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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알랭 바디우'에 대하여    
  글쓴이 : 미선이 날 짜 : 09-03-07 17:15 조회(8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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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사유들 ④ 알랭 바디우 

해체주의 시대에 보편적 ‘진리’ 가능성 제시해
 

현대 프랑스 철학을 대표하는 철학자이며, 극작가이자, 소설가이기도 한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1937년 모로코 태생으로, 파리 8대학과 파리사범고등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현대 프랑스 철학의 커다란 흐름을 ‘진리’와 ‘체계’의 붕괴로, 혹은 니체의 영향 이후 반(反)플라톤주의적 경향의 지배로 특징지을 수 있다면, 알랭 바디우의 사유는 그 반대진영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진리’와 ‘보편성’을 주장하는 플라톤주의적 전통, 혹은 이성적 합리주의를 표방하는 데카르트주의적 전통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디우는 자신의 주요 저서인 『존재와 사건(L'Etre et l'événement)』(1988)에서 수학의 집합론에 근거를 둔 ‘순수다수(le multiple pur)’로서의 ‘존재(l'être)’를 말한다. 사실상 ‘수학’을 통해 ‘존재 문제’에 접근한다는 것이 서양철학사적인 맥락에서 볼 때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본격적으로 ‘수학의 역사’를 ‘존재 물음의 역사’와 동일시하면서 존재론을 펼치고 있는 바디우의 사유는 철학 내에서도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그의 철학이 ‘존재’에 대한 물음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바디우는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연장되거나 구별되는 지점으로서 ‘진리’의 영역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그가 프랑스 68년 혁명을 경험한 세대이며, 특히 마오주의자였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존재와 사건』 후반부에서 바디우는 ‘순수다수’인 ‘자연적 존재’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역사성을 특징으로 갖는 ‘일자를 넘어서는 것(l'ultra-Un)’으로서의 ‘사건적 진리’에 대해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바디우는 ‘진리’를 주장하기를 꺼려하는 이 시대에 비록 지엽적이지만 보편성을 갖는 것으로서 ‘진리’를 주장한다. 전통적으로 인식되고 있던 ‘진리’, 즉 유한함에 대립되는,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는 영원성으로서의 ‘진리’가 이제는 바디우에 의해 국지적이며 복수적인 이름으로서의 ‘진리’로 다르게 그려진다. 이러한 바디우의 ‘진리’에 대한 일종의 당위적 책임감은, 이어서 ‘윤리’의 문제나 ‘주체’의 문제에서도 새로운 접근을 통해 이전의 전통적 개념과는 단절된 모습으로,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이미 드러나 있었지만 비로소 개념화된 새로운 모습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진리’나 ‘윤리’에 맞서서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사건적 진리’,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사건에 대한 ‘충실성(fidélité)’으로서의 ‘윤리’, ‘주체’란 무엇인가? 옳음에 대한 당위성을 말하기 어려운 이 시대에, 그래도 지엽적이고 한시적이지만 보편성을 갖는 ‘진리’를 주장한다는 것은 어떤 철학적, 실천적 의미를 지니는가?

모든 철학이 그 시대의 현실적 상황을 자신의 철학적 물음의 기본 출발로 삼았다는 점은 ‘지금(maintenant)’과 ‘여기(ici)’를 중시하는 실천적 철학자 바디우에게 너무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동구권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모든 절대적 가치가 무너지고 ‘다양’과 ‘차이’만이 강조되는 현 상황에서, 바디우는 ‘진리’와 진리과정에 수반되는 것으로서의 ‘사건적 주체’를 주장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있음(존재일반)의 이름인 다름(차이)’이 아니라, 무엇인가 특별한 사건적 진리에 충실해 우리의 삶을 예기치 못하는 특별함으로 바뀌게 하는 ‘같음’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이 ‘같음’은 다름과 구별되며, 유일하게 ‘다름’에 무관심하며, 무엇인가에 충실하게 하는 ‘주체’를 형성하며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게 하는 ‘진리의 이름’인 것이다. 우리에게 ‘다름’이나 ‘차이’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존재의 모습이지, ‘같음’보다 우월한 가치를 지녀 추구해야 하는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바디우의 ‘사건적 진리’에 대한 사유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유가 팽배해 있는 현 시대에, 다시 말하자면 ‘진리’나 ‘주체’를 더 이상 주장하려하지 않는 현시대에, 그럼에도 소위 변화된 세계를 인정하면서 그 위에 자신의 새로운 문제의식을 제출하며 개입하고 있는 실천적 철학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바디우에게서 ‘진리’와의 연관성을 갖는 것으로서의 ‘주체’란 무엇인가? 우리가 ‘우연’의 이름 하에 맞이하게 되는 하나의 ‘사건’에 충실할 때, 그 우연적 사건은 주체를 진리과정에 충실할 수 있도록 강제한다. 다시 말하자면 바디우의 ‘주체(sujet)’란 ‘주체화의 과정(subjectivation)’과 다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 주체는 진리를 수반하는 ‘사건’ 이전에 미리 존재할 수 없으며, 진리가 복수인 것처럼 주체 또한 ‘복수’의 형태로 생성된다. 말하자면, 어떠한 ‘진리’나 ‘윤리’, ‘주체’도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기존의 백과사전적 지식에 ‘구멍을 뚫는 것’으로서, 새로운 것의 완전한 출현으로 나타난다.

그간 강한 정치적 저항의식을 가져왔던 우리의 역사적인 특수함을 고려해 볼 때, 또 그 반대급부로서 항시적인 안정추구를 위해 여러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이 작용돼 왔던 지난 시절 지배질서의 담론과 그 역학관계를 확인해볼 때, 알랭 바디우의 철학적 사유는 우리사회의 도덕담론이나 지배담론이 갖고 있는 문제들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해 줄 뿐 아니라, 해체론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형태의 대안이 아닌 변화와 미래의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새롭게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 줄 것이다. ‘있음’의 이름이 ‘차이’와 ‘다양’이라는 그의 사유는 서양 고전적 철학의 맥을 잇는데, 이는 우리에게 ‘평등’에 대한 당위성의 근거를 마련해준다. 동시에, 비록 한시적이고 지엽적일지라도 보편적인 ‘진리’를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은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추동의 힘을 사유할 수 있게 한다.

