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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알튀세의 '호명'에 대한 비판적 독해 (진태원)    
  글쓴이 : 미선 날 짜 : 17-05-07 04:03 조회(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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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명이라는 개념은 프랑스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 1918-1990)가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1970)(이하에서는 AIE 논문으로 약칭하겠다)이라는 논문에서 처음 소개한 이후 현대 인문사회과학에서 가장 널리 활용되는 개념 중 하나다.(“Idéologie et les appareils idéologiques d’État”, La Pensée, no. 151, juin 1970. 이 논문은 알튀세르의 저서 Postions, Éditions sociales, 1976에 재수록되었으며[국역본: 『아미엥에서의 주장』, 김동수 옮김, 솔, 1991], 알튀세르 사후 유고로 출간된 Sur la reproduction, PUF, 1995[국역본: 『재생산에 대하여』,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7]에도 포함돼 있다. 이 글에서는 불어 원문으로 Sur la reproduction에 수록된 글을 이용했으며, 국역본으로는 『아미엥에서의 주장』에 수록된 글을 참고했다.) 

   엥테르펠라시옹은 원래는 상당히 특수한 의미를 가진 단어다. 이 단어는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이 정부 각료에 대해 질의를 하는 것, 또는 정부 각료가 의원들의 질의에 대해 답변을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하지만 이 단어가 일상적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은 경찰이 길거리에서 검문검색을 하는 경우다. 곧 범죄자나 수상한 사람들(간첩, 또는 프랑스의 경우는 이른바 ‘불법체류자’ 등)을 찾아내기 위한 목적으로 누군가의 신원을 조사하는 (불심)검문 행위가 엥테르펠라시옹의 대표적인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알튀세르는 처음 호명을 이론화하면서 경찰이 길을 가는 사람을 불러세우는 경우를 호명의 예로 든다. ““어이, 거기 당신!” 만약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이론적 장면이 거리에서 일어난다고 가정한다면, 호명된 개인은 뒤를 돌아본다. 이 180도의 간단한 돌아섬에 의해 그는 주체가 된다. 왜? 그는 호명이 ‘분명’ 그에게 전달되었다는 것, ‘호명된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분명 그였다’는 것을 재-인지했기 때문이다”.(Sur la reproduction, p. 305; 『아미엥에서의 주장』, 119쪽—강조는 알튀세르. 이하 해당 국역본의 쪽수를 표시하겠지만, 번역은 필자의 수정된 번역임을 일러둔다. 그러나 수정된 사항을 일일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검문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호명 개념은 부르주아 계급 지배의 메커니즘을 해명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알튀세르는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 이론이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데서 근원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보고, 스피노자 철학과 정신분석 이론을 원용하여 매우 독창적인 이데올로기론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 이데올로기론에서 핵심 요소로 작용하는 것이 호명 개념이다. 따라서 호명 개념은 처음에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긴밀하게 결부돼 있었지만, 알튀세르 이후에는 철학과 문예이론, 정치학 및 사회학, 여성 이론, 민족(ethnic group)과 인종주의 이론 등에서 종속적인 주체 생산의 작용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 개념이 이처럼 많은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은 호명 개념에는 마르크스주의와 근대성, (후기) 구조주의의 핵심 쟁점들이 복합적으로 함축돼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적인 관점에서 보면 호명은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가 어떻게 재생산되는지 구체적으로 해명하는 데 관건이 되는 개념이다. 우선 추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호명은 흔히 자유로운 것으로 간주되는 개인들 내지 주체들이 바로 그 개인들 내지 주체들로서 존재하는 양식이 사실은 계급 지배의 메커니즘과 내재적으로 연루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인간의 개인적인 실존 양식, 개인성 그 자체가 계급 지배 및 권력에 대한 예속을 전제로 한다면,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생산양식에 대한 분석을 넘어서 이데올로기적 권력 또는 상징적 권력에 대한 분석을 필수적인 요소로 포함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비록 알튀세르 자신은 간단한 소묘 이상을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역사적 차원에서 본다면 호명 개념은 자본주의 사회의 제도 속에서 어떻게 개인 주체들이 구체적으로 형성되는지 분석할 수 있는 이론적 지침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가령 그의 제자였던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가 이론화했던 것처럼, 호명은 국민국가의 제도 속에서 각각의 개인들이 일차적으로 국민적 개인(한국인, 일본인, 프랑스인, 독일인 등)으로서 형성되고 정체화되는 과정을 설명해줄 수 있다.

   근대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호명 개념은 근대 주체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제기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주지하다시피 칸트 이래로 주체는 근대철학의 핵심 범주로 존재해왔다. 근대 철학의 기본 범주로 이해된 주체는 인간의 모든 인식 및 (도덕적) 실천의 토대로 기능하며, 따라서 그보다 상위의 원리에 종속되지 않는 자율적인 존재자로 간주된다. 하지만 호명 개념에서 주체는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 질서를 재생산하기 위한 메커니즘의 파생물로, 이데올로기의 산물로 제시된다. 이렇게 되면 주체는 정의상 종속적인 주체인 셈이며, 근대철학의 가정과는 달리 본질적으로 ‘종속화’(assujettissement)의 산물인 셈이다. (여기에는 어원적인 함의도 들어 있다. 불어의 sujet나 영어의 subject는 ‘복종’ 내지 ‘종속’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중세 및 근대 초기의 정치신학에서 신민(臣民)을 뜻하던 단어는 ‘subjectus’였다. 따라서 칸트 철학 이후 보통 자율적인 존재자로 간주되는 주체라는 개념의 어원에는 종속적인 존재자라는 뜻이 담겨 있는 셈이다.) 근원적으로 자율적인 존재자로 간주되는 주체가 사실은 종속화의 산물이며 주체의 자율성 주장은 사실은 이러한 종속화의 메커니즘을 은폐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면, 근대성의 원칙 자체가 근원적인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후기 구조주의의 이론적인 맥락에서 본다면 알튀세르의 호명 개념은 68년 학생ㆍ노동자 봉기 이후 프랑스 철학의 방향 변화를 예고한 개념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실제로 들뢰즈와 가타리는 1972년 『반오이디푸스』를 출간하고 푸코는 1975년 『감시와 처벌』을 발표하는데, 이 저작들은 모두 어떻게 자본주의적인 지배가 개인들의 종속적 생산의 메커니즘과 결부되어 있는지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또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나름대로의 답변)을 제기한다.

   1) 호명 테제

   알튀세르의 호명 테제는 우선 다음과 같은 형태로 제시된다.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들로 호명한다idéologie interpelle les individus en sujets.(Sur la reproduction, p. 302; 아미엥에서의 주장, 115)

   또는 이 테제는 다음과 같이 좀더 세부적으로 정식화될 수 있다.

   주체 범주는 모든 이데올로기에 구성적이라고 말하자. 하지만 여기에 곧바로 다음과 같은 점을 추가해두자. 주체 범주가 모든 이데올로기에 구성적인 것은 모든 이데올로기가 구체적 개인들을 주체들로 “구성하는” 것을 자신의 기능(이는 이데올로기를 정의하는 기능이다)으로 갖고 있는 한에서다. 바로 이러한 이중적 구성 작용 안에서 모든 이데올로기의 기능작용이 실존하며, 이데올로기는 이 기능작용의 실존의 물질적 형태들 안에서 자신의 기능작용 이외의 것이 아니다.(Sur la reproduction, p. 303; 『아미엥에서의 주장』, 115-116쪽)

   호명의 첫 번째 논점은 우리가 이데올로기나 권력의 작용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하는 개인들이 사실은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알튀세르는 이를 이중적인 구성작용이라고 말한다. 첫째, 주체 범주는 모든 이데올로기에 구성적이다. 이는 다소 과장된 주장처럼 들릴 수 있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에도 존재했던 반면, 주체라는 범주가 근대 사회, 곧 자본주의 사회에 들어서 생겨난 범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자신이 뜻하는 주체라는 범주는 좀더 포괄적인 범주라는 점을 지적한다. 곧 플라톤의 영혼 같은 개념도 일종의 주체 범주이며, 성서에 나오는 신 역시 주체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호명과 거울 구조의 관계를 설명할 때 좀더 구체적으로 예시된다. 둘째, 주체 범주의 구성적 성격은 이데올로기가 구체적 개인들을 주체들로 ‘구성’하는 기능을 갖는 한에서 성립한다는 점이다. 이는 이데올로기가 제도적인 차원에서 개인들을 주체들로 구성하고 그리하여 지배 체계의 재생산을 보장하는 기능을 갖기 때문에, 주체라는 범주가 이데올로기에 구성적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호명에 대한 설명에서 주의할 점은 이것을 시간적인 순서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다. 알튀세르의 위의 정식을 보면 마치 호명은 호명 이전에 존재하는 개인들을 주체들로 바꾸는 작용을 담당하는 것처럼 나타난다. 따라서 개인들이 우선 존재하고 그 다음에 호명이라는 작용이 개입하여 이 개인들을 주체들로 변화시키는 것이 호명의 메커니즘이라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AIE 논문의 뒷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이데올로기의 기능을 표현한 바 있는 시간성의 형식을 제거해야 하며, 이데올로기는 항상 이미 개인들을 주체들로 호명했다고 말해야 한다. ...... 개인들은 항상 이미 주체들이다. 따라서 개인들은, 그것들이 항상 이미 그렇게 존재하는 주체들에 비하면 “추상적”이다.”(Sur la reproduction, p. 306; 『아미엥에서의 주장』, 120쪽)

   2) 호명은 시간적인 작용인가? 

