안에서 자신의 기능작용 이외의 것이 아니다.(Sur la reproduction, p. 303; 『아미엥에서의 주장』, 115-116쪽)

   호명의 첫 번째 논점은 우리가 이데올로기나 권력의 작용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하는 개인들이 사실은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알튀세르는 이를 이중적인 구성작용이라고 말한다. 첫째, 주체 범주는 모든 이데올로기에 구성적이다. 이는 다소 과장된 주장처럼 들릴 수 있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에도 존재했던 반면, 주체라는 범주가 근대 사회, 곧 자본주의 사회에 들어서 생겨난 범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자신이 뜻하는 주체라는 범주는 좀더 포괄적인 범주라는 점을 지적한다. 곧 플라톤의 영혼 같은 개념도 일종의 주체 범주이며, 성서에 나오는 신 역시 주체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호명과 거울 구조의 관계를 설명할 때 좀더 구체적으로 예시된다. 둘째, 주체 범주의 구성적 성격은 이데올로기가 구체적 개인들을 주체들로 ‘구성’하는 기능을 갖는 한에서 성립한다는 점이다. 이는 이데올로기가 제도적인 차원에서 개인들을 주체들로 구성하고 그리하여 지배 체계의 재생산을 보장하는 기능을 갖기 때문에, 주체라는 범주가 이데올로기에 구성적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호명에 대한 설명에서 주의할 점은 이것을 시간적인 순서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다. 알튀세르의 위의 정식을 보면 마치 호명은 호명 이전에 존재하는 개인들을 주체들로 바꾸는 작용을 담당하는 것처럼 나타난다. 따라서 개인들이 우선 존재하고 그 다음에 호명이라는 작용이 개입하여 이 개인들을 주체들로 변화시키는 것이 호명의 메커니즘이라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AIE 논문의 뒷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이데올로기의 기능을 표현한 바 있는 시간성의 형식을 제거해야 하며, 이데올로기는 항상 이미 개인들을 주체들로 호명했다고 말해야 한다. ...... 개인들은 항상 이미 주체들이다. 따라서 개인들은, 그것들이 항상 이미 그렇게 존재하는 주체들에 비하면 “추상적”이다.”(Sur la reproduction, p. 306; 『아미엥에서의 주장』, 120쪽)

   2) 호명은 시간적인 작용인가? 

   알튀세르의 이 마지막 주장은 몇 가지 해명을 요구한다. 첫째, 이 마지막 테제는 사람들이 호명 개념에 관해 흔히 범하는 오해를 정정할 수 있게 해준다. 예컨대 앞서 인용한 유명한 사례, 길거리에서 경찰에 의해 호명되는 사람에 관한 삽화를 보자.

   “어이, 거기 당신!” 만약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이론적 장면이 거리에서 일어난다고 가정한다면, 호명된 개인은 뒤를 돌아본다.  180도의 간단한 돌아섬에 의해 그는 주체가 된다(devient). ? 그는 호명이 분명 그에게 전달되었다(s’adressait)는 것, “호명된(était interpellé)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분명 그였다”(c’était bien lui)는 것을 재-인지했기(a reconnu) 때문이다.(Sur la reproduction, p. 305; 아미엥에서의 주장, 119)