- 홍기숙 강사 (숭실대ㆍ철학과)
 

http://offret.egloos.com/3415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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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혁명적 … 기존 지식체계 깨며 생겨” [중앙일보]
 
세계적 철학자 7명 릴레이 인터뷰 ③ 알랭 바디우 파리 고등사범학교 교수
 

서양 철학사에서 현대 프랑스 철학이 차지하는 위상은 독특하다.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속칭되는 각종 해체주의의 진원지다. 탈근대 해체주의 철학은 신·이성·본질(실체)을 중심으로 사유해온 서양 철학 2500년 역사를 뒤흔들었다. 그같은 해체는 급기야 철학의 존립 근거까지 위협했고, 철학의 역할과 목적을 다시 세우는 반성적 사고로 이어졌다. 푸코·데리다·들뢰즈 등 해체철학자들에 이어 새로운 거장으로 평가받는 알랭 바디우(Alain Badiou·71) 파리고등사범학교(ENS) 교수가 서 있는 자리다. 바디우는 탈근대 철학의 ‘차이의 사상’과 상대주의를 배격하고 다시 고전적인 형태의 철학 체계를 수립하려 한다. 진리가 하나 뿐이라고 강변하는 서양 전통의 ‘동일성 철학’으로 바디우가 회귀하는 것은 아니다.
 
e-메일 대담=김상환 서울대 교수

바디우 역시 해체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진리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며 대신 ‘복수(複數)의 진리’를 세우는 새로운 사유의 실험을 전개하고 있다. 바디우는 외국인 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위해 직접 피켓을 들고 시위에 나서는, 행동하는 철학자로도 유명하다. 탈근대적 ‘차이의 철학’과는 다른 관점에서 각종 소수자들을 배려하는 철학을 그는 지향한다. 이는 프랑스 좌파 철학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프랑스 철학을 전공한 김상환 서울대 교수가 인터뷰 안하기로 ‘악명’높은 바디우 교수와 수차례에 걸쳐 이메일 대화를 나눴다.
 
 김상환(이하 김)=한국 사회도 외국인이 급증하면서 다인종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 민족주의가 강하게 지배했던 한국 사회에 새로운 윤리관을 수립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한국의 많은 지식인들은 탈근대 철학자들의 ‘차이의 철학’이나 ‘차이의 정치학’에서 문화적 다양성을 끌어안는 새로운 윤리학을 탐색하고 있다. 그런데 바디우 교수는 탈근대 철학자들을 소피스트라고 비판하고 있다.

 알랭 바디우(이하 바디우)=일상적인 삶이나 정치적인 삶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은 다른 사람들이 나와 다르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나와 남을 봄에 있어서 ‘차이’보다는 ‘같음’을 이해하는 것이 진정 어렵고 중요한 일이다. 가장 핵심적인 정치적 문제는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류 전체의 근본적인 일체성, 즉 모든 인간의 평등이라는 문제가 핵심적이다. 나는 모든 사람들의 문화적 권리를 지지한다. 문화적 차이들이 다양한 물결을 이루지만 그 안에는 인류의 근본적인 일체성이 함축돼 있다는 나의 신념 때문이다.

 김=진리에 대한 당신의 접근은 독특하다. 하나의 진리가 아닌‘복수의 진리’를 이야기한다.

 바디우=진리는 혁명적이고 기존의 지식체계를 교란하면서 일어난다. 나는 진리가 생겨나는 4가지 절차가 있다고 본다. 정치·과학·예술·사랑이 그것이다. 중요한 것은 네가지 절차가 언제나 공존한다는 점이다. 기존의 철학은 이 점을 무시하고 진리를 과학이나 정치 혹은 예술과 같은 한가지 절차로 환원시켜 봉합했다. 가령 마르크스주의는 진리를 정치에, 영미 분석철학은 과학에, 하이데거의 추종자들은 예술에 봉합했다.

 김=당신의 철학을 흔히 ‘사건의 철학’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디우=사건은 미증유의 진리가 생산되는 절차다. 철학의 과제는 스스로 진리를 생산하는 데 있지 않다. 현재의 언어를 벗어나면서 출현한 진리에 개입해 사후적으로 명명하는 일이 철학의 과제다. 사건의 1차적 의미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사건의 철학’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김=한국은 대통령 선거가 막 끝나서 보다 성숙하고 선진화된 사회로 나아가길 희망하는 분위기가 짙다. 그런데 당신은 대의 민주주의나 정당 정치에 회의적인 발언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바디우=선거는 정치적인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어떤 합의에 기초한 제도이다. 사회가 대충 어떠한 형태를 띠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경쟁 그룹들 사이의 의견일치가 없다면, 상대편이 권좌에 오르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선거가 제대로 기능하고 있다면, 이는 딱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선거에 참여하는 어떠한 세력도 실질적으로는 과격하고 혁명적인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상환=선거가 어떤 합의 위에 서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바디우=자본주의라는 합의 위에 놓여있다는 의미다. 소위 민주주의적인 나라치고 자본주의가 지배하지 않는 나라, 시장경제가 군림하지 않는 나라, 대기업 CEO가 선거에서 뽑힌 정치인보다 더 큰 권력을 쥐지 않은 나라, 그런 나라를 본 적이 있는가. 선거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다. 인간 해방은 자본주의적인 경쟁체제에서는 결코 기대할 수 없다.

 김=그럼 인간 해방을 추구하는 길은 어디에 있나.

 바디우=첫 번째 관문은 국가의 선거 형식 바깥에서 움직일 수 있는 대중적 조직을 만드는 데 있다. 핵심 과제는 서로 다른 출신의 사람들을 묶는 일이다. 가령 지식인·청년·직장인 그리고 사회 밑바닥에 있는 노동자 사이에 어떤 행동 단위나 조직 단위를 구성해야 한다.

 김= 사도 바울을 주제로 한 당신의 작품이 세계적으로 널리 읽히고 있는데, 종교 갈등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다.

 바디우=오늘날 일어나는 수많은 갈등이 종교나 문명 간 충돌이라 보지 않는다. 내가 볼 때 신은 죽었고, 종교는 무력해졌다. 우리는 더 이상 중세시대에 살고 있지 않는 것이다. 진정한 갈등은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에서가 아니라, 미국과 서방을 중심으로 하는 고삐 풀린 자본주의와 가난하고 헐벗은 인민 대중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런 충돌은 때로 종교적 성향의 집단들에 의해 조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전 세계에 걸쳐 자본주의에 의해 창조된 여러 가지의 거대한 불평등이 없다면, 이 집단들은 아무런 힘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김=당신의 철학에 따른 정치적 주체는 투사의 형태를 취해야 할 것 같은데, 종교적 근본주의자나 테러리스트와 어떻게 다른가.

 바디우=테러리스트는 전혀 인간 해방의 보편적 비전을 수호하지 않는다. 테러리스트는 종교적 경전에 의해 확립된 폐쇄적인 정체성의 옹호자다. 과거의 열성적인 파시스트 신봉자도 마찬가지다. 내가 말하는 충실과 참여의 정치학은 이런 종류의 폐쇄성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김=요즘 한국 학계는 인문학의 위기를 실감하고 있다.

 바디우=내가 볼 때, 인문과학에서 ‘과학’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 것은 마르크스 전통에서 정의하는 역사, 프로이트가 창시한 정신분석, 소쉬르 이래의 언어학 등 세 가지 정도다. 그 밖의 것들은 보통 ‘고전 연구’라 불리는데, 예술에 관계하는 학술적인 형식에 해당한다. 고전 연구를 중심으로 한 인문학은 자본주의에 의해 위협 받고 있다. 수익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예술에 대한 실천적 관계를 조직한다는 점에서 인문학은 대단히 중요하다. 다시 말하지만, 내 철학에서 예술은 과학·정치·사랑과 더불어 보편적 진리의 본질적 유형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다. 인문학의 가치를 옹호해야 하는 근거도 거기에 있다. 대학이 자본주의의 요구만을 따라가선 안된다. 대학이 몰두하고 헌신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진리 자체이고 여기에는 어떠한 제약이나 구속이 있어서는 안된다.
 