   알튀세르의 이 마지막 주장은 몇 가지 해명을 요구한다. 첫째, 이 마지막 테제는 사람들이 호명 개념에 관해 흔히 범하는 오해를 정정할 수 있게 해준다. 예컨대 앞서 인용한 유명한 사례, 길거리에서 경찰에 의해 호명되는 사람에 관한 삽화를 보자.

   “어이, 거기 당신!” 만약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이론적 장면이 거리에서 일어난다고 가정한다면, 호명된 개인은 뒤를 돌아본다.  180도의 간단한 돌아섬에 의해 그는 주체가 된다(devient). ? 그는 호명이 분명 그에게 전달되었다(s’adressait)는 것, “호명된(était interpellé)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분명 그였다”(c’était bien lui)는 것을 재-인지했기(a reconnu) 때문이다.(Sur la reproduction, p. 305; 아미엥에서의 주장, 119)

   이 삽화에 대한 근본적 오해는 거리에서 발생한 이 호명을 주체 생성의 원인으로, 곧 주체가 주체성을 얻게 되는 원인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또는 이와는 다른 호명들, 예컨대 부모에 의한 자식의 호명, 학교에서 선생님에 의한 학생의 호명 등과 같이 경험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일체의 호명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호명들 모두는 주체 생성의 원인이 아니라, 말브랑슈(Nicolas Malbranche)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의 기회(occasion)에 불과하다. 이는 우선 위의 삽화의 서술에서 사용된 시제를 통해 간단하게 해명될 수 있다. 대부분의 비판가들이나 주석가들이 간과하는 점이지만, 이 삽화에서는 세 가지 시제가 사용되고 있다. 하나는 “된다”는 동사에서 사용된 현재 시제이고, 나머지는 과거시제들인 반과거 시제와 복합과거 시제다.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과거 시제는 거리에서 일어난 이 호명 행위의 시간적 순서를 표현하는 반면, 첫 번째 현재 시제는 이 시간적 순서에서 독립되어 있는 구조적 메커니즘을 표현한다는 점이다(만약 시간적 순서를 표현했다면 “된다”가 아니라 복합과거 시제를 써서 “되었다”(est devenu)고 했을 것이다). 즉 “주체가 된다”는 것은 방금 거리에서 일어난 호명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이 호명 행위를 기회로 해서 다시 한 번 되풀이된 의식적 -인지(re-connaissance), 자기 자신이 주체임을 다시 긍정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이러한 재-인지가 필연적이라는 점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이 주체가 자신을 주체로 재-인지한다는 것은 이 주체가 이미 주체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이렇게 되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불가피하게 제기된다. 그럼 각각의 주체들은 어떻게 항상 이미 주체성을 갖게 되는 것일까? 각각의 주체들이 주체성을 얻게 되는 원인은 어떤 것일까? 알튀세르는 AIE 논문 어디에서도 이 질문에 답변하지 않으며, 『재생산에 대하여』에서도 마찬가지다. 알튀세르의 이러한 침묵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1) 각각의 주체들이 주체성을 얻게 되는 유일한 메커니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곧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이데올로기 국가장치가 이러한 기능을 담당할 수 있으며, 어떤 특정한 이데올로기 국가장치가 주체들을 주체들로 구성하는 유일한 원인으로 기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알튀세르가 가족-학교쌍을 자본주의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로 간주하고 있듯이, 이데올로기에 의한 종속화 메커니즘에서 좀더 지배적이고 좀더 부차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장치들을 구별할 수는 있다. 하지만 특정한 이데올로기 장치에 이러한 호명의 메커니즘을 할당할 수는 없으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은 그가 자본주의적인 제도 속에서 살아가는 한 항상 호명의 작용 속에서 존재하고 행위하고 사고할 수밖에 없다.

   (2) 따라서 호명은 유일한 이데올로기 장치의 전유물도 아닐뿐더러 단 한 차례의 작용에 의해 본질적으로 완결되는 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호명은 지속적으로 이데올로기 장치들에 의해 되풀이되고 개인들에게 전달되어야 하는 작용이다. 이런 의미에서, 종속적 주체들의 생산 작용으로서의 호명은 각각의 기회마다 되풀이해서 이루어지는 수행적인 작용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3) 강한 호명과 약한 호명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로 남는 것은 ‘개인들’과 ‘주체들’ 사이의 관계다. 알튀세르는 양자 사이에 시간적인 관계가 존재하지 않으며, 개인들은 항상 이미 주체들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러한 주체들에 비하면 개인들은 추상적인 범주들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시간적인 질서를 가정하지 않더라도 호명 테제에는 아직 해명해야 할 점이 남아 있다. 호명 테제를 불어 원문 그대로 보면 매우 사소하지만 또 매우 의미심장한 단어가 불분명하게 남아 있다. “idéologie interpelle les individus en sujets.” 여기서 문제가 되는 단어는 “en”이라는 단어다. 이 단어는 우리말 번역본에서는 한번은 “로서”로 번역되고 다른 한번은 “로”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위의 문장은 각각 다음과 같이 번역될 수 있다.

   (a)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들로서 호명한다.”
   (b)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들로 호명한다.”

   이 두 문장은 같은 문장으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실은 꽤 의미심장한 차이를 함축한다. 첫 번째 번역문에서 “로서”는 영어로 하면 “as”에 해당하며, 두 번째 번역문의 “로”는 “into”에 해당한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a)에서 호명은 “개인”에 대하여 “주체”라는 정체성 내지 동일성을 부여하는 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반면 (b)와 같이 이해하면 호명은 정체성 내지 동일성을 부여하는 작용보다는 좀더 강한 의미에서 “전환시키는” 또는 “변화시키는” 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요컨대 (a)에서 호명은 어떤 불변적인 실체에 대해 이러저러한 인위적인(또는 제도적인) 정체성을 부여하는 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반면, (b)의 경우라면 호명은 좀더 실질적인 작용, 곧 하나의 실재로서 “개인”을 또 다른 종류의 실재인 “주체”로 “전환시키는” 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알튀세르는 한 곳에서 다음과 같이 호명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데올로기가 ... 우리가 호명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매우 정확한 작용을 통해 개인들을 주체들로 ‘전환시키는’(transforme) 방식으로 ‘작용’하거나 ‘기능’함을 암시하는 것이다.”(Sur la reproduction, p. 305; 『아미엥에서의 주장』, 118-119쪽)

   (a)처럼 호명을 이해하게 되면, 호명은 이러저러한 정체성을 부여하는 인위적인 작용으로 나타난다. 가령 우리가 학생으로, 군인으로, 정치가로서의 정체성을 부여받는 것 모두가 호명 작용으로 간주될 수 있다. 반면 (b)처럼 이해하게 되면 호명은 좀 더 근본적인 작용으로 이해된다. 이 경우 호명은 개인이라는 상이한 어떤 실체를 주체라는 또 다른 실체로 전환시키는 작용이다.

   그런데 만약 호명이 (a)의 경우처럼 약한 호명을 뜻한다면, 이 경우 ‘개인’은 원초적인 존재론적 범주가 되고, 다양한 ‘주체들’은 이러한 개인이 얻게 되는 이러저러한 인위적 정체성들을 가리키게 된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호명의 이론적 의의는 상당히 축소된다. 호명은 원초적인 존재론적 범주로서의 개인에 대해서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그것에 대해 이런저런 인위적ㆍ사회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작용이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호명이 (b)와 같이 강한 의미의 호명을 뜻한다면, 그것이 전환시키는 ‘개인’이라는 범주의 지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이때의 개인은 알튀세르가 「프로이트와 라캉」에서 시사한 것처럼 생물학적인 개인으로 이해될 수도 있고 아니면 주체화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사후에 추가된 (따라서 가상적인) 어떤 원초적인 존재자로 이해될 수도 있다. 곧 실제로는 주체와 다른 것도 아니고 주체에 선행하는 어떤 존재론적 단위도 아니지만, 설명의 필요상 가상적으로 주체 이전에 존재하는 것처럼 가정된 것이 바로 개인이다. 앞서 인용한 것처럼 알튀세르가 “개인들은 항상 이미 주체들이다. 따라서 개인들은, 그것들이 항상 이미 그렇게 존재하는 주체들에 비하면 “추상적”이다”라고 덧붙인 것은 이 점을 좀더 분명히 해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전자처럼 개인이 생물학적 개인을 가리킨다면, 이것은 사실은 (a)와 다를 바 없게 된다. 그리고 후자처럼 개인이 가상적으로 설정된 항에 불과하다면, 과연 그러한 항에 대해 ‘전환시키다’와 같은 강한 용어를 사용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알튀세르가 호명이라는 용어로 포착하려고 했던 작용은 (a)라기보다는 (b)에 가까운 것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이렇게 호명을 강한 의미로 사용한다면, 호명이 전환시키는 ‘개인’이라는 범주의 지위가 계속 문제로 남는다. 이 범주에 대해 강한 존재론적 위상을 부여할 경우 호명의 의의가 축소되는 반면, 이 범주의 의미를 약화시키면 호명은 순환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곧 호명은 개인을 개인으로 호명하거나 주체를 주체로 호명하는 작용이 된다. 따라서 알튀세르 호명이론의 아포리아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슬로베니아의 이론가 슬라보예 지젝(Slavoy Zizek)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지식인 중 한 사람으로, 국내에도 그의 저서 대부분이 번역되어 있다. 지젝은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헤겔 철학에 입각한 현대 문화와 정치 현상에 대한 분석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이론적 작업의 기저에는 정신분석학적인 이데올로기론의 구성이라는 주제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에서 그가 지속적으로 대결하고 있는 바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 특히 그의 호명 이론이다. 실제로 지젝은 그의 출세작인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1989)에서부터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Tarrying with the Negative, 1993), 「이데올로기의 유령」(The Specter of Ideology1994), 『나눌 수 없는 잔여』(The Indivisible Remainder, 1996)나 『까다로운 주체』(The Ticklish Subject, 1999) 등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비판하고 라캉주의적인 관점에서 이를 개조하거나 변형하려고 시도해왔다. 그의 비판의 논점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핵심은 호명 이론에 있다. 곧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들로 호명하며, 이를 통해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재생산에 기여한다는 것이 그의 이데올로기론의 근본적인 전언이다.

