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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그것은 나의 <주관적 느낌>일까? 참된 <객관적 이해>일까?    
  글쓴이 : 미선이 날 짜 : 10-09-03 11:50 조회(5866)
   트랙백 주소 : http://freeview.org/bbs/tb.php/e001/93 




 
[주관과 객관의 문제]
 
 
누군가 바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돌은 회색이야" 라고..
 
상담자가 내담자에 대한 자료를 훓어보고선 말한다..
"이 사람은 우울증 환자군요" 라고..
 
그렇다면 그렇게 평가하는 그 자신의 주장은 과연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인가?
즉, 사물이나 사람을 그렇게 평가할 수 있는 궁극적인 이유와 그 근거가
대상이 아닌 <자신의 주관적 지각 느낌>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대상에 대한 객관적 파악과 이해>에 그 궁극적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인가?
 
회색의 바위를 생각해볼 때 물론 오늘날의 우리들은 상식적으로
그 돌이 회색임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고 또 그것이 사실인냥 그렇게 소통하고 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철학적으로 보면(혹은 현대 과학으로도 보면) 그렇게 쉽고 간단하게 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회색의 돌 그 자체>가 아니라
각자 저마다 <자기 눈에 보여지는 회색의 돌>이라면 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즉, <회색의 돌 그 자체>와 <자신의 눈에 보여지는 회색의 돌>은 엄밀히 말해 다른 것이다.
전자를 강조하는 것이 <객관주의적 원리>에 속하며
후자를 강조하는 것이 <주관주의적 원리>에 속한다.
 
만일 <회색의 돌 그 자체>가 아니라 <자기 눈에 보여지는 회색의 돌>이라고 할 경우
우리는 영원히 <회색의 돌 그 자체>를 만날 수가 없게 된다. 칸트는 이를 <물자체>(物自體, Ding an sich)라고 불렀다.
그렇기에 어쩌면 단순하게 소통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저 돌은 회색이야"라는 일상의 그 말조차도
실상을 꼼꼼하게 따져볼 경우 결코 소통할 수가 없고 조금도 확증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즉, 쉽게 말해서 저 돌이 회색인 이유와 그 근거는 결국 <나의 주관적인 지각 느낌>에 근거한 것이지
<저 돌 자체의 객관적 특성>을 파악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주관주의 원리에서는 사물의 객관적인 특성을 파악한다는 게 영원히 불가능하다.
그럴경우 대상과의 소통은 요원한 것이며, 모든 언명들은 알고보면 한낱 <주관적인 자기넋두리>가 될 뿐인 거다.
 
만일 회색의 돌이 아니라 하물며 <사람>을 파악할 때는 우리의 주관성은 훨씬 더 농후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상담자가 내담자를 파악할 때 <저 사람은 우울증 환자>라고 진단했을 때
내가 접하고 있는 상대 대상이 정말로 우울증 환자가 아니라
주관주의적 원리에선 그저 <나의 주관적 느낌에 근거한 우울증 환자>인 것이다.
 
물론 우리는 우울증 척도 검사니 여러 검사들을 근거로 한다고 말하지만
실상 그러한 검사 표준의 문항들도 그저 자신이 하나하나 그렇게 느끼는 주관적 느낌에 따른 것이라면
결국은 저 사람은 우울증 환자라고 진단을 내릴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객관적 근거와 토대를 찾을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근본적으로 대상에 대한 치유 혹은 대상과의 소통이란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
주관주의에 따르면 상담자는 그저 자기자신의 넋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고 내담자 역시 그러할 따름이다.
다시 말해서, 상담은 진정한 의미로서의 대화(다이알로그)가 아니라 그저 독백(모노로그)의 나열일 뿐인 거다.
 
만일 우리가 <주관주의적 원리>라는 현실을 인정할 경우 이처럼 근본적으로 문제가 많아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주관주의는 결국 필연적으로 상대주의와 연관된다.
객관적 진리라는 게 있을 수 없고 그저 한낱 자기주관성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저 돌은 회색이야"라는 주장의 근거가 나의 주관적 느낌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저 돌의 객관적 특성에 근거하고 있어야만 우리는 비로소 저 돌은 회색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고
서로 함께 소통할 수 있는 객관적 토대로서의 근거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자, 그렇다면 반대로 우리가 <객관주의적 원리>를 받아들일 경우엔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되는가?
 