정리=배영대 기자

 ◆도움되는 책=탈근대 해체주의 관련한 번역서로는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민음사),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민음사), 자크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민음사) 등이 있다. 해체주의 비판서로는 알랭 바디우의 『조건들』(새물결), 슬라보예 지젝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등이 출간됐다.

 ◆알랭 바디우=1937년생. 수학과 철학에서 모두 박사학위 취득. 프랑스 현대철학국제연구센터 소장. 문예 창작, 연극 연출로도 명성이 높은 전방위 작가. 마르크스 이론가 알튀세와 함께 활동하다 1968년 5월혁명 이후 결별했다. 80년대 들어 새로운 철학의 길을 모색했고, 88년 대표작 『존재와 사건』을 출간 했다.

 ◆김상환=1960년생. 연세대 철학과 졸업. 파리4대학 철학박사. 『해체론 시대의 철학』 등의 저서가 있 다.
 
 
http://blog.aladdin.co.kr/703199195/category/16621261?communitytype=My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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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바디우의 <존재와 사건>에 대한 동양철학적 해설 

서용순 / 세종대 교양학부 초빙교수 
 
 
김상일의 저작은 무척이나 새로운 시도이다. 그 이유는 단순히 이 책이 이른바 탈근대 시대에 철학적 합리주의의 복원을 꾀하는 알랭 바디우의 주저 <존재와 사건>(L'Être et l'Événement)에 대한 첫 국내 연구서이기 때문은 아니다. 이 책이 수학이라는 보편언어를 통해 동양과 서양의 만남을 제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라는 화두는 여러 철학자들을 매료시켜왔다. 위기에 빠진 서양의 합리주의적 철학을 동양의 정신적 유산을 통해 보완하려는 시도는 오래 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상이한 역사적 배경에 갇혀 그저 각각의 사유를 병렬적으로 나열하거나, 양자의 차이와 유사성을 기계적으로 논하는 데 그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동양과 서양이 공통의 언어를 통하여 소통할 수 있다면, 그 자체가 긍정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저자에게 그 언어는 ‘수학’이고, 그 수학은 다름 아닌 게오르그 칸토르에서 폴 코헨으로 이어지는 집합론이다. 이 책에서 동양과 서양은 그 언어를 통해 만난다.
 
집합론을 통한 바디우와 동양사상의 만남

동양철학에 대한 이해가 거의 전무한 탓에 이 책을 구성하는 여러 동양 고전들에 대한 집합론적 접근이 타당한 것인지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무척 신선한 것임에 틀림없다. 바디우는 집합론을 존재론으로 간주한다. 수학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몰랐지만 사실 그것은 존재론이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집합론은 존재론적 상황의 질서와 모순, 그리고 동요를 설명하는 역동적인 존재론이다. 동양의 고전들 역시 존재의 질서에 대해 고민해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지점에서 두 세계가 만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 있다. 김상일이 다루고 있는 동양의 고전들 각각이 상당한 논란을 담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는 문제가 있지만, 그것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언제, 누구에 의해 집필된 것이건 그것이 담고 있는 사유에 힘이 있다면, 그러한 시도 하나하나가 어느 정도 중요성을 가질 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 책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바디우의 존재론과 동양사상의 맞선을 주선하기에 급급하여 바디우의 철학이 갖는 전반적인 지형도를 그려내는 데 소홀하다. <존재와 사건>은 아주 복잡한 철학적 배경을 갖는 책이다. 그것은 탈이성과 해체에 맞서 ‘합리주의’를 복원하려는 시도이며, 사유에서 배제된 ‘혁명적 정치’를 복원하기 위한 철학적 전제를 마련하는 데 바쳐진 노력이다. 또한 여러 철학자에 의해 부정된 ‘진리’를 혁신적인 방식으로 복원시키려는 치열한 몸짓이다. 저자는 <존재와 사건>이 보여주는 존재론과 집합론의 연결을 풀어내는 데 집중한 나머지 이러한 철학적 배경에 대한 성찰을 미루고 있는 것이다.
 
아쉬움 남지만 고무적인 첫 국내 연구서

바디우의 철학에 대한 몇몇 오해들 역시 눈에 들어온다. 예를 들어 <존재와 사건>의 핵심적인 부분 중 하나인 ‘사건의 수학소’에 대한 해설에서 저자는 ‘사건’(event)과 ‘사건적 장소’(evental site)를 혼동하고 있다. 김상일은 상황과 사건의 관계를 다루면서 사건적 장소도 상황의 한 항(목)이 아닌가하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445쪽). 그러나 바디우가 의문에 부치는 것은 사건이 상황의 한 항목일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사건적 장소 자체는 명백히 상황에 속한 것이다. 문제가 되는 장(성찰 17)에서 바디우는 사건이 상황에 속하느냐, 속하지 않느냐는 결정불가능한(indécidable) 것이라는 점을 증명해보이고 있다.

바디우의 철학 용어에 대한 번역에도 문제는 있다. 저자는 One/Multiple(Un/ Multiple)을 일자/복합물이라고 옳기고 있으나, 이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것은 전통적인 존재론적 주제인 일(一)과 다(多)의 문제이므로 ‘일자/다자’ 또는 ‘일자/다수’로 번역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quantifier 역시 ‘양화’가 아닌 ‘양화기호’로 옮겨야 한다. 이는 양적 관계를 표시하는 집합론의 기호로서 ∀는 보편양화기호, ∃는 존재양화기호가 된다. 또한 저자는 indiscernible을 비분별(성)으로, undecidable을 비결정(성)으로 옮겼으나, 이 역시 ‘식별불가능(한 것)’, ‘결정불가능(한 것)’으로 옮기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  이제 막 소개되는 단계에 있는 바디우의 철학적 용어들에 대한 번역은 사실 통일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용어의 통일작업은 이후 반드시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여러 문제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노력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는 것은 접근이 어려운 바디우의 철학적 사유에 고희를 앞둔 원로학자가 과감하게 뛰어들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책이 안고 있는 여러 문제들은 앞으로 진행될 저자의 작업 속에서 충분히 극복되리라 믿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디우에 대한 연구서가 최초로 출간되었다는 사실이다. 바디우 철학에 대한 연구는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 오는 12월에 제이슨 베이커(Jason Baker)의 <알랭 바디우: 비판적 입문>(Alain Badiou : Critical introduction)이 나오며, 내년 상반기에는 서용순의 <알랭 바디우-철학의 도전>이 출판될 예정이다.
 