   2) 하지만 호명 이론은 그의 이론의 가장 독창적인 부분이면서 또한 근본적인 한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호명 이론은 어떻게 지배에 대한 저항이나 지배 체계를 넘어서는 것이 가능한지 보여주지 못하며, 모든 주체는 결국 지배 체계의 재생산 메커니즘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숙명론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3) 알튀세르가 이런 한계에 부딪치는 이유는, 라캉의 욕망의 그래프 상에서 본다면 그가 첫 번째 수준(곧 욕망의 그래프 1과 2의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라캉의 욕망의 그래프에 대한 지젝의 해석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이수련 옮김, 인간사랑, 2002, 177-225쪽 참조). 다시 말해 그의 이데올로기론, 특히 그의 호명 이론은 부유하는 기표들의 의미를 고정시켜 주는 이데올로기적 누빔점에 관한 이론에 그치고 있다. 이러한 도식에서 모든 호명은 항상 성공하기 마련이며, 모든 주체는 항상 주인기표를 통해 호명된다.

   가장 단순한 욕망의 그래프로 지젝의 주장을 예시해보자.

   이 그래프에서 S → S’ 는 기표들의 연쇄, 곧 상징적 질서를 가리키며, △ → $ 는 개인이 주체($는 주체를 가리킨다)로 호명되는 벡터를 나타낸다. 그래프 상에서 보면 S → S’ 의 벡터가 △ → $의 벡터를 꿰뚫고 지나가는데, 라캉과 지젝은 이것을 바느질의 어휘를 빌려와서 “누비질”이라고 부르고, 두 벡터가 교차하는 두 개의 지점을 “누빔점”(point de capition, 영어로는 quilting point)이라고 부른다. 이 그래프는 호명 이전의 어떤 개인(그래프 상에서는 △로 표시된)이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표 연쇄, 곧 상징적 질서를 통과해야 함을 보여준다. 더욱이 주체 이전의 이 개인은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존재자가 아니라, 호명의 과정을 거쳐 형성된 주체에 의해 사후에 투사된 가상적인 것이다.

   4) 반면 라캉의 이론은 알튀세르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을 제공해주는데, 그것의 핵심은 “환상을 가로지르기”라는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 욕망의 그래프 상에서 보면 세 번째 그래프(“케보이(Che vuoi)?” 이것은 이탈리아어로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뜻한다)는 상징적 질서인 대타자(Autre)에 의해 부여된 자신의 역할에 대해 회의하는 주체, 곧 히스테리에 걸린 주체를 나타낸다. 히스테리적인 주체는 상징적 질서가 자신에게 부여한 정체성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의심을 품고 저항하는 주체다.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왜 나는 사람들이 가정하는 그것인가?” “왜 나는 (선생, 주인, 왕 등등)인가?” “왜 나는 당신(대타자)가 나라고 말하는 바가 되는 것일까?” 지젝에 따르면 이처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회의한다는 것은 바로 주체에게 전달된 호명이 실패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히스테리적인 질문은 “주체를 상징적인 네트워크에 종속시키고 포함시키는 호명과정에 저항하는 주체 속의 대상의 간극을 열어놓는다.”(『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199쪽)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네 번째 그래프는 그 이전까지 일관된 것, 아무런 공백이나 균열도 없는 충만하고 전능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타자 자체 내에 공백이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네 번째 그래프 이전까지 대타자는 전지전능한 어떤 것, 곧 완전무결한 질서를 갖추고 있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빈틈없는 전체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케보이?”를 통해 이러한 대타자는 완전무결한 어떤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공백과 결여를 감추고 있는 어떤 것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라캉의 용어법대로 하면 상징적 질서인 대타자는 상징화될 수 없는 것인 향락(jouissance/enjoyment)을 중심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호명은 대타자가 자신의 공백과 결여를 감추기 위해 주체들을 포섭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젝이 대타자 속의 공백을 드러내는 욕망의 그래프의 두 번째 수준 전체(3번째와 4번째 그래프)가 “호명 너머의 차원을 지칭한다”(『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216쪽)고 주장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따라서 타자 속에 존재하는 이러한 공백 내지 균열이 그보다 아래 수준의 그래프에 위치한 주체들에게 은폐되어 있는 것은 바로 “환상”(phantasy) 때문이다. 곧 환상은 “케보이?”,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며, 정상적인 주체들은 이러한 환상을 통해 욕망하는 법을 배운다. 환상의 차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일관된 의미의 질서, 상징적 질서는 불가능하며, 주체들 각자가 이러한 상징적 질서 속에서 자신들의 동일성을 획득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네번째 욕망의 그래프 상에서 환상의 도식이 빗금 쳐진 주체와 대상 a의 조우로 표시되는 것($◇a)은 이를 가리킨다). 따라서 환상이 수행하는 기능은 이중적이다. 그것은 한 편으로 주체가 향락을 경험하고 자신의 일관성을 유지하게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대타자의 공백을 메우면서 상징적 질서를 유지시켜준다.

   라캉에 따르면 정신분석적인 치료는 피분석자 또는 분석 주체가 분석가(타자)와의 동일시를 넘어서 분석가의 수수께끼 같은 욕망(“x로 남아 있는 분석가의 욕망”)을 대면하고 이로써 자신의 욕망을 발견할 경우에 종결된다. 이는 다른 식으로 말하면 주체가 타자로부터 배제된 대상 a가 주체 자신의 “결핍”(destitution), 공백을 메우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러한 대상 a와 분리되어 자신의 결핍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주체는 자신이 충만한 주체, 아무런 공백을 지니지 않은 자율적 주체가 아니라 자기 내부에 공백을 지닌 주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정신분석 임상의 차원에서 환상을 가로지르기가 뜻하는 바다.

   지젝은 이러한 임상적인 차원의 개념을 사회적 차원, 이데올로기론의 차원에 적용하려고 시도한다. 이 경우 환상을 가로지르기가 의미하는 것은 상징적 질서에 의해 부여된 동일성을 거부하는 것, 다시 말해 그가 “행위act” 또는 “본래적 행위”(S. Zizek, The Ticklish Subject, Verso, 1999, p. 266; 슬라보예 지젝, 『까다로운 주체』, 이성민 옮김, 도서출판 b, 2007, 428쪽)라고 부르는 것이다. 

   요컨대 알튀세르는 호명 이론을 통해 어떻게 각각의 주체가 이데올로기 장치들 내지 (라캉 식으로 표현하면) 상징적 질서를 통해 상징적 동일성을 부여받고 있는지 해명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상징적 동일화를 넘어 그것을 가능케 하는 환상의 차원, 곧 타자 자체의 공백을 메우는 차원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어떻게 주체가 상징적 동일화 메커니즘인 호명을 넘어설 수 있는지 설명하는 데 실패했다. 라캉 정신분석학의 중요성은 이데올로기적인 상징적 동일화 배후에서 작동하는 이러한 환상의 차원을 밝힐 수 있게 해주고, 더 나아가 환상을 가로지르는 길을 보여주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일체의 상징적 동일화를 거부하는 “본래적 행위”에서 찾아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지젝의 비판 역시 몇 가지 난점을 안고 있다. 우선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알튀세르 자신의 이론을 포함하는 전통적인 이데올로기론에서 이데올로기는 자신의 존재의의와 실재성, 효력을 토대에 의존하게 된다.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가 이데올로기인 이유는 그것이 생산양식(또는 간단히 말하면 경제)으로서의 토대에 준거하면서도, 그러한 토대가 존재하며 자신이 그 토대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은폐하거나 왜곡한다는 데 있다. 자본가 계급이 지배하고 산업노동자를 비롯한 임노동자들은 자본의 의해 착취되는 현실에서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이 바로 이데올로기가 된다. 따라서 중요한 문제는 이데올로기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은폐하거나 왜곡하는 토대, 경제 자체를 변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데올로기는 순전히 부정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그것이 수행하는 어떤 적극적 기능은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의의는 이데올로기를 토대와 관련시키면서도 그것이 수행하는 적극적ㆍ구성적인 역할을 해명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라는 개념과 이데올로기의 물질성 및 호명 개념을 통해 그러한 작업을 수행한다.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본질적인 긴장은 여기서 비롯한다. 곧 그는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에 충실하게 이데올로기를 경제적 토대 또는 계급투쟁에 근거 짓는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이데올로기의 물질성 및 호명 개념을 통해 이데올로기에 대해 전통 이론에서 볼 수 없었던 커다란 실재성을 부여한다. 이데올로기는 토대에 의존한다는 점에서는 기본적으로 부차적이지만, 토대 자체의 구성이 이데올로기에 의존한다는 점에서는 토대 못지않게 실재적이고 일차적이다.