이 역시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킨다. 우리가 <객관주의적 원리>를 받아들일 경우
저 회색의 돌은 나라는 존재와는 무관하게 언제나 항상 회색의 돌이기 때문에
나의 특별한 주관적 느낌은 결코 공감 받을 수 있는 길을 잃게 된다.
나의 느낌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저 회색의 돌은 영원히 나와는 무관한 것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객관적으로 한 번<회색의 돌>은 영원한 회색의 돌로 규정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객관의 횡포, 이성의 횡포, 진리의 횡포인 것이다.
근대 합리주의 면면들에는 이처럼 사물을 규정짓는 이성의 횡포가 자리매김되어 있다.
하지만 알고 보면 합리적 이성이 자리한 것이 아니라 실은 그것의 실체는 <권력>이었던 것이다.
 
정말로 객관적 진리가 있는 게 아니라 실상에는 온갖 자기 권력 확보 게임이 있을 뿐이고,
그러한 권력 쟁취를 위해 진리라는 명분을 빌어오는 진리게임의 탈을 쓰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강해져야만 하는 것이다. 진리가 없는 니힐리즘적 세상을 살아가려면 결국 강해져야만 하는 것이다.
니체의 <초인>은 바로 그러한 점에서 의미를 지녀었다.
이러한 근대의 서구 합리주의 횡포는 세계 대전에서 그 끔찍한 절정을 이루게 된다.
 
이후 객관주의, 이성주의, 토대주의, 합리주의에 대한 반동이 바로 <포스트구조주의>에 해당한다.
여기서는 <인식론적 상대주의>가 강조되고, 모든 전통과 권위에 대한 <해체>가 매우 중요시된다.
오늘날 철학자들은 헤겔과 마르크스 이후 현대 철학은 <니체로부터>라고 평가하고 있다.
 
20세기 초반 화이트헤드는 그때까지의 서양철학사가
대부분 플라톤 철학에 대한 일련의 각주로 이뤄져 있다고 갈파한 바 있는데
적어도 독일 근대 관념론의 완성자라는 헤겔까지의 철학사상사는 거의 그러하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플라톤적 전통에 대한 전복을 열어놓은 자가 신은 죽었다고 말한 니체였던 것이다.
 
신은 죽었다는 말은 바로 그때까지의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를 의미한다.
또한 니체의 사고 방식은 실존주의와 유사한 것으로도 평가된다.
오늘날 대체로 포스트모던을 따르는 이들은 거의가 니체의 후예들에 가깝다.
이 중에서 푸코, 데리다, 들뢰즈 같은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은 많은 염감을 받았었다.
 
반면에 요즘 유행하고 있는 현대사상가들 중에서 이러한 포스트모던의 사조와 다르게 표방하는
두드러진 사상가로는 <슬라보예 지젝>과 <알랭 바디우>가 있다.
문화비평가이기도 한 지젝은 라깡의 정신분석과 헤겔의 철학사상을 새롭게 해석하여
현대 포스트모던의 과제들의 극복을 모색하고 있으며
바디우는 현대 프랑스 철학 진영에서도 플라톤적 전통을 새롭게 계승하고 있는 최신의 철학자에 속한다.
그의 <수학적 존재론>은 세계를 이해함에 있어서 많은 효율성을 가져다주고 있다.
 
..........................
 