 2008년 10월 01일 (수) 22:50:10 유정란 편집위원  yangdingee@hanmail.net  
 
 
http://www.cauon.net/news/articleView.html?idxno=15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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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혁신과 혁신의 철학
 
알랭 바디우, 다시 진리를 말하다

지난 10월 29일부터 12월 3일까지 매주 수요일 학술단체협의회(이하 학단협)가 주최하는 가을학술특강이 서울교정에서 열렸다. 이번 학술특강은 『철학의 혁신과 혁신의 철학-알랭바디우』라는 주제로 서용순 교수(세종대 교양학부)가 강의를 맡았으며, 학부·대학원 및 타 대학 대학원 등 다양한 소속의 학생 40여명이 매시간 참석해 높은 관심을 나타냈다. 특강은 △시대의 위기에서 철학을 구하기 △집합론을 통한 진리의 사유 △예술작품과 예술의 짜임 △성차와 사랑의 진리 △다시 사유되는 혁명적 진리 △철학의 윤리, 진리의 윤리 등 6개 부분으로 나눠 진행됐다. 이번 특집면은 특강에서 중요하게 다뤘던 부분과 서교수와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바디우가 말하는 ‘새로운 진리’에 대해 정리해 보았다.

고전철학의 틀에서 새로운 진리를 말하다

오늘날 탈근대 철학의 영향으로 ‘진리’라는 테마는 사라졌다. 그러나 알랭 바디우는 탈근대 철학의 상대주의를 배격하고 고전적 형태의 철학 체계를 수립하면서 다시 진리를 찾고자 한다.

프랑스 현대 철학은 탈근대 이후 해체주의의 근원지였고, 반 플라톤주의 배경에 따라 진리는 더욱 상실돼 갔다. ‘진리는 없다’고 주장하는 탈근대 철학자들과 ‘진리는 있다’고 말하는 바디우의 차이는 여기서 발견된다.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는 탈근대 이전에 논의되던 고전적인 형태의 진리가 아닌 혁신된 진리다. 전능한 진리의 관념을 버리고 복수의 진리를 주장하면서 진리를 보다 유연한 시각으로 보는 것이 바디우의 관점이다.
 
플라톤은 정치·과학·예술·사랑 등에 대해 사유함으로써 자신의 철학을 수립하고자 했다. 철학 외적인 영역과 철학을 연결시키면서 진리와 존재에 대해서 고민한 것이다. 바디우 역시 이런 형식을 그대로 가져오고 있다. 바디우의 철학이 플라톤적 몸짓에 기초한다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서교수는 “바디우의 철학이 사실상 플라톤주의적 경향을 갖는 것으로 비춰진 것은 사실이지만, 정확히는 반 플라톤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이다”라면서 “플라톤처럼 진리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하나의 원리로 간주하지 않는 것이 바디우 사상의 특징”이라고 플라톤과 바디우 사이의 차이를 강조했다.

일자가 아닌 다자를 말하는 복수의 진리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생산절차를 보면 고전철학과의 차이를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 있다. 바디우는 정치·과학·예술·사랑의 네 가지 진리생산절차를 통해 복수의 진리를 말한다. 반면에 전통철학은 네 가지 중 하나 또는 일부만을 진리로 특권화시킨다.

전통철학은 진리의 공가능성(compossibilit? 여러 가지 조건이 각자의 영역에서 모두 진리를 생산하는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진리의 복수성을 배제하고 그 중 하나, 혹은 일부에 대해서만 절대적 진리로의 가능성을 인정한 것이다. 서교수는 전통철학이 “진리 생산의 다양한 가능 영역을 부정하고 진리를 어느 하나의 영역에 가둬버렸다”고 하면서 “이것을 바디우는 철학의 봉합이라고 명명했다”고 말했다.

바디우는 진리가 복수로 존재해야 하며 서로 자신의 영역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치적인 진리가 과학적인 진리나 예술적인 진리를 포괄하거나 지배해서는 안되며, 각각의 진리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과거에 논의됐던 지배적인 진리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나아가 바디우는 진리를 전능하다고 보지 않는다. 진리가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다고 보는 전통철학과는 대칭점에 서 있는 것이다. 서교수는 바디우가 “과거 진리라는 이름으로 이뤄진 사회주의나 마녀사냥 등을 지적하면서 진리의 특권화를 경계한다”고 말했다. 또 그는 “일례로 정치가 진리로서 모든 것을 지배했던 맑스주의의 편향에서 빠져나와 다수의 진리를 추구한다”면서 “진리가 특권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바디우 철학의 기본적인 전제조건” 이라고 강조했다.

궁극적으로 바디우가 진리를 말하는 이유는 철학을 살리기 위함이다. 철학을 살리기 위해 전통철학이 가지고 있던 도그마로서의 진리를 완전히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일자로서의 진리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다자를 지향하면서 진리의 복수성을 제시하고, 과거 폭압적으로 변질되곤 했던 전제적인 진리와의 차이를 뚜렷이 하고 있다.

바디우가 말하는 인간해방, 평등의 선언

바디우는 인간해방을 ‘평등의 선언’을 통해서 실현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인간해방이 누구에 의해서 이뤄져야 하며, 그 구체적인 실천방안이 무엇인지 언급하지 않는다. 근원적으로는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인지 구체적인 한가지로 정의내리지 않는다. 바디우의 이러한 관점은 인간해방이 어떤 특정한 형태를 통해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는 특권화된 진리를 통해 구체적인 이상향을 제공한 전통철학자들의 실수를 지적한다. 맑스 이후 맑스주의 철학자들이 인간해방의 구체적인 형상을 부여하려 한 것을 좋은 사례로 들 수 있다.

인간해방이라는 것은 임금의 평등으로 환원할 수도 없고 의식의 혁명만으로 이뤄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바디우는 인간해방이 ‘평등의 선언’속에서 시작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평등의 선언은 어느 한 대리자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만인이 선언하는 ‘평등의 선언’이다.

서교수는 이상적 공산주의라는 것이 비단 생산의 영역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전 분야에 걸쳐 발생돼야 하며 이러한 평등은 완전히 자유로운 개인들이 지배하는 상황이라고 전제했다. 결국 평등한 개인이 지배하는 세상은 지배가 없는 세상을 의미한다. 이어 서교수는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최초의 근거는 무엇인가”를 되물으며 “그것은 다름 아닌 평등의 선언으로부터 가능하게 될 것”이라 답했다.

“자본주의적인 경쟁체제에서는 인간해방을 결코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하는 바디우는 모두가 평등하다고 선언됐을 때 노동이 자본에 지배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평등의 원칙을 통해서만 자본에 지배받지 않는 노동이 가능하고, 비로소 지배관계가 역전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을 위한 과학기술이 자본에 종속되는 순간 인간에 해를 끼칠 수 있게 된다. 맹목적으로 치닫는 자본화를 경험할수록 바디우 철학이 더욱 크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대담·정리·사진 _ 이헌|scotchcandy@khugnews.co.kr

 
http://www.khugnews.co.kr/publish/16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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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알랭 바디우 - 프랑스 철학의 모험

예전에 써서 올렸다가 블로그 바꾸면서 사라진 글인데... 기왕 번역 게시판을 만든 김에 올려놓는다.
 