   반면 지젝에게는 더 이상 경제적 토대가 궁극적인 이데올로기의 준거로 기능하지 않으며, 국가가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지주로 작동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데올로기의 토대 내지 근거, 궁극적인 현실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바로 정신분석적 의미의 ‘실재’이며,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지주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향유’다. 이러한 실재는 이데올로기적인 봉합 또는 봉쇄의 불가능성의 다른 이름이면서 사회적 적대의 표현이며, 향유는 개인들의 내밀한 욕망과 충동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의 지주다.

    따라서 지젝의 이론은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매우 구체적인, 또한 매우 미시적인 차원을 밝혀준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의 이론은 역설적이게도 이데올로기를 근본적으로 탈실재화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지젝은 이데올로기에는 항상 실재의 차원이 존재한다고 역설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에서는 국가도 경제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여전히 국가와 경제에 의해 지배된다면, 이데올로기가 이러한 거대 장치와 어떻게 연관을 맺고 있는지 설명하는 것은 이데올로기론의 핵심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지젝의 이론이 정치적 차원에서 어떤 전략적인 질문을 가능하게 하는 것인지도 질문해볼 수 있다. 국가장치나 경제 제도의 변혁이나 개조의 쟁점들을 구체화하는 전략적 질문들이 없는 정치란 결국 전무 아니면 전부(자본주의의 유지냐 자본주의의 전면적인 폐지냐)라는 거대하지만 허망한 물음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라는 말이다. 

   이것은 곧 이데올로기는 순전히 부정적인 것인지 아니면 어떤 적극성 내지 실정성을 지닌 것인지 하는 질문과 연결된다. 알튀세르는 자신의 이데올로기론에서 여러 번에 걸쳐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의 한 대목을 인용한다. “사람들이 그 속에서 투쟁을 의식하며 그것을 이끌어나가는 법적ㆍ정치적ㆍ종교적ㆍ예술적 또는 철학적 형태.”(『아미엥에서의 주장』, 김동수 옮김, 솔, 1991, 93쪽 주 11)) 이것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이 “단순히 계급투쟁의 쟁점일 뿐만 아니라 그 장소이기도 하다는 것”, 다시 말해 “피착취계급의 저항이, 그 속에 존재하는 모순들을 이용하거나 그 속에서 투쟁을 통해 전투 진지들을 장악함으로써, 그 속에 자신을 표현시킬 방도와 기회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순전히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기만하거나 조작ㆍ왜곡하기 위한 그릇된 관념이나 표상들의 집합이 아니다. 알튀세르에게 이데올로기는 생활 세계와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결코 의식의 한 형태로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세계’의 한 대상처럼, 자신들의 ‘세계’ 자체처럼, 그렇게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살아간다’.”(L. Althusser, Pour Marx, La Découverte, 1996, p. 240; 『맑스를 위하여』, 이종영 옮김, 백의, 1997, 240쪽) 이것은 알튀세르가 라캉이 아니라 스피노자에게서 받아들인 상상계 개념에 기초하여 자신의 이데올로기론을 구성했기 때문이다.

   반면 지젝에게 이데올로기는 부정적인 것, 곧 기만하고 은폐하고 왜곡하는 성격의 것이다. 이 점은 그가 이데올로기의 대표적인 사례로 자주 언급하는 반유대주의에 대한 논의에서 잘 드러난다. 그에게 이데올로기적 환상의 목적은 진정으로 존재하는 사회에 대한 하나의 비전을 구축하는 것, 곧 “사회를 하나의 유기적인 통일체로서, 하나의 사회적 신체로서” 파악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데올로기이고 환상인 이유는, 실제의 사회는 여러 가지 적대와 갈등으로 균열돼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실제의 사회적 균열과 이데올로기적인 통합의 비전 사이의 괴리를 봉합해야 하는데, 여기서 유대인이 이러한 괴리를 메우는 물신(fetish)으로서 기능하게 된다. 곧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유대인은 원래 조화롭고 통합적인 사회의 갈등과 적대를 유발하는 이질적인 몸체, 제거되어야 할 병리적 요소가 된다.

   이것이 이데올로기의 특징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젝은 증상(이 경우에는 유대인)과의 동일시라는 해법을 제시한다. 곧 유대인은 전체주의 이데올로기가 겨냥하는 것, 다시 말해 사회적 적대와 갈등을 은폐하는 작용을 위해 동원된 것이며, 따라서 유대인이야말로 전체주의의 (완결) 불가능성을 구현하고 있는 요소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에 내재되어 있는 적대 관계가 어떤 구체적인 형태를 띠고 사회의 표면 위로 돌출하는 지점이다. 다시 말해 사회가 ‘고장났다는’ 사실이, 사회의 메커니즘이 ‘삐걱거리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는 지점인 것이다.”(『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222쪽)

   하지만 이런 질문이 계속 제기될 수 있다. 그렇다면 증상과의 동일시가 낳는 것은 무엇인가? 사회는 통합돼 있지 않다는 사실, 조화로운 유기체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 이것은 거창한 이론적 장치들을 동원한 결과치고는 너무 사소한 것 아닌가? 이것이 호명을 넘어선다는 것이 뜻하는 바인가? 더욱이 지젝이 역설하듯이, 이데올로기적 호명은 무의식적인 향락의 차원에 근거를 두고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무의식적인 향락, 곧 상징화 불가능한 것, 따라서 합리적 인식이나 의지의 차원을 넘어선 것이라면, 증상과의 동일시라는 것 자체가 어떻게 가능한가?

   지젝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통해 알튀세르의 호명을 넘어서는 길을 발견할 수 있노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이데올로기적 호명의 버팀목을 무의식적인 향락에 위치시키는 반면, 호명을 넘어서기 위한 ‘증상과의 동일시’라는 것은 사회적 적대의 존재에 대한 의식 내지 자각에 불과한 것이라면, ‘호명을 넘어서기’란 더욱더 불가능해지는 것은 아닌가? 호명은 그야말로 전체주의적인 전면적 포섭과 종속의 작용이 되는 것 아닌가?





알튀세르의 호명 개념은 그의 제자였던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에 의해 국민 형태 개념으로 새로운 굴절을 겪는다. 발리바르는 알튀세르 이후 이데올로기론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이론가들 중 한 명이다. 그는 알튀세르의 이론적 작업의 핵심 중 하나가 이데올로기론이라고 간주할 뿐만 아니라, (알튀세르 자신을 포함한)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모순의 중심에 이데올로기의 동요가 놓여 있다고 볼 만큼 [ "대중들의 공 ", 서관모 · 최원 옮김, 도서출판b, 2007 중 제 3부 "맑스주의에서의 이데올로기의 동요" 참조. 덧붙인다면, 이 책의 번역은 전반적으로 좋은 편이나, 이 3부의 번역은 꽤 문제가 있다. 따라서 학술적인 논의를 위해서는 반드시 불어본 E. Balibar, La crainte des masses, Galilée, 1997이나 영역본 Masses, Classes, Ideas, Routledge, 1994를 참고해야 한다], 따라서 이 문제가 마르크스주의 전화(轉化)의 핵심을 이룬다고 간주할 만큼 이데올로기 개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데올로기론에 대한 발리바르의 개조는—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지만—호명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계기로 이루어져 있다.

  • - 이데올로기론에서 대중의 존재론적 우위
  • - 종속화와 주체화의 변증법: 신민-개인-시민
  • - 이데올로기의 역사화: 국민 형태의 변증법


   1. 이데올로기론에서 대중의 존재론적 우위

   이데올로기론에서 대중의 존재론적 우위라는 관점은 비동시대성: 정치와 이데올로기라는 논문에서 가장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내가 보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이데올로기’의 기능작용 속에서 특권적인 능동적 역할을 피억압자들 또는 피착취자들에게 (적어도 잠재적으로) 부여하는 이유들을 설명하는 것이다. (에티엔 발리바르, 비동시대성: 정치와 이데올로기, 윤소영 옮김,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 이론, 1993, 183-84쪽—강조는 발리바르)