자, 그럼 논의로 다시 돌아와서..
앞서 말한 <주관주의>의 <객관주의>의 이같은 문제를 과연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오늘날 현대과학에서 발견한 성과 중의 하나는 사물을 관찰하고 측정할 때
객관(Object 대상)으로서의 사물과 이를 관찰하는 주관(Subject)은 결코 나뉘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객관과 주관은 이미 관계된 <한덩어리>라는 것이다. 현대물리학에선 이를 벡터에너지라는 흐름으로서 설명하는데
이를 화이트헤드는 철학적으로 풀어서 <객관에서 주관으로의 흐름의 과정> 자체가 곧 실재(reality)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개정된 주관주의적 원리>Reformed Subjectivist Principle라고 부른다.
이와 별도로 나 자신은 객관과 주관이 나누어지지 않는 특성을 <객주관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여기에 따르면 <주관주의>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저마다 상대화된 주관주의 현실을 따른다.
하지만 그러한 주관은 객관과 연결된 관계망에 놓여 있기에
우리의 그 어떤 주관적 경험도 맨처음에는 객관적인 전체 세계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즉, 매순간 생성소멸하는 하나의 원자(atom)라도 그것은 결국 전체 우주가 빚어내는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이때 <객관에서 주관으로서의 그 흐름의 과정> 자체가 저마다 다른 것이라는 얘기다.
모든 존재는 전체 세계를 자기화 하는 가운데 그 과정으로서 형성되어지고 있을 뿐이다.
백두철학에선 <인식론>과 <존재론>은 동전의 양면인데,
인식이란 대상을 자기화하는 활동이기에 그 자체가 존재 형성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쉽게 얘기해서 누군가 홀로 말하길,
"아니, 저 돌은 빨간색이야"라고 주장했다고 하자..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기본적으로는 저 돌이 빨간색이라는 그 주장조차도
적어도 하나의 근거는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누군가가 환상을 보거나 망상을 얘기한다고 해도
그러한 독특한 주관적 경험 또한 적어도 하나의 근거는 될 수 있다고 얘기한다.
 
문제는 빨간색 돌을 주장한 사람의 경험과 회색의 돌을 주장하는 다른 사람의 경험들이
앞으로 서로 간에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파생되는 것이다.
물론 각자 저마다 혼자 산다면 우리가 객관적 토대 같은 것을 추구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문제는 저마다의 각자 경험들이 서로 내어놓을 때 충돌하기 때문에 발생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그러한 충돌들이 줄어들고 각자의 다양한 주관적 경험들 및
서로 충돌하는 경험들까지 해명해보일 수 있는 가장 설득력 있는 큰 그림을 보일 때
비로소 앞으로는 낭비되는 소통의 충돌이나 갈등들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것이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를 예로 들어보면 우리는 각자 주관적 경험들을 한다.
물론 우리는 그것이 코끼리인지 얼룩말인지 모른다. 혹은 영원히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주관적 경험만 들여다 볼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경험들에 귀를 기울여서
계속적으로 조합된 그림들을 그려나갈 경우 우리는 좀 더 발생할 수 있는 오류를 점차로 줄여나갈 수 있다.
 
현대의 새로운 후기합리주의는 근대 모던의 합리주의와 다르게
다음과 같은 성찰을 기본 전제로서 깔고 있다.
그런데 이를 섬세하게 구분할 줄 아는 이는 거의 많지 않다.
 
첫째, 객관적이고 완결된 진리를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째, 주관적 상대주의는 기초 출발로서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셋째, 주관이든 객관이든 일단 모든 사유들은 기본적으로는 권력적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전제가 놓여지는 주관주의적 현실에서 현대의 합리성은 어떻게 진리를 추구할 것인가?
이때 우리에게 있는 것은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오류와 충돌 경험 같은 고통과 비극에 대한 생생한 경험들을 지니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합리성은 정합적인 내부에 근거하지 않으며, 오히려 부정합스런 오류와 모순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오류와 모순의 문명사적 사태가 바로 비극적인 충돌 경험이다.
우리는 실패를 통해 성찰의 기회를 가질 따름이다. 따라서 진정한 이성은 반성적 경험을 토대로 하며,
언제나 열린 수정가능성, 자기해체 가능성까지 열어놓아야만 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말한 합리주의는 후기합리주의로서 근대 합리주의 지녔던 <절대적 확실성>을 거부한다.
그것은 오히려 독단일 뿐이다. 모든 이해들은 불완전한 과정상의 이해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그냥 주관주의와 상대주의에 머물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그것의 현실적 차원은 필요하다고 보긴 하지만 그 차원에만 계속 머물고 있을 경우 마찬가지로 폭력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들은 역시 니체의 한계에서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박홍규의 니체 비판서 <반민주적인 너무나 반민주적인> 참조.
이 책은 니체가 쓴 글에 근거한 매우 꼼꼼한 니체 비판서로 니체 진영에선 거의 잠잠할 정도다.
딱 한 번 김진석의 <니체는 왜 민주주의를 반대했는가>에서 답변이 있긴 했으나 그렇다고 전반적인 반론을 가한 건 못되었다).
 