프랑스 철학의 모험

알랭 바디우 (Alain badiou)  - New Left Review 35, September-October 2005

현대 프랑스 철학과 그 역설을 고찰해 보자. 이러한 고찰은 가장 보편적이면도 가장 특수할 수 있다. 헤겔(Hegel)은 이처럼 모든 것들과 관련을 맺는 완전한 보편성과, 일정한 시간과 공간에 속하는 특수한 것들의 통합을 '구체적 보편성(concrete universal)'이라고 불렀다. 철학은 좋은 예이다. 철학에서는 완전히 보편적인 것이 어떠한 예외도 없이 모든 사물들에게 말을 건내고 있지만 또한 (특정 시기의-역자)철학은 개별 국가만의 특수성, 그리고 강한 문화적인 특수성 또한 가지고 있다. 특정한 공간과 시간에 속하는, 철학의 시기(moments of philosophy)라고 부를 수 있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은 이성적 보편성을 목표로 함과 동시에 완전히 구체적인 순간들 또한 자신 안에 기입하는 것이다. 아주 인상적이면서도 잘 알려진 두 가지 예를 들어보자. 첫 번째는 매우 독창적이며 기초적인 시기였지만 극히 단명했었던, 기원전 5세기에서 3세기 동안의,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에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까지의 고대 그리스 철학이다. 두 번째는 18세기에서 19세기 초 사이의 또 다른 예외적인 경우인데, 아주 창조적이고 (고대 그리스 철학보다-역자)더 짧은 시간 범위에 응축된, 피히테(Fichte)와 셸링(Schelling)을 포함한 칸트(Kant)에서 헤겔(Hegel)까지의 독일 관념론 시기이다. 나는 더 국가적이고 역사적인 주제에 의존하려 한다. 20세기의 하반기에 고대 그리스 철학, 독일 계몽주의 시대의 예와 비교해 볼 때 흡사하게 닮은 꼴인(toute proportion gardee) 프랑스 철학의 한 시기가 있었다(혹은 있다, 나 자신을 그 시기에 포함시킨다면-저자).

사르트르(Sartre)의 기초적 작업인『존재와 무(being and nothingness)』는 1943년에 출판되었고, 들뢰즈(Deleuze)의 마지막 책인『철학이란 무엇인가?(what is pilosophy)』는 1990년대 초의 것이다. 이들 두 사람 사이에서 발전한 프랑스 철학의 시기에는, 바슐라르(Bascelard)와 메를로 퐁티(Merleau-Ponty),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 알튀세르(Althusser), 푸코(Foucalt), 데리다(Derrida) 그리고 라캉(Lacan), 또 사르트르와 들뢰즈 역시 마찬가지로 포함된다(아마도 나도 역시). 시간은 말해줄 것이다. 만약 프랑스 철학의 시기가 이미 지나갔다고 하더라도, 나의 위치는 그 시기의 마지막 대표자이리라고. 창시적 기여를 한 사르트르와, 들뢰즈의 마지막 작업 사이에 위치해있는 그들의 작업 전체는 '현대 프랑스 철학'이라고 불리어진다. 나는 보편성과 특수성이라는 두 가지 측면 모두에서 새로운 철학적 창조의 시기가 성립되었다고 주장하려 한다. 문제는 이러한 시도을 증명하는 것이다. 1940년과 20세기의 끝자락 사이에, 프랑스 철학에서 과연 무엇이 일어났는가? 위에 인용된 10명 가량의 이름들을 둘러싸고 무슨 일이 있었는가? 우리가 실존주의, 구조주의, 해체론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무엇인가? 역사적인, 그리고 지적인 통일성이 이 시기에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이 문제를 네 가지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기원. 어디서 이러한 시기가 왔는가, 선행자들은 누구인가? 그 탄생은 무엇인가? 두 번째, 프랑스 철학이 맡은 주된 철학적 작업은 무엇이었는가? 세 번째는 문학과 철학자들의 연결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과, 이 결과로써 나타난 철학과 문학 사이의 더 일반적인 연결에 관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시기 전체를 거쳐 지속적으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철학과 정신분석학 사이의 관계이다. 기원, 작업, 스타일과 문학, 정신분석학이라는 네 수단으로 현대 프랑스 철학을 정의내릴 것이다.

개념과 내재적(interior) 삶(역주1)

'프랑스 철학의 시기'에 대한 철학적 기원을 생각해보자면, 우리는 20세기 벽두에 프랑스 철학에 일어난, 두 대조적인 (철학적-역자)흐름의 출연이라는 근본적인 구분으로 돌아가야 한다. 1911년에 베르그손(Berson)은 옥스퍼드에서 『사유와 운동(La pensee et le mouvement)』이라는 논문집에 수록된 두 개의 유명한 강연을 했다. 1912년에는-다른 말로는, 동시에- 브랑슈비크(Brunschvigq)는 『수리철학의 흐름(Les etapes de la philosophie mathematique)』을 출판했다. 세계대전 직전에, 이러한 존재에 대한 두 개의 지향점이 명확히 구분되었다. 우리는 베르그손에게서 존재와 생성의 일치를 정립하는, 내적 생명의 철학(philosophy of vital interiority)이라고 불리는 것, 그리고 삶과 우연의 철학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방향은 20세기의 들뢰즈에 이르기까지 지속된다. 브랑슈비크의 작업에서, 우리는 수학에 기반을 둔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사유와 기호에게서 철학적 형식주의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그의 작업 역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는데, 특히 레비스트로스와 알튀세르, 라캉이 그렇다.

이와같이 세기의 시작부터 프랑스 철학은 대립적이고 분리된 성격을 보였다. 첫 번째 면은, 삶의 철학이다. 다른 면은, 개념의 철학이다. 삶과 개념 사이의 이러한 논쟁은 프랑스 철학의 시기를 따라가는 데에 가장 핵심적이라 할만 하다. 주체의 문제와 관련된 어떤 논쟁에서, 이러한 두 방향은 같은 곳에 서있다. 살아있는 유기체론과 개념의 창조자. 주체의 내재적, 동물적, 유기적 삶과/ 주체의 창조성의 수용력과 추상작용, 그리고 사유에 의하여, 주체는 이 양쪽 모두로부터 동시에 심문받고 있다. 육체와 관념의 연결, 그리고 삶과 개념은 주체의 문제를 중심으로 조직화된다. 이와같은 프랑스 철학의 구도는 베르그손과 브량슈비크의 대립으로부터 시작되어 20세기 프랑스 철학 전체를 이끌어나갔다. 철학은 우리모두 많든 적든 전투원들을 소진하는 전장과 같다는 칸트의 은유를 전개하자면, 20세기의 하반기 동안 전선은 본질적으로 여전히 주체의 문제를 둘러싸고 구성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알튀세르는 역사를 주체없는 과정이라고, 그리고 주체를 이데올로기적 범주라고 정의했으며, 데리다는 하이데거를 해석하는 와중에 주체를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간주했고, 라캉은 주체의 구성을 만들어냈다. 사르트르와 메를로 퐁티 역시 주체에 절대적으로 중심적인 역할을 할당했다. 개념과 삶 사이의 대립에 관한 근본적 문제 이후, '프랑스 철학의 시기'의 첫 번째 목적지는 결국 주체를 넘어서는 것에 관한 논쟁이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기원의 탐색을 더 뒤로 끌고 갈 수도, 그리고 프랑스 철학의 분할을 데카르트적 전통과의 단절로 설명할 수도 있었다. 전후의 철학적 시기는 어느정도 주체 범주의 철학적 발명가로서의 데카르트의 사상과 그 중요성에 관한 광범위한 논쟁으로 읽을 수 있다. 데카르트는 동물-기계로서의 물리적 신체와 순수한 반성이라는 양쪽 모두에 관한 이론가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현상의 물리학과 주체의 형이상학 양자에 관심을 가졌다. 모든 위대한 현대 철학자들은 데카르트에 관한 저작을 썼다. 라캉은 실제로 데카르트의 귀환을 위해 그를 불러들였고, 사르트르는 데카르트가 자유를 어떻게 다루었는지에 관한 주목할만한 텍스트를 써냈으며, 들뢰즈는 화해할 수 없는 적개심을 남겨두었다. 간단히 말해, 전후 시기의 프랑스 철학자들은 수많은 데카르트가 있는 것과 같았다. 또, 이 기원은 주체를 둘러싼 개념적 전쟁이라는 프랑스 철학적 시기의 첫 번째 목적지를 낳았다.