   이데올로기의 기능작용에서 피억압자들 내지 피착취자들에게 능동적인 역할을 부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유물론적 성격을 철저하게 추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중요한 의의 중 하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관념론적 인식, 곧 이데올로기를 오류나 환상 단순한 허위의식이나 왜곡된 관념과 단절하고 이데올로기의 실재성 내지 물질성을 긍정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정치적 측면에서 본다면 이데올로기를 지배 계급에 의한 조작과 기만 또는 주입과 강제로 보는 관점과 단절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를 왜곡된 관념이나 환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이러한 왜곡된 관념이나 환상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순진하고 무지한 대중들이라는 생각과 다른 한편으로 이데올로기 바깥에서 이데올로기를 통제하고 조작할 수 있는 지배 계급의 능력이라는 생각을 전제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지배 이데올로기는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라고 정의할 때 품고 있었던 생각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를 상상계로, 곧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는 자연적 조건(생활세계)으로 정의하면서 이러한 두 가지 관념은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데올로기는 의식적인 관념이나 표상들이 아니라 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 개인들과 대중들이 모두 공유할 수밖에 없는 상상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배 이데올로기가 진정으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또는 그람시의 개념을 원용하자면 헤게모니적인 이데올로기)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은 “순수하게 형식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강한 의미에서 보편적이어야 한다.”(발리바르, 비동시대성: 정치와 이데올로기, 같은 책, 186쪽) 그런데 어떤 상상적 경험이 강한 의미에서 보편적일 수 있는가? 곧 사회에서 일반화됨과 동시에 의식들로 관념화될 수 있는가? “그것은 우선 지배자들의 ‘체험된’ 경험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세계’에 대한 인정 또는 승인과 저항 또는 반역을 동시에 함축하는(마르크스는 종교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피지배대중들의 ‘체험된’ 경험이라고 반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안된다.”(같은 곳) 다시 말해 지배 이데올로기가 진정으로 지배적인 효과를 산출하기 위해서는 그것은 피지배대중들의 상상계에 뿌리를 두고 그러한 상상계를 자기 나름대로 구성하고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이렇게 설명해볼 수 있다. 근대 사회에서 피지배대중들의 상상계를 지배하는 어휘들은 자유와 평등, 정의, 박애 같은 것이다. 이러한 지배어들은 사실은 지배 계급의 억압과 착취에 맞선 대중들의 혁명적 봉기를 통해 선언되고 또 정치 제도들 속에 기입된 것이다. 프랑스 혁명의 정신이자 원리로 천명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들에 대한 선 (이하 인권 선으로 약칭)은 이를 대표하는 문건 중 하나다. 발리바르가 이데올로기에서 대중들의 존재론적 우위라고 부른 것은, 이러한 지배어들이 혁명의 정신이자 원리로 천명되고 정치 제도들 속에 기입되었다는 사실(인권 선언은 프랑스 헌법의 전문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정치적 근대성의 근본 원리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가리킨다. 물론 이러한 원리는 그 자체로는 매우 추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수많은 제도적 매개의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단지 선언적으로 언표되었을 뿐 실제 제도에서는 최소화될 수도 있다. 예컨대 정치적 선거권이 일정 금액 이상의 세금을 납부할 수 있는 개인들(이른바 ‘능동 시민들’)에게만 허가되었다는 점이나 여성들은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권리를 향유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 단적인 사례가 된다. 하지만 그런 경우라 하더라도 근대 사회의 어떤 지배 집단도 피지배대중들의 이러한 상상계를 무시하고서는 또는 그러한 상상계를 재구성하고 활용하지 않고서는 자신들의 지배를 유지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러한 혁명의 지배어들은 이데올로기에서, 따라서 정치적 상상계 및 제도화에서 피지배대중들이 (제도적으로는 열등한 위치에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체계적으로 배제될 수도 있지만) 존재론적으로 우위를 지닌다는 점을 표현해준다.


   2. 종속화와 주체화의 변증법: 신민(subject)-개인-시민

   1) 신민에서 개인으로

   이데올로기론에서 대중들의 존재론적 우위는 종속화와 주체화의 변증법으로 좀더 구체화된다. 우리는 호명 I에서 알튀세르 호명 이론의 아포리아 중 하나는 ‘개인’이라는 범주의 지위가 아주 애매하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알튀세르의 이론에서는 호명의 대상이 되는 ‘개인’이 호명에 선행하는 존재론적 실체인지 아니면 사후적으로 설정된 가상적 항인 것인지 불분명하게 남아 있다.

   발리바르는 이 문제에 대해 역사적인 해법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형식상으로는 알튀세르의 호명에 대한 정식을 전도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곧 더 이상 알튀세르가 말하듯 “개인들을 주체들로 호명”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주체들/신민들을 개인들로 호명v(에티엔 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0, 335쪽—강조는 발리바르)하는 것이 문제다. 단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알튀세르의 명제에서 ‘주체’를 가리키는 프랑스어 sujet(또는 영어의 subject)가 발리바르의 문장에서는 일차적으로 ‘신민’(臣民)을 가리킨다는 점이다. 프랑스어의 sujet나 영어의 subject는 이처럼 한편으로 ‘주체’라는 의미, 곧 자율적인 인식과 행위의 중심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복종’이나 ‘종속’이라는 의미도 지닌다. sujet/subject를 신민이라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신민들을 개인들로 호명"하기가 의미하는 것은 사람들이 중세의 신분적 예속 질서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유롭게 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표준적인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에 따르면 이 사람들은 이중의 의미에서 자유로운 프롤레타리아들이다. 곧 그들은 신분적 예속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에서 자유롭게 되었지만 동시에 일체의 생산 수단을 박탈당했다는 의미에서도 자유롭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생존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개인들’로서 역시 ‘자유로운 개인들’인 자본가와 임노동 계약을 맺고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자유의 의미를 절대화하는 것, 다시 말해 근대적 개인의 자유를 단순히 중세적인 신분적 예속하고만 대비시키는 것은 자본주의적 착취 관계를 은폐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알튀세르는 여전히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자로 남아 있다. 주지하다시피 알튀세르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1번은 법 이데올로기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때의 법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바로 평등과 자유 같은 것이다. “법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개인은 법인으로서 법률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하며 의무가 있는 법적 인격이다. 법 이데올로기도 외관상 이와 유사한 담론을 펼치지만 사실은 전혀 다르다. 그것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인간은 본래(본성상, par nature) 자유롭고 평등하다. 따라서 법 이데올로기에서는 (법인들이 아니라) ‘인간들’의 자유와 평등에 ‘토대가 되는’ 것이 법이 아니라 자연이다.”(루이 알튀세르, 재생산에 대하여,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7, 121-122쪽. 강조는 알튀세르) 따라서 알튀세르에게 ‘평등’과 ‘자유’는 법 이데올로기이며, 이러한 법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이 강제 없이도 자발적으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속으로 들어가고 또 그것이 ‘정상적으로’ 재생산되도록 그 체계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게끔 해준다.

   반면 발리바르가 알튀세르의 정식을 전도시켜 "신민들을 개인들로 호명"하기라고 말했을 때 염두에 둔 것은 근대적 ‘개인’이라는 개념이 갖는 혁명적인 성격이다. 이 점에서 발리바르는 특히 프랑스의 정치철학자인 클로드 르포르(Claude Lefort)의 저작에 영향을 받고 있다. 르포르는 근대 민주주의 및 인권 개념에 대한 재해석에서 인권과 근대 민주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을 반박한다(C. Lefort, Essais sur le politique, Seuil, 1986; 정치적인 것에 대한 시론, 홍태영 옮김, 그린비, 근간). 그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근대적 평등과 자유의 원칙이 착취 및 억압 관계를 은폐하는 측면만을 부각시켰을 뿐, 그것 자체가 지닌 혁명적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근대 민주주의와 인권 개념은 추상적이며, 또한 그 담지자로서 ‘개인’ 역시 추상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추상성은 구체적인 사회경제적 조건과 독립적인 정치 영역의 구성을 (사고)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예컨대 인권 선언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자로 선언된 인간은 추상적 개인이다. 왜냐하면 그는 국적과 관계없이(프랑스인이든 영국인이든 인도인이든, 또는 국적 없는 난민이나 망명객이든 간에), 재산 유무에 관계없이(부자든 가난뱅이든, 재벌이든 노숙자든 간에), 피부색에 관계없이(백인이든 흑인이든 황인종이든 간에), 종교에 관계없이(기독교 신자든 불교 신자든 무슬림이든 간에), 성별에 관계없이(여성이든 남성이든 아니면 트랜스젠더이든 간에), 또 연령에 관계없이(어른이든 아이든, 노인이든 청년이든 간에), 사람이라는 사실 그 자체로 인해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자로 간주되며 또 그렇게 간주되고 존중받을 권리를 지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 없고 ~ 없고 ~ 없는 존재자라는 점, 다시 말해 아무런 특성도 없는 존재자라는 점에서 인권의 담지자인 또는 인권의 ‘주체’인 사람은 추상적 개인인데, 역설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인권 선언이 보편적 선언으로서 효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추상성 덕분이다. 만약 여기에 어떤 제한이 붙는다면, 가령 인간은 그가 가난한 한에서, 또는 생산수단이 없는 존재자인 한에서, 약소국 국민이거나 피식민지인인 한에서만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가진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보편적인 성격을 지닐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발리바르의 전도된 호명 공식, 곧 "신민들을 개인들로 호명"하기가 일차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알튀세르가 호명의 대상으로 간주한 개인은 생물학적 개인도 아니고 단순히 사후에 가상적으로 설정된 개인도 아니며, 봉건적인 신분적 예속 관계에서 벗어난 근대의 추상적 개인이라는 점이다. 이 개인은 일체의 신분적·사회적 규정과 무관한 개인, 따라서 아무런 구체적인 정체성도 지니지 않은 개인, 인권 선언에 의해 평등하고 자유로운 존재자라고 막 선언된 개인이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알튀세르가 말하는 호명이란 이러한 추상적 개인들에게 이러저러한 제도적 매개들을 통해 이러저러한 정체성들을 부여하는 것, 또는 이러저러한 사회적 관계 속으로 추상적 개인들을 편입시켜 이러저러한 ‘주체들’로 만드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개인들은 어떠한 제도적 매개 내지 사회적 관계 속으로 편입되는 것일까?


2. 종속화와 주체화의 변증법: 신민(subject)-개인-시민

   2) 시민으로서의 인간, 시민으로서의 개인

   추상적 개인은, 마르크스에서 알튀세르에 이르는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가정했던 것처럼, 단순히 부르주아 계급 지배의 질서를 은폐하고 왜곡하는 이데올로기적 통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봉건적인 신분적 예속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진보적ㆍ보편적 함의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추상적 개인이 지닌 해방적 의미는, 그러한 개인을 고전적인 자연권 이론에서 파악하듯이 자연적으로 주어져 있는 존재론적 단위가 아니라 시민으로서의 개인으로 이해할 때 좀더 정확히 드러날 수 있다.