   이 삽화에 대한 근본적 오해는 거리에서 발생한 이 호명을 주체 생성의 원인으로, 곧 주체가 주체성을 얻게 되는 원인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또는 이와는 다른 호명들, 예컨대 부모에 의한 자식의 호명, 학교에서 선생님에 의한 학생의 호명 등과 같이 경험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일체의 호명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호명들 모두는 주체 생성의 원인이 아니라, 말브랑슈(Nicolas Malbranche)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의 기회(occasion)에 불과하다. 이는 우선 위의 삽화의 서술에서 사용된 시제를 통해 간단하게 해명될 수 있다. 대부분의 비판가들이나 주석가들이 간과하는 점이지만, 이 삽화에서는 세 가지 시제가 사용되고 있다. 하나는 “된다”는 동사에서 사용된 현재 시제이고, 나머지는 과거시제들인 반과거 시제와 복합과거 시제다.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과거 시제는 거리에서 일어난 이 호명 행위의 시간적 순서를 표현하는 반면, 첫 번째 현재 시제는 이 시간적 순서에서 독립되어 있는 구조적 메커니즘을 표현한다는 점이다(만약 시간적 순서를 표현했다면 “된다”가 아니라 복합과거 시제를 써서 “되었다”(est devenu)고 했을 것이다). 즉 “주체가 된다”는 것은 방금 거리에서 일어난 호명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이 호명 행위를 기회로 해서 다시 한 번 되풀이된 의식적 -인지(re-connaissance), 자기 자신이 주체임을 다시 긍정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이러한 재-인지가 필연적이라는 점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이 주체가 자신을 주체로 재-인지한다는 것은 이 주체가 이미 주체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이렇게 되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불가피하게 제기된다. 그럼 각각의 주체들은 어떻게 항상 이미 주체성을 갖게 되는 것일까? 각각의 주체들이 주체성을 얻게 되는 원인은 어떤 것일까? 알튀세르는 AIE 논문 어디에서도 이 질문에 답변하지 않으며, 『재생산에 대하여』에서도 마찬가지다. 알튀세르의 이러한 침묵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1) 각각의 주체들이 주체성을 얻게 되는 유일한 메커니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곧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이데올로기 국가장치가 이러한 기능을 담당할 수 있으며, 어떤 특정한 이데올로기 국가장치가 주체들을 주체들로 구성하는 유일한 원인으로 기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알튀세르가 가족-학교쌍을 자본주의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로 간주하고 있듯이, 이데올로기에 의한 종속화 메커니즘에서 좀더 지배적이고 좀더 부차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장치들을 구별할 수는 있다. 하지만 특정한 이데올로기 장치에 이러한 호명의 메커니즘을 할당할 수는 없으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은 그가 자본주의적인 제도 속에서 살아가는 한 항상 호명의 작용 속에서 존재하고 행위하고 사고할 수밖에 없다.

   (2) 따라서 호명은 유일한 이데올로기 장치의 전유물도 아닐뿐더러 단 한 차례의 작용에 의해 본질적으로 완결되는 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호명은 지속적으로 이데올로기 장치들에 의해 되풀이되고 개인들에게 전달되어야 하는 작용이다. 이런 의미에서, 종속적 주체들의 생산 작용으로서의 호명은 각각의 기회마다 되풀이해서 이루어지는 수행적인 작용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3) 강한 호명과 약한 호명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로 남는 것은 ‘개인들’과 ‘주체들’ 사이의 관계다. 알튀세르는 양자 사이에 시간적인 관계가 존재하지 않으며, 개인들은 항상 이미 주체들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러한 주체들에 비하면 개인들은 추상적인 범주들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시간적인 질서를 가정하지 않더라도 호명 테제에는 아직 해명해야 할 점이 남아 있다. 호명 테제를 불어 원문 그대로 보면 매우 사소하지만 또 매우 의미심장한 단어가 불분명하게 남아 있다. “idéologie interpelle les individus en sujets.” 여기서 문제가 되는 단어는 “en”이라는 단어다. 이 단어는 우리말 번역본에서는 한번은 “로서”로 번역되고 다른 한번은 “로”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위의 문장은 각각 다음과 같이 번역될 수 있다.

   (a)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들로서 호명한다.”
   (b)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들로 호명한다.”

   이 두 문장은 같은 문장으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실은 꽤 의미심장한 차이를 함축한다. 첫 번째 번역문에서 “로서”는 영어로 하면 “as”에 해당하며, 두 번째 번역문의 “로”는 “into”에 해당한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a)에서 호명은 “개인”에 대하여 “주체”라는 정체성 내지 동일성을 부여하는 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반면 (b)와 같이 이해하면 호명은 정체성 내지 동일성을 부여하는 작용보다는 좀더 강한 의미에서 “전환시키는” 또는 “변화시키는” 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요컨대 (a)에서 호명은 어떤 불변적인 실체에 대해 이러저러한 인위적인(또는 제도적인) 정체성을 부여하는 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반면, (b)의 경우라면 호명은 좀더 실질적인 작용, 곧 하나의 실재로서 “개인”을 또 다른 종류의 실재인 “주체”로 “전환시키는” 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알튀세르는 한 곳에서 다음과 같이 호명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데올로기가 ... 우리가 호명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매우 정확한 작용을 통해 개인들을 주체들로 ‘전환시키는’(transforme) 방식으로 ‘작용’하거나 ‘기능’함을 암시하는 것이다.”(Sur la reproduction, p. 305; 『아미엥에서의 주장』, 118-119쪽)

   (a)처럼 호명을 이해하게 되면, 호명은 이러저러한 정체성을 부여하는 인위적인 작용으로 나타난다. 가령 우리가 학생으로, 군인으로, 정치가로서의 정체성을 부여받는 것 모두가 호명 작용으로 간주될 수 있다. 반면 (b)처럼 이해하게 되면 호명은 좀 더 근본적인 작용으로 이해된다. 이 경우 호명은 개인이라는 상이한 어떤 실체를 주체라는 또 다른 실체로 전환시키는 작용이다.