네 가지 움직임

다음으로, 이 사상가들 모두의 작업이 갖는 공통의 지적 작업을 확인해 보자. 나는 이 시기에 분명히 나타난, 철학하는 방법을 예증하는 네 가지 절차의 윤곽을 그리고자 한다. 어떤의미에서는, 모든 것은 어쩌면 방법론적인 것일 수 있다. 첫 번째는 독일의 움직임, 아니, 오히려 독일 철학자들과 관련된 프랑스 철학의 움직임이다. 사실 모든 현대 프랑스 철학은 독일 철학의 전통에 관해 많은 논쟁을 벌이고 있다. 그것이 형성된 시기은 코제브(Kojeve)의 헤겔 강의였는데, 라캉이 참여했었고, 또 레비스트로스도 영향을 받았다. 1930년대와 40년대에 는, 후설(Husserl)과 하이데거(Heidegger)의 작업인 현상학(phenomenology)을 발견했다. 예를들면, 사르트르는 그가 베를린에 첫 번째로 체류하는 동안에 자신이 철학적 관점을 근본적으로 수정하였다. 데리다는 독일 사유에 관한 첫 번째의, 그리고 최고의 해석자로 간주된다. 니체(Nietzsche)는 푸코와 들뢰즈에게 있어 근본적인 참조점이다.

프랑스 철학자들은 헤겔, 니체, 후설, 그리고 하이데거의 작업을 통해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그들이 찾은 것은 무엇인가? 말하자면, 존재와 개념간의 새로운 관계설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탐색을 위해 설정된 많은 이름들(해체론, 실존주의, 해석학-저자) 뒤에는 공통의 목적이 놓여있다. 바로 (존재와 개념 사이의-역자)관계를 변형시키거나, 대체하는 것이다. 사유의 존재론적인 변화, 능동적으로 활동하는 사유의 토양과 그 사유와의 관계는, 프랑스 철학의 전통이라는 중심적인 주제와 함께, 사상의 격투장으로 강제적으로 끌어넣어지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독일철학적 움직임(German move)'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개념과 존재의 관계를, 독일 철학적 전통을 이용해 프랑스 철학의 전장(battleground) 위에 번역하여 새로운 방법으로 다루고자 했기 때문이며, 또 그 이상으로 독일 철학 역시 어떤 새로운 것으로 변형되었다. 그러므로 이 첫 번째 작업은 효과적인 독일 철학의 프랑스적 전유라 할만 하다.

두 번째 작업은, 마찬가지로 중요한, 과학에 대한 관심이다. 프랑스 철학자들은 지적 철학의 배타적인 영토로부터 철학을 떼어내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과학이 단지 반성과 인식의 대상만이 아니라 생산과 활동의 형식이고, 또 지식의 세계를 훨씬 넘어선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그들은 발명과 변환의 모델을 위하여, 과학을 심문했다. 그들은 과학을 창조적 사유의 실천으로, 드러난 현상의 구성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예술적 활동에 필적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과학을 지식의 장으로부터 창조성의 영역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예술에 더 가깝게 만드는 이러한 작업은, 과학적 창조와 예술적 창조를 가장 치밀하고 상세한 방법으로 탐구하는 들뢰즈에게서 최고의 수준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들뢰즈 이전에도 이러한 시도는 프랑스 철학의 구조적 과정 중 하나로 이미 시작되었다.

세 번째 작업은 정치적인 것이다. 이 시기의 철학자들은 모두 정치적인 질문과 정치학 사이의 심층적인 연대를 모색하였다. 사르트르, 전후의 메를로 퐁티, 푸코, 알튀세르, 들뢰즈는 정치적인 활동가였다. 그들이 개념과 존재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위해 독일 철학에 접근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개념과 실천의 새로운 연결을 위해 정치에 시선을 주었다. 특히, 집단적, 공동체적 실천에 관해 그렇다. 정치적 상황에 대한 철학적 참여라는 근본적인 욕망은, 개념과 실천의 연결로 변환되었다.

네 번째 작업은 철학의 근대화와 함께 이루어졌다. 어떤 의미로는 순차적인 정부 행정의 표어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 철학자들은 근대성에 대한 깊은 매력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은 현대 예술, 문화, 그리고 사회 발전을 매우 가깝게 따라가고 있다. 추상화, 새로운 음악과 연극, 추리 소설, 재즈와 영화에 대한 강한 철학적 흥미, 또 근대 세계의 가장 강렬한 표현 위에 철학을 낳으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강한 관심은 또 섹슈얼리티와 새로운 삶의 양식에도 할애되어 있다. 이 모든 것들 안에서, 철학은 개념과 예술, 사회, 그리고 삶의 형식의 생산 사이의 새로운 연결을 모색한다. 그러므로 근대화는 철학이 형식의 창조에 접근할 수 있는지에 관한 새로운 방법의 탐색이다.

결국, 프랑스 철학의 시기는 독일 사유의 재전유, 창조성으로서의 과학이라는 비전, 급진적인 정치적 참여, 삶과 예술의 새로운 형식의 탐색을 둘러싸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들은 개념의 새로운 위치와 배열을 찾는 공통의 시도를 가로지르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존재, 사유, 실천, 형식 변환(movement of forms)을 새롭게 연결시킴으로써, 개념과 그 개념의 외적 환경 사이의 관계를 바꿔놓기 위한 것이다. 20세기 프랑스 철학의 광범위한 혁신을 구성하는 외적 환경과 철학적 개념 사이의 연결은 새로운 것이었다.