   발리바르는 두 편의 텍스트에서 이 점을 좀더 분명하게 설명한다. 「시민 주체」라는 글(“Citoyen sujet”, Cahiers Confrontations, vol. 20: Après le sujet qui vient?, ed., Jean-Luc Nancy, 1989)에서는 주체 개념의 계보학에 대한 기존의 철학사적 관점을 정정하면서, 주체 개념의 계보학이 현실의 정치적 역사와 맺고 있는 내적 연관성을 강조한다.

   우리는 흔히 근대 주체성의 시작을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 개념에서 찾는다. ‘나는 생각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코기토 개념은 주체가 생각한다는 사실을 모든 진리 및 확실성의 토대로 삼는 근대 철학의 기본 원리를 최초로 정식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발리바르가 지적하듯이 데카르트의 저작에서 ‘주체’(sujet 또는 라틴어로는 subjectum)라는 단어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또 설령 사용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오늘날과 같은 자율적인 주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중세 스콜라 철학의 용법에 따라 ‘실체’라는 의미로 쓰이거나 논리학적 주어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데카르트를 철학적 근대성의 시조로 간주하는 관점은 사후에 회고적으로 투영된 것이며, 그것은 근대성을 이해하는 특정한 관점을 함축한다. 발리바르는 자신의 철학적 선구자를 데카르트에서 발견하는 칸트 철학이나, 이러한 칸트의 관점을 기반으로 하여 데카르트에서 니체에 이르는 철학적 근대성의 계보(또는 좀더 확장할 경우에는 플라톤에서 니체에 이르는 서양 형이상학의 계보)를 구성하는 하이데거의 철학사적 재구성이야말로 이러한 회고적 투사의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러한 철학사의 재구성을 통해 망각되거나 은폐되는 것은 철학적 근대성과 정치적 근대성 사이의 관계, 그리고 주체 개념에 고유한 양면성이라는 문제다. 이 점을 해명하기 위해 발리바르는 프랑스어의 ‘sujet’나 영어의 ‘subject’에 담긴 두 가지 함의를 지적한다. 이 두 단어는 한편으로 오늘날 철학에서 쓰이는 것과 같은 ‘주체’라는 의미도 담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복종’이나 ‘종속’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중적 의미는 사실은 sujet나 subject라는 현대어가 라틴어의 두 가지 단어, 곧 subjectum(주권적 주체)과 subjectus(종속적 주체)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따라서 subject라는 개념은 자기 자신 안에 주권자와 신민이라는 정치적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를 처음부터 포함하고 있는 셈이다. 더 나아가 발리바르는 subject라는 개념이 오늘날과 같은 ‘주체’라는 의미를 포함하게 된 것은 이러한 역사적 연원을 전도하는 역사적 사건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미국 독립과 프랑스 혁명과 같은 피지배자들의 정치적 해방 선언이라는 사건이다.

오랜 역사적ㆍ철학적 전통은 ... 우리에게 1776년과 1789년의 인간들, 곧 자유와 혁명의 인간들은, 그들이 보편적으로 주체성을 획득했기 때문에 ‘시민들’이 되었다고 설명해왔다. ... 나는 정반대의 해석을 선택한다. 내가 보기에는 이러한 인간들과 그들의 동료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시민권을 획득하고 구성하면서 자신들의 종속 원리, 곧 종속자가 되거나 신민이 되는 원리를, 저항의 여지는 남아 있지만 어쨌든 돌이킬 수 없게 철폐했기 때문에 자신들을 자유로운 주체들로 사고하기 시작할 수 있었으며, 자유와 주체성을 동일시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E. Balibar, “Subjection and Subjectivation”, in Supposing the Subject, ed. Joan Copjec, Verso, 1994, pp. 11-12—강조는 발리바르)

   따라서 발리바르가 재구성하는 주체의 계보학은 한편으로는 철학적 근대성에 관한 지배적 서사에 함축된 주체 개념의 발생사에 대한 왜곡을 드러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철학적 주체와 정치적 주체의 발생적 상관 관계를 밝혀준다. 이것은 주체의 자율성을 그 타율적 조건 속에서 해명하려는 (포스트) 구조주의의 일반적 문제의식을 계승하면서 그것을 근대적 주체성의 역사 속에서 구체화하려는 그의 관점을 잘 보여준다.

   다른 한편, 「평등자유 명제」라는 글(“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in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UF, 2010; 『평등자유 명제』, 진태원 옮김, 그린비, 근간)에서는 근대의 정치적 질서를 정초하는 텍스트인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에 대한 선언」(1789)(이하 「인권선언」으로 약칭)에 대한 재독해를 시도한다. 이러한 독해의 목표는 「인권선언」에 나타나는 두 개의 주어, 곧 ‘인간’과 ‘시민’이 두 개의 상이한 주체가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주체임을 밝혀내는 것이다.

   「인권선언」에 대한 통상적인 독해에 따르면 이 텍스트는 한편으로 인간이 지닌 기본적 권리, 곧 인권의 자연적, 본래적 성격을 천명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들이 근대적 정치체를 구성할 경우 그러한 정치체의 주체로서, 곧 시민으로서 지니게 되는 시민권의 성격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 텍스트는 자연적 존재자로서 인간이 지닌 기본 권리와 정치적 주체로서 시민이 지닌 기본 권리를 천명하는 텍스트이며, 이 텍스트 속의 주체는 자연적 주체인 인간과 정치적 주체인 시민 두 명이다. 하지만 이러한 독해는 이미 에드먼트 버크가 「인권선언」에 대해 제기한 비판(『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 이태숙 옮김, 2008)에 대해 무기력할 뿐만 아니라, 특히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근대 인권 개념의 역설에서 좌초하게 된다.

   아렌트는 1920년대에서 1940년대까지의 정세, 특히 유럽에서 파시즘이 출현하던 위기의 시대에 발생한 거대한 “무국적”(stateless) 난민들의 비참한 상태를 관찰하면서, 근대 국민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기초인 인권 이념이 근본적으로 진실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전체주의의 기원』 1권, 이진우ㆍ박미애 옮김, 한길사, 2006 9장 참조). 근대적 인권 이념에 따르면 실정적이고 특수한 시민권은 그에 앞서 존재하는 자연적이고 보편적인 인권의 제도화이며, 이러한 인권은 시민의 권리와 정치적 제도에 대해 보편적인 정당성의 원리를 제공해 준다. 따라서 인권은 시민권보다 더 광범위하고 또 그로부터 독립적이다. 이 때문에 인권은 국가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 역시 권리들을 보장받을 수 있게 해 주는 기초가 될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들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점점 더 중요해진다. 하지만 아렌트가 볼 때 사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녀가 볼 때 시민의 권리가 제거되거나 역사적으로 파괴되면 인권 역시 파괴되었다. 왜냐하면 인권이 시민권을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민권이 인권을 기초하며, 따라서 국가나 제도가 보장하지 않는 자연적 권리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렌트가 제시하는 ‘권리들을 가질 권리’는 추상적 인권 개념에 대한 반박이며 그것의 전도가 된다.

   권리들을 가질 권리라는 이 개념은 권리 주체로서의 인간 또는 개인이 그 자체로 시민이며, 또 시민으로서의 개인만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점을 함축한다(발리바르는 이것을 “아렌트의 정리”(Arendt’s theorem)라고 부른 바 있다. E. Balibar, “(De)Constructing the Human as Human Institution”, Social Research, vol. 74, no. 3, Fall 2007 참조). 이는 다시 말하면 각각의 개인들이 서로 협력하여 정치적 공동체를 구성하지 못하는 한, 그 개인들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보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으로 정치 공동체가 실존하는 한, 거기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정치 공동체 내에서 각각의 개인들이 실정적인 권리들을 누릴 권리”)는 모든 개인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로서 존중받고 인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권리가 의미하는 것은 정치 공동체의 구성은 다른 사람들이 대신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대중들 자신의 과제라는 점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넓은 의미에서 봉기적 권리를 뜻한다. 헌법을 비롯한 모든 정치 제도는 이러한 대중들 자신의 공동체 설립의 행위(곧 봉기)에 의존하며, 거기에서 자신들의 정당성의 근거를 얻는다. 근대 정치체의 독특성은 이전의 정치체들과 달리 자연적이거나 초월적인 근거(혈통, 신 및 더 나아가 인간 본성 등)에 근거를 두지 않고, 오직 정치체를 구성하는 시민들의 설립행위 자체, 곧 각각의 시민들이 서로 권리를 부여하고 그러한 권리의 타당성을 인정해주는 행위 자체에 기초를 둔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각각의 개인은 이러한 시민들 각자의 상호 구성 행위 속에서만 개인으로서 성립하고 또 존립할 수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근대적 개인은 항상 이미 근대적 시민이라고 할 수 있다.