어쨌든 우리에겐 완결된 객관적 진리가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이전 보다 더 낫다는 의미로서의 상대적 의미로서의 진리와 진보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역시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백두가 보기엔 시행착오를 통해 적어도 부분적으로 성취되고 있는 합리주의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합리주의는 완결되지 않는 영원한 모험의 도상에 있다고 말한다.
 
바로 그런 점에서 백두는 <혼돈>이 <질서>보다 못한 것이라고 결코 보질 않았었다.
질서를 강조한 것이 근대 합리주의 이성이었다면,
탈근대는 근대를 비판하면서 이를 넘어서는 무질서와 혼돈을 또한 강조한다.
하지만 알고 보면 <질서>와 <혼돈>은 서로를 살찌워주는 영원한 과정상에 있어 두 가지 필수불가결한 요소인 것이다.
 
.........................
 
결국 저 돌이 회색이냐 빨간색이냐를 논의할 경우,
서로 충돌하는 두 주장 모두 일정 부분 하나의 근거는 될 수 있다.
우리가 상담의 진행에서 내담자가 아무리 허무맹랑한 환상과 망상을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일정 부분 공감을 표해줄 수 있는 철학적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정서적 소통의 차원은 바로 이 같은 공감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자신의 주관적 경험을 넘어서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소통하고자 할 경우엔
우리는 또한 주관을 넘어선 객관의 방향을 쫓아갈 수밖에 없다. 객관이란 나 아닌 상대방의 경험에 해당한다.
즉, 내담자의 주관적인 경험이 보다 확장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경험들과 소통하고자 하는
사회적 삶을 필요할 경우엔 여기엔 보다 모순과 충돌을 줄일 수 있는 합리적 방향이 모색될 수 밖에 없다.
즉, 내담자에겐 그 자신의 주관적 경험을 넘어선 또 다른 열린 가능성까지도 제공하는 것이다.
 
오늘날 포스트구조주의를 다른 식으로 소화하고 있는 영미권의 리처드 로티는
객관적 토대로서의 합리주의를 거부하면서도 <신실용주의>를 표방한다.
이와 비슷하게 백두 역시 절대적 확실성으로서의 객관주의를 거부하지만
오류를 통한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선 부분적 성취 가능성으로서의 과정상의 합리주의를 인정하는 입장에 해당한다.
 
그렇기에 결국은 우리 앞에 완정한 진리 체계 같은 완결된 객관이란 있을 수 없으며
그것은 언제나 저마다의 상대적 주관들이 서로 맞닥뜨리고 있는 소통 과정에서
그나마 확보될 수 있는 <최선으로서의 객관>만이 있을 따름이다.
 
이 객관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수정가능성과 해체가능성을 담고 있는 객관이며
그것은 영원한 형성 과정에 놓여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는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어느 한 시대의 최선은 다음 시대를 위해선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한낱 주관적 경험으로만 치부될 순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 놓여 있다.
우리의 지성사는 그럼으로써 좀더 한 발 더 나갈 수 있는 진전된 토대를 구축하게 된다.
한때 그토록 권력을 지녔던 천동설이 왜 한낱 초라한 지동설에 패하고 만 것인가? 를 생각해 볼 필요도 있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모든 지식은 권력을 담고 있긴 하나 간혹 때로는 그 이상의 것까지 담고 있기도 하다.
 
............................
 
사유의 문제는 우리가 습관적으로 주관과 객관을 자꾸만 이분화시키고 괴리시켜서 볼 때 일어난다.
우리 자신들은 종종 언어가 주는 실체론적 사고 방식에 곧잘 사로잡힌다.
그럼으로써 기술적(descriptive) 구분과 존재론적(ontological) 구분을 제대로 구별해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사물과 인간을 보는 이해에 있어 어느 한 쪽에 치우침으로 인해 균형감이 상실되고 만다.
 
매순간마다 저 들녘의 한송이 꽃을
전체 우주가 함께 관여해서 매순간마다 빚어내고 있듯이
 
이미 내 안에 세계를 담고 있다는 사실은
본래는 주관과 객관이 이분화되어 있지 않은 한덩어리의
상호의존 관계의 과정적 실재(reality)로서 놓여 있다는 점을 여실히 잘 말해주고 있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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