글쓰기, 언어, 형식

형식에 관한 물음들, 그리고 철학과 형식의 창조 사이의 관계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확실이 이러한 배치는 철학의 형식의 논쟁점이다. 새로운 철학적 형식을 발명하지 못한다면, 한 개념을 다른 개념으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단순히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는 것만이 아니라, 철학의 언어와 문법 자체를 변환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사태는 철학과 문학 사이의 독특한 연합을 자극한다. 이는 현대 프랑스 철학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물론 여기에도 더 긴 역사가 존재한다. 볼테르(Voltaire), 루소(Rousseau), 디드로(Diderot) 등의 18세기 프랑스 철학자들의 작업은 프랑스 문학의 고전들이다. 이 저자들은 어느 정도는 전후에 일어난 이러한 연합의 선구자들이다. 철학이나 문학중 어느 한쪽으로 확실히 구분할 수 없는 수많은 프랑스 저자들이 있다. 예를 들면, 파스칼(Pascal)은 프랑스 문학의 위대한 작가이면서도, 또한 가장 심원한 프랑스 사상가 중의 한 명이다. 모든 의지와 의도를 고전 철학에 할애했고, 우리 시대에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20세기의 알랭(Alain)은 문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에게 글쓰기의 과정은 매우 중요했고, 문학과(특히 발자크에 관한 텍스트는 매우 흥미롭다-저자) 프랑스 시에 대해, 특히 발레리(Valery)에 관해 많은 주석들을 남겼다. 바꿔말하면, 더 많은 전통적인 20세기 프랑스 철학의 인물들이 철학과 문학 사이의 이러한 친화력을 예증한다.

초현실주의자들 또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들 역시 형식의 생산, 근대성, 예술 사이의 관계를 뒤섞는 데에는 열정적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삶의 양식을 발명하기를 원했다. 만약 그들 작품들이 주로 미학적인 기획이었다면, 그 길은 1950년대와 60년대의 철학적인 기획으로 포장되었다. 일례로, 라캉과 레비스트로스는 초현실주의 서클의 단골이었다. 이것은 복잡한 역사지만, 만일 초현실주의자들이 20세기 프랑스에서 일어난 미학과 철학적 기획의 접합을 첫 번째로 대표한다면, 1950년대와 60년대에 개념을 새롭게 배치하고, 또 철학적 스타일과 표현을 직접적으로 연결하려는 시도 속에서 자신의 문학적인 형식을 창조한 것은 바로 철학이었다.

우리가 철학적 글쓰기의 극적인 변화를 목격한 것은 바로 이 무대에서이다. 40년 전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은, 아마도 들뢰즈와 푸코, 라캉의 글쓰기에 길들여지며 성장해 나갔을 것이다. 우리는 초기의 철학적 스타일, 표현과의 놀랄만한 단절이 무엇인지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렸다. 이 시기의 모든 사상가들은 자기 스스로만의 스타일을 찾는데에 열중하였고, 새로운 산문을 창작하는 새로운 방식을 발명했다. 그들은 작가가 되기를 원했다. 들뢰즈와 푸코를 읽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수준의 문장과, 사유와 구의 변화(phrasal movement) 사이의 완전히 독창적인 연결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들의 언어 속에는 새롭고 긍정적인 리듬과 놀라운 독창성이 있다. 데리다에게서는 언어에서 언어로, 마치 언어 스스로 작업하는 것처럼, 사유가 단어들 사이를 통과해 흘러가는 듯한 복잡하고 끈기있는 연결을 볼 수 있다. 라캉을 읽는 사람은 말라르메(Mallarme)의 문장과도 그다지 닮지 않은, 명백하게 시적인, 눈부시게 복잡한 구문과 씨름하게 될 것이다.

그 후에, 철학적 표현의 변형과, 철학과 문학 사이의 경계를 이동시키려는 노력이 있었다. (또 다른 혁신인-저자)사르트르는 소설가이며 희곡작가이기도 했다는(나처럼-저자) 사실을 상기해 보자. 이 시기의 프랑스 철학은 언어에 기입된 여러가지 다른 기록(registers)들 위에서 공연되었고, 문학과 철학 사이의, 또 철학과 드라마 사이의 경계는 변화되었다. 누군가는 심지어 프랑스 철학의 목표중 하나는 문학과 철학을 구분하기 불가능한 글쓰기의 새로운 공간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 공간은 전문적인 철학이나 문학보다는 오히려  더 이상 문학에서 철학을 분리할 수 없는, 일종의 글쓰기의 고향이다. 다른 말로는, 더 이상 개념과 삶의 공식적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 장소이며, 궁극적으로 개념에게 새로운 삶을 주는 글쓰기의 창조를 목적으로 한다. 그것은, 문학적인 삶이다.

프로이트와 함께, 그리고 반대하여

마침내, 이러한 새로운 글쓰기의 발명은 새로운 주체의 선언과 관련을 맺게 된다. 이 주체는 철학의 형태를 창조하고, 주체를 둘러싼 전장은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데카르트로부터 이어저 내려온 이성적, 의식적 주체는 더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더 전문적 용어를 사용하자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은 바로 반성적 주체이다. 현대의 주체는 애매하고, 삶과 신체 속에 더 섞여있고, 데카르트적 모델보다 더 넓은 어떤 것이다. 주체는, 상품의 생산 과정이나, 혹은 그 자신 안에 더 거대한 잠재적 역량을 모으는 어떤 창조와 더 유사하다. 주체라는 단어를 사용하든 그렇지 않든간에, 프랑스 철학이 찾고, 발언하고, 사유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주체이다. 만약 정신분석학이 (주체에 대한-역자)질문자였다면, 그 이유는 본질적으로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관한-역자)발명 역시 주체에 대한 새로운 제안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이라는 착상을 소개한 목적은 의식보다 커다란, 의식을 포괄하지만, 그 의식에 제한되지 않는 주체의 이해이다. 이러한 것들은 '무의식'이라는 단어의 기본적인 의미이다. 

현대 프랑스 철학은 결국 정신분석학과 장기적인 대화에 참여하게 된다. 이러한 (대화의-역자) 교환은 높은 수준으로 계발된 굉장히 복잡한 드라마이다. 가장 근본적으로, 이러한 논쟁의 와중에 프랑스 철학에 어떤 분할이 일어났다, 한쪽은 내가 '존재적 생명론(existential vitalism)'(대충 옮겼음;;-역자)이라고 부르는, 베르그송과 그 뒤를 잇는 사르트르, 푸코, 들뢰즈에게서 형성된 것이고, 다른쪽은 브랑슈비크와 그 뒤를 잇는 알튀세르, 라캉의 개념적 형식주의(conceptual formalism)이다. 프랑스 철학의 용어로 말하자면, 이러한 두 방향이 교차되는 곳은, 궁극적으로 개념을 개념 바깥으로 데려오는 존재로서의 주체에 관한 문제이다. 어떤 의미로는, 프로이트의 무의식 역시 같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의식 역시, 개념을 개념 밖으로 산출하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것들의 생명과 존재에 관한 것이다. 어떻게 개념을 그 바깥으로 산출할 수 있으며, 어떻게 어떤 것이 신체 바깥에서 생산될 수 있을까?  만일 이것이 중심적인 질문이라면, 우리는 어째서 철학이 정신분석학에게서 열정적으로 교환(어떤 주제나, 직관, 개념들을-역자)을 길어오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연히 공통의 목표가 다른 방법들로 추구될 때에는 일정한 불화가 있었다. 공모의 요소도 있었지만 적대적 요소 또한 존재했다(당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처럼). 프랑스 철학 안에서, 철학과 정신분석학 사이의 관계는 바로 경쟁과 공모, (상대방에 대한-역자)매혹과 적의감, 사랑과 증오 중 하나였다. 그 둘 사이의 드라마는 당연히 격렬했었고, 또 복잡했다.