  3. 이데올로기의 역사화: 국민형태의 변증법

   하지만 이러한 시민들이 구성하는 근대 정치 공동체는 국민(nation)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국민이라는 공동체는 신분적인 예속 관계에서 벗어난 시민 개인들(곧 데모스)의 상호 구성 관계를 통해 정초된다는 의미에서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혈통과 언어를 비롯한 공통의 문화(곧 에트노스)를 자신의 결속의 토대로 삼는다는 점에서는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국민이라는 정치 공동체는 모순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다. 한편으로 근대적인 의미의 국민국가는 특수한 신분이나 위계, 민족적(ethnic)ㆍ문화적 차이에 기초하지 않으며, “개인들의 존엄성을 ... 그들이 지닌 보편적 인간이자 시민으로서의 자격과 연계한다”(Dominique Schnapper, La Communauté des citoyens, Gallimard, 2003, p. 106)는 점 때문에 다른 어떤 정치공동체보다 더 보편적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국민국가는 이러한 시민의 자격을 국민 성원에게만 한정한다는 점에서 또한 배타적이고 폐쇄적이다. 더욱이 개별 국민 공동체가 역사적으로 혈통과 언어, 공동의 생활양식과 문화, 역사 및 신화 등에 기반을 둔 민족(ethnie)에 기반을 두고 형성되었으며, 오늘날에도 국민됨/국적(nationality)의 자격을 이러한 민족적 요소들에 기초 지으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배타성은 더욱 강력하게 유지된다.

  이런 의미에서 국민이라는 근대의 정치 공동체는 데모스와 에트노스라는 이중의 호명 양식이 모순적으로 결합돼 있는 역사적 구성체로 간주될 수 있다. 따라서 알튀세르의 호명이론( 및 이데올로기론)을 역사화하려는 발리바르의 이론 작업은 국민형태(forme nation) 개념에 대한 가공으로 전개된다. 월러스틴과 공동으로 저술한 『인종, 국민, 계급』(1988)에서 처음 사용된 국민형태 개념은 “그 자체로는 공동체도, 심지어 공동체의 이념형도 아니며, 규정된 공동체 효과’를 생산할 수 있는 구조 개념(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 51쪽―강조는 발리바르)이다. 이러한 규정은 몇 가지 함의를 지니고 있다.


   1)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넘어서기

   구조 개념으로서 국민형태 개념을 도입하는 것은 국민(nation) 문제를 해명하지 못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무능력을 지양하기 위해서다. 마르크스주의의 무능력에 대한 비판은 두 가지의 핵심 논점을 담고 있다.

   첫 번째는 마르크스주의의 경제적 환원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범박하게 말하자면 알튀세르 이전의 고전 마르크스주의는, 이데올로기를 사회적 생산관계 및 계급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현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하는 담론이나 의식, 환상 등으로 환원했고, 따라서 국민이라는 상상적 공동체가 갖는 이데올로기적 효력과 실재성, 곧 그것이 국가 형태의 구성 및 재생산에서 수행하는 핵심적 역할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본주의에서 국민은 부르주아 계급이 계급 적대의 현실을 은폐하고 기만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현상으로 이해되든가 아니면 식민지에서 반제국주의 투쟁을 수행하기 위한 계급 동맹의 이데올로기적 표현으로 이해된 반면, 사회주의에서 국민은 ‘전 인민’이 형성되면서 계급적 적대가 소멸되는 역사적 형태로 간주되었다. 국민이라는 범주를 환원한 결과 사회주의 국가는 스스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소련 인민, 중국 인민 ...)에 체계적으로 사로잡힌 셈이다. ‘국민형태’는 전통적인 경제결정론에서 벗어나 경제와 이데올로기라는 이중의 토대 위에서 국민을 물질적인 이데올로기적 현상으로 해명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다.

   두 번째는 사회구성체라는 개념이 지닌 애매성이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마르크스 자신이 사용한 사회구성체 개념은 “사회 또는 시민사회 개념의 현학적 쌍생아”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우리가 ‘러시아 사회구성체’나 ‘프랑스 사회구성체’ 또는 ‘중국 사회구성체’에 대해 그것들이 자연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처럼 말할 때, 이는 우리가 곧바로 네이션[이 경우에는 ‘민족’을 의미한다―인용자]의 초역사적 실존이라는 공리를 흡수했다는 것을 뜻한다. 네이션을 그 안에서 생산양식의 역사가 일어나는 틀로 변전시키면서 말이다.”(Etienne Balibar & Immanuel Wallerstein, Race, nation, classe: Les identités ambiguës, Éditions La Découverte, 1988; 「민족형태: 역사와 이데올로기」, 『이론』 제 6호, 1993, 103-104쪽)(이 글의 국역본 제목은 「민족형태」라고 되어 있는데, 이하에서는 필자의 관점에 따라 「국민형태」로 수정해서 인용하겠다)

   따라서 사회구성체 개념은 사실은 ‘민족’으로서의 네이션의 상이한 표현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를 쇄신하기 위해 그는 다음과 같은 관점을 제안한다. “그럴 게 아니라 우리는 사회구성체를 그 통일성이 여전히 의심스러운 채로 있는 한 구성물을 뜻하는 것으로서, 적대적인 계급들의 형세, 곧 전적으로 자율적이지는 않으며 다른 사회구성체들에 대한 대립 속에서만, 또 바로 이 적대를 통해 장기에 걸쳐 발전한 권력 투쟁, 갈등하는 이해 집단들, 갈등하는 이데올로기들과 같은 것을 통해서만 상대적으로 종별적이게 되는 그런 형세를 뜻하는 것으로서 사용해야 한다.”(같은 글, 104쪽) 국민형태라는 개념은 바로 이러한 목적을 위해 도입되었다.


   2) 이데올로기적 형성체로서 국민형태

   국민형태 개념의 강점은 네이션을 역사적 실체, 그것도 오래된 역사적 기원을 지니고 있고 장구한 진화 과정을 거쳐 온 실체로 이해하지 않고 어떤 구조적 메커니즘에 의해 일정한 역사적 시기에 생산되고 또 그 이후 경쟁적인 과정을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재생산된 것으로서 이해하게 해준다는 점이다. 네이션은 대략 16세기 중반 이후, 곧 자본주의적 세계 경제의 형성과 비슷한 시기에 “비가역성의 문턱”을 넘어서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그것과 경쟁적인 다른 국가 형태들(제국이나 몇몇 도시를 중심으로 형성된 초국민적인 정치ㆍ상업 복합체 등)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면서 근대 부르주아 혁명들 이후 약 200여년에 걸친 격렬한 갈등을 거쳐 보편적인 근대적 국가형태 또는 그러한 국가형태를 특징짓는 상상적 공동체로 정착되었다. 국민형태는 이러한 상상적 공동체로서의 네이션이 어떤 의미에서 근대적인 국가형태를 규정했으며, 그것의 지속적인 재생산에 기여했는지 설명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에 착안한 몇몇 반(反)국민국가론자들이 주장하듯이 국민국가라는 것이 ‘근대의 발명품’이라거나 순전한 이데올로기적 가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핵심 논점은 네이션에 이데올로기적 가상(곧 오래된 기원을 가진 단일한 실체로서 ‘민족’)에 의거하지 않으면서 네이션이 근대 국가 형성에서 수행한 규정적 역할, 따라서 그것의 상상적 (또는 제도적) 실재성을 설명하고, 그러한 역할을 위해 왜 네이션에 고유한 이데올로기적 상상계가 필요한 것인지 해명하는 것이다. 또한 왜 오늘날 네이션이 역사적 한계에 봉착했고, 그것을 내재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대안이 필요한지 제시하는 것이다.

   국민형태 개념은 근대 국민구성체들의 형성 과정을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보다 좀더 정확히 설명해준다. 이 점과 관련하여 발리바르는 페르낭 브로델과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역사적 자본주의론의 기여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그것의 한계를 강조한다. “통합된 세계 시장의 틀 안에서 정의되는 국민국가의 경제적ㆍ행정적 기능은 사회적 ‘형태’ 또는 ‘구성체’로서의 국민에 대한 이해의 반쪽만 보여줄 뿐이다.”(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 47쪽) 왜 국민이 근대 국가의 헤게모니적인 형태가 되었는지, 다시 말해 근대 국가가 왜 단지 국민국가가 아니라 국민사회국가인지 이해하려면 역사적 자본주의론만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론이 필수적이다.

   알튀세르에서 유래하는 이데올로기론은 앞에서 말했듯이 상상과 현실을 조야하게 대립시키는 관점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대다수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생적으로 사로잡혀 있는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토대 내지 경제만이 실재적이고 이데올로기는 허위의식이나 왜곡된 표상, 심지어 가상 및 환상이다. 이렇게 되면 민족주의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민족 내지 국민 자체도 순전히 대중들의 착각 내지 왜곡된 표상(계급적 관점의 부족에서 생겨나는)의 산물로 이해되며, 민족주의나 민족 또는 국민과 관련된 문제들은 진짜 문제가 아니라 가짜 문제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

   반면 발리바르는 상상계의 실재성, 물질성을 강조하는 알튀세르의 관점(이는 무엇보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유래한다. 진태원, 「스피노자와 알튀세르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 상상계라는 쟁점」, 『근대철학』 3권 1호, 2008 참조)에 충실하게 국민 또는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사회적 공동체가 상상적 공동체라고 규정한다. “제도들의 기능작용을 통해 재생산되는 모든 사회적 공동체는 상상적이다. 다시 말해 이 공동체들은 개인적 실존을 집합적 이야기의 짜임 속에 투사하는 것에, 공통의 이름을 인정하는 것에, 기억도 할 수 없는 과거의 흔적으로 체험되는 전통들(이러한 전통들이 근래의 상황 속에서 제작되고 주입된 경우에도)에 의거한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일정한 조건들 속에서는 오직 상상적 공동체들만이 현실적 공동체들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국민형태」, 앞의 책, 126쪽) 사실 모든 공동체는 어떤 공동의 정체성에 대한 결속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이러한 공동의 정체성을 그 성원들이 자신의 정체성으로 내면화함으로써 재생산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공동체의 현실적 기반은 바로 상상계의 효력 및 실재성에 있다는 것이 납득될 수 있다.