   그런데 만약 호명이 (a)의 경우처럼 약한 호명을 뜻한다면, 이 경우 ‘개인’은 원초적인 존재론적 범주가 되고, 다양한 ‘주체들’은 이러한 개인이 얻게 되는 이러저러한 인위적 정체성들을 가리키게 된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호명의 이론적 의의는 상당히 축소된다. 호명은 원초적인 존재론적 범주로서의 개인에 대해서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그것에 대해 이런저런 인위적ㆍ사회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작용이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호명이 (b)와 같이 강한 의미의 호명을 뜻한다면, 그것이 전환시키는 ‘개인’이라는 범주의 지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이때의 개인은 알튀세르가 「프로이트와 라캉」에서 시사한 것처럼 생물학적인 개인으로 이해될 수도 있고 아니면 주체화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사후에 추가된 (따라서 가상적인) 어떤 원초적인 존재자로 이해될 수도 있다. 곧 실제로는 주체와 다른 것도 아니고 주체에 선행하는 어떤 존재론적 단위도 아니지만, 설명의 필요상 가상적으로 주체 이전에 존재하는 것처럼 가정된 것이 바로 개인이다. 앞서 인용한 것처럼 알튀세르가 “개인들은 항상 이미 주체들이다. 따라서 개인들은, 그것들이 항상 이미 그렇게 존재하는 주체들에 비하면 “추상적”이다”라고 덧붙인 것은 이 점을 좀더 분명히 해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전자처럼 개인이 생물학적 개인을 가리킨다면, 이것은 사실은 (a)와 다를 바 없게 된다. 그리고 후자처럼 개인이 가상적으로 설정된 항에 불과하다면, 과연 그러한 항에 대해 ‘전환시키다’와 같은 강한 용어를 사용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알튀세르가 호명이라는 용어로 포착하려고 했던 작용은 (a)라기보다는 (b)에 가까운 것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이렇게 호명을 강한 의미로 사용한다면, 호명이 전환시키는 ‘개인’이라는 범주의 지위가 계속 문제로 남는다. 이 범주에 대해 강한 존재론적 위상을 부여할 경우 호명의 의의가 축소되는 반면, 이 범주의 의미를 약화시키면 호명은 순환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곧 호명은 개인을 개인으로 호명하거나 주체를 주체로 호명하는 작용이 된다. 따라서 알튀세르 호명이론의 아포리아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슬로베니아의 이론가 슬라보예 지젝(Slavoy Zizek)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지식인 중 한 사람으로, 국내에도 그의 저서 대부분이 번역되어 있다. 지젝은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헤겔 철학에 입각한 현대 문화와 정치 현상에 대한 분석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이론적 작업의 기저에는 정신분석학적인 이데올로기론의 구성이라는 주제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에서 그가 지속적으로 대결하고 있는 바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 특히 그의 호명 이론이다. 실제로 지젝은 그의 출세작인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1989)에서부터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Tarrying with the Negative, 1993), 「이데올로기의 유령」(The Specter of Ideology1994), 『나눌 수 없는 잔여』(The Indivisible Remainder, 1996)나 『까다로운 주체』(The Ticklish Subject, 1999) 등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비판하고 라캉주의적인 관점에서 이를 개조하거나 변형하려고 시도해왔다. 그의 비판의 논점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핵심은 호명 이론에 있다. 곧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들로 호명하며, 이를 통해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재생산에 기여한다는 것이 그의 이데올로기론의 근본적인 전언이다.

   2) 하지만 호명 이론은 그의 이론의 가장 독창적인 부분이면서 또한 근본적인 한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호명 이론은 어떻게 지배에 대한 저항이나 지배 체계를 넘어서는 것이 가능한지 보여주지 못하며, 모든 주체는 결국 지배 체계의 재생산 메커니즘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숙명론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3) 알튀세르가 이런 한계에 부딪치는 이유는, 라캉의 욕망의 그래프 상에서 본다면 그가 첫 번째 수준(곧 욕망의 그래프 1과 2의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라캉의 욕망의 그래프에 대한 지젝의 해석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이수련 옮김, 인간사랑, 2002, 177-225쪽 참조). 다시 말해 그의 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