세 가지의 키 텍스트(key text)가 우리에게 그에(철학과 정신분석학 사이의 드라마-역자) 관한 이해를 가져다 줄 것이다. 첫 번째로, 아마 이러한 공모와 경쟁 사이의 관계에 대한 가장 명확한 예는 아마도 바슐라르의 초기 작업인 1938년의『불의 정신분석(La psychanalyse du feu)』일 것이다. 바슐라르는 시와 꿈에 기반한 새로운 정신분석학, 물, 불, 공기, 그리고 땅의 네 원소들에 관한 정신분석학을 제안하였다. 누군가는 바슐라르가 프로이트적인 성 억압과 망상을, 더 크고 열려있는 범주로 대체시키고자 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두 번째 텍스트는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의 끝부분이다. 사르트르는, 그 자신의 견해로는, 프로이트의 '경험적' 정신분석학과 대조되는 그의 (암시되기로는) 정확한 이론적인 실존주의 모델로 새로운 정신분석학을 창조하였다. 사르트르는 무의식의 구조라는 프로이트의 콤플렉스를 그가 '근본적 선택'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대체하고자 하였다. 그에게 주체는 신경증적이고 사악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근본적인 프로젝트로 정의된다. 공모와 경쟁이 혼합된 양상에 관한 또다른 모범적인 예가 있다.

세 번째 텍스트는 들뢰즈와 가타리(Guattari)의『안티 오이디푸스(Anti-Oedipus)』제 4장이다. 여기서, 정신분석학은 들뢰즈가 분열증분석(schizoanalysis)이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 대체되어, 프로이트와 숨김없이 경쟁한다. 바슐라르에게서는, 억압보다는 환상이었고, 사르트르에게서는 콤플렉스보다는 (존재의-역자)계획이었다. 들뢰즈에게서는, 안티오이디푸스가 명백히 한 것처럼, 표현보다는 구성이다. 정신분석학에 대한 그의 가장 주요한 반대는, 정신분석은 그 스스로를 구성해야 할 때, 단지 무의식의 힘을 표현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분열증 분석의 작업인 구성으로, 프로이트적 표현을 대체한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최소한으로 잡더라도, 우리는 정신분석학을 자신들 스스로의 모델로 대체하려고 시도했던 세 명의 위대한 철학자들, 바슐라르, 사르트르, 들뢰즈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함의 길

마지막으로, 프랑스 철학의 시기는, 자신의 사유 프로그램에 의해 정의된다. 우리가 전후 프랑스 철학의 공통의 토양을, 그 자신의 작업이나 시스템, 심지어 그 개념이 아니라 자신의 지적 프로그램(계획)에 의해 정의하면 어떨까? 물론 철학자들은 매우 차이나는 상황들에 관계맺고 있으며, 이러한 프로그램들에 서로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공통적으로 인정된 중요한 질문을 갖는 곳에서는, 광대한 수단의 다양성을 통해 성취된, 철학적 시기, 텍스트, 사상가들이 항상 서있을 것이다. 우리는 전후 프랑스 철학자들의 영감으로 쓰여진 프로그램의 주요 포인트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려고 한다.

1. 더 이상 개념과 존재의 분리하지 않는다. 이제, 이 둘은 대립하지 않는다. 개념은 살아있는 것이고, 창조된 것이며, 어떤 사건이고, 존재와 분리되지 않는 것이다.

2. 근대성 안에 철학을 기입하는 것, 이것은 철학을 대학에서 빠져나오게 만들며, 일상적 삶 속에 유통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성적 근대, 예술적 근대, 사회적 근대. 철학은 이 모든 것들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3. 철학과 지식, 그리고 칸트적인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의 구분에 의거한 실천철학(philosophy of action) 사이의 분할을 폐기하는 것, 그리고 지식을, 심지어 과학적 지식조차도 실제로는 실용적인 것이라고 논증하기.

4. 철학을 정치철학이라는 우회로를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정치적 장에 위치시키기. 내가 '철학적 교전(philosophical militant)'이라고 부르는 것을 창안하기. 철학 자신의 현존과 존재 방식을 전투적으로 수행하는 작업을 철학 그 자신 안에 기입하기. 단순한 정치적 반성이 아닌, 실제로 정치적인 개입을 하기.

5. 주체의 문제를 반복하며, 회상적인 모델을 버리고, 그로 인해 정신분석학과 맞서는, 혹은 가능하다면 더 나은 것으로 만드는 관계를 형성하기.

6. 새로운 철학적 전시(exposition)의 스타일을 창조하기. 그리하여 문학과 경쟁하기. 본질적으로, 18세기의 철학자-작가들을 현대적으로 재창조하기.

이러한 것들은 프랑스 철학의 시기의 프로그램이며 또 높은 야망이다. 그것을 좀 더 확인하자면, 프랑스 철학의 가장 본질적인 욕망은(모든 정체성은 욕망의 정체성이다-저자), 철학을 새로운 주체를 위한 수단으로써의 글쓰기라는, 어떤 실천 형식으로 바꾸어놓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철학자에 관한 명상적이고 학자적인 이미지 역시 추방된다. 철학자를 현자나 사제의 대립항과 다른 어떤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오히려, 철학자는 작가-투사(writer-combatant)가 되기를, 주체의 예술가가 되기를, 창조의 연인이 되기를, 철학적 투사가 되기를 열망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이 시기를 관통하는 욕망의 이름들이다. 이러한 욕망은, 철학은 그 스스로의 이름으로 연기(act. 드라마의 은유와 연결시키면 될듯-역자)해야 한다는 욕망이다. 흔히 드골의 것으로 간주되곤 하는 앙드레 말로의, 『Les chenes qu'on abat』(번역 못함ㅠㅠ)에서의 경구를 상기해 보자. '위대함은 아무도 모르는 어떤 것을 향하는 길이다(Greatness is a road toward something that one does not know)'. 근본적으로,  지혜와 명상을 넘어선 철학적 실천과 간섭을 선택해야 했던 20세기 하반기의 프랑스 철학의 시기는, 자신이 이미 알고 있었던 목표로의 길을 선호하게 되었다. 오늘날 비난받는 것은 지혜 없는 철학이다.

그러나 프랑스 철학의 시기는 위대함보다는 행복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더욱 흥미롭다. 우리는 완전히 진귀하고 확실히 문제적인 것을 원한다. 우리는 개념의 모험가가 되기를 욕망한다. 우리는 삶과 개념 사이의 확실한 분리를 원하지 않을뿐더러, 이데아나 규범에 종속된 존재 또한 원하지 않는다. 대신에, 우리는 개념이 그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하는 종착지로의 여행을 선호한다. 모험의 시대는, 불행하게도 일반적으로 질서의 시대로 다가가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는 아마도 이 철학의 해적적 측면, 혹