   그렇다면 상상적 공동체로서 국민 공동체의 생산 및 재생산의 핵심 요소는 무엇일까? 발리바르는 그것을 상상적인 것으로서 인민(peuple)의 생산과 재생산에서 찾는다. 이것은 인민이 자신들을 국민으로서 (재)인지하고, 인민을 구성하는 각각의 개인들이 바로 이러한 국민에 대한 소속을 통해 자신들의 개인적 정체성을 형성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것은 인민의 생산과 재생산이 상호 연관되어 있지만 서로 구별되는 두 가지 계기를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선 집합적 ‘주체’로서, 곧 국민으로서 인민의 형성이다. 근대 정치의 기본 원리 중 하나는 인민을 정치권력의 기원 내지 정당성의 토대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이른바 인민주권이 바로 그것인데, 이러한 인민주권은 근대 정치의 지배적인 제도적 틀로서의 국민국가에서는 국민주권으로 나타난다. 곧 인민이 자신이 속한 국가를 바로 자신의 국가로서, 다른 나라들과 대립하는 나의/우리의 조국으로서 (재)인지하고, 그것과 동시에 이러저러한 사회적 집단의 차이 및 특히 적대적인 계급적 구별에 선행하는 동일한 집단으로서 (그리고 이러한 동일한 집단에 한 성원으로 속한다는 점에서는 모두 평등한 개인들로서) 자신을 (재)인지하게 되는 것은 인민이 국민으로 또는 민족으로 자신을 “표상/재현/상연하는”(이것들은 ‘représenter’라는 개념에 모두 함축된 의미들이다) 한에서다. 따라서 집합적인 주체로서의 인민 및 국민의 구성은 “정복, 인구 이주, ‘영토 확정’과 같은 행정적 실천 등을 기술하는 것”(같은 글, 119쪽)으로는 제대로 해명될 수 없다. 통일적인 정치적 주체로서의 인민/국민이 구성될 수 있기 위해서는 종별적인 이데올로기의 모델, 곧 국민주의 내지 민족주의[네이션과 마찬가지로 내셔널리즘은 우리말 한 단어로 번역하기는 매우 까다로운 용어들이다. 그렇지만 필자는 기본적으로 네이션은 ‘국민’으로, 그리고 내셔널리즘은 ‘국민주의’로 옮기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다만 네이션이 민족적 정체성(ethnic identity)의 측면을 주로 표현할 때는 ‘민족’이나 ‘민족주의’로 옮길 수도 있다고 본다. 이 점에 관한 좀더 자세한 논의로는 진태원, 「어떤 상상의 공동체? 민족, 국민 그리고 그 너머」, 『역사비평』 96호, 2011년 가을호를 참조]나 애국주의가 필요하다.


   3) 정체성 생산 및 재생산 메커니즘으로서 국민주의/민족주의

   근대 국민국가의 유기적 이데올로기로서 국민주의는 단지 상상적인 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믿음 및 외국인에 대한 배타적인 감정 등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국민주의가 단지 이러한 믿음과 감정 등에 불과하다면, 서구의 이른바 자유 민주주의가 확립된 ‘선진국’ 사람들이나 우리나라의 일부 지식인들이 (이른바 ‘남쪽’ 국가들 또는 ‘후진국들’에 특유한) ‘민족주의’를 마치 질병이나 집단적 광기 등으로 폄훼하는 것이 수긍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경우 ‘민족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은 서구식으로 합리적 개인주의를 도입하거나 사회적 차이 및 소수자들에 대한 존중을 확립하는 것 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지극히 자유주의적이고 서구 중심적이라는 점에서 국민주의에 관한 설명 및 대응 방식으로는 커다란 한계를 지닌다.

   발리바르의 국민형태 개념은 지극히 자유주의적인 이러한 관점과 무관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관점에 깔려 있는 고유한 서구 중심주의 내지 서구식 국민주의(및 인종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다. 발리바르는 국민주의에 대한 통상적인 사고방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국민주의를 집합적이고 개인적인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 메커니즘의 효과로 파악한다. 다시 말해 국민국가의 핵심 목표는 “다른 모든 정체성을 압도하는 ‘국민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이고, 국민적 소속이 다른 모든 소속과 일치하고 그것들을 통합하는 데까지 이르게 하는 일”이며, “정의상 국민주의는 이것과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 55쪽) 근대 국민국가 내에서 각 개인들은 (자유주의에서 가정하듯이) 국민에 대한 소속 이전에 자신의 독자적인 개인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국민적 개인으로서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 개인성을 얻게 된다. 국가를 구성하는 각 집단들 및 개인들은 자신들을 이러저러한 집단의 구성원이자 이러저러한 개인들이라고 생각하기에 앞서 자신들이 모두 똑같은 국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곧 그들은 국민으로서의 노동자 계급이고 국민으로서의 자본가이고 국민으로서의 선생이고 학생이고 가정주부이고 범죄자 등등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한에서 모든 국민국가(프랑스나 미국 같은 ‘이민자 국가’를 포함하는)는 정의상 국민주의적이며, 또한 그 국민 국가의 성원들은 자신들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국민주의적이다.

   가령 프랑스 국적을 가진 아프리카계 흑인 이주자가 프랑스 월드컵에서 열렬하게 프랑스 대표팀을 응원하면서 끝내 프랑스 대표팀이 우승을 차지하자 감격에 겨워 ‘토종’ 프랑스 백인과 같이 어깨를 걸고 프랑스 대표팀 응원가를 목청 높이 부를 때, 그는 우리가 보통 쓰는 ‘민족주의’라기보다는 ‘국민주의’를 구현하는 것이다. 또한 미국에 유학 간 한국인 유학생 부부 사이에 태어난 자녀가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자신을 한국인이 아니라 미국인이라고 생각하고, 한미 야구 대표팀 간에 야구 경기가 벌어질 때 열렬히 미국팀을 응원할 때 그 역시 ‘민족주의’라기보다는 ‘국민주의’를 드러내는 셈이다. 또한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도미니크 쉬나페르(Dominique Schnapper)가 민족적인 기원 및 소속과 무관한 시민들의 공동체로서 ‘국민’을 옹호하고 그러한 국민들 사이의 결속감의 표현으로서 ‘nationalisme’을 말할 때 그것은 ‘민족주의’가 아니라 ‘국민주의’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nationalisme’은 또한 좀더 좁은 의미에서 민족주의를 뜻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국민 성원들 사이의 일체감, 동질성이 필연적으로 그러한 동질성의 기원 및 주체에 대한 보충적인 상상계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나라 같이 이른바 ‘단일 민족’의 경우에는 더욱 더 사실이다. 여기서 허구적 민족체(또는 의제적(擬制的) 민족체)(ethnicité fictive)라는 발리바르의 또 다른 개념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개념은 국민이 오래된 역사적 기원을 갖고 있고 연속적인 진화 과정을 거쳐온 역사적 실체 또는 심지어 (유일한) 역사적 주체라는 민족주의에 고유한 상상계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이 개념에서 우선 주의해야 할 점은 ‘상상적’이라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발리바르가 사용하는 ‘허구적’이라는 개념이 미망(illusion)이라거나 가짜 또는 단순히 공상이라는 의미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제도적 효과라는 의미, 곧 제작”(「국민 형태」, 121쪽)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런 의미로 이해된 허구적 민족성은 실존하는 어떤 국민이 오래된 민족적 기원(ethnic origin)을 지니고 있으며(가령 골족의 후손, 단군의 자손 등), 그 국민은 동일한 기원을 공유하면서 오랫동안 세대를 거치면서 희노애락을 함께 해온 유구한 역사적 실체로서의 민족으로 표상된다. 바로 이러한 허구적 민족성 때문에 국민 국가 내의 집단들 및 개인들은 자신들이 이러저러한 사회적 조건의 차이를 초월한 이해관계의 동일성을 지닌 같은 국민이라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표상이나 인식이 단순히 공상적이거나 가상적인 의식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교육제도나 가족제도 같은 사회적 제도를 통해 체계적으로 훈육되고 각종 의례나 절차, 관행 등을 통해 일상적인 삶 속에서 재생산된다(발리바르는 「국민 형태」에서는 특히 언어와 계보가 허구적 민족성을 산출하는 두 가지 지주라는 점을 보여준 바 있다). 따라서 국민주의는 특히 그것이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필연적으로 이러한 허구적 민족성을 더 강하게 반영하기 마련이며, 허구적인 또는 상상적인 역사적 실체로서의 ‘민족’을 자신의 기초로 삼게 된다.

   그렇다면 호명의 문제는, 흔히 오해되는 것처럼 일방적인 종속의 메커니즘으로서 호명에서 벗어나는 또는 탈주하는 것의 문제일 수는 없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역사적으로 경쟁적인, 또는 모순적인 다수의 호명 양식들을 분석하고,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곧 지배적이고 폭력적인 호명의 메커니즘에서 벗어나는 일은 그것이 억압하거나 종속시키는 좀더 해방적이고 좀더 개방적인 다른 호명의 양식의 가능성들을 탐색하고 발전시키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국민 형태에 관한 발리바르의 분석의 의미는 무엇보다, 근대의 지배적인 호명의 메커니즘이 바로 ‘국민’이라는 점, 그리고 국민은 그 자체로 모순적인 호명의 양식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출처 http://blog.daum.net/windada11/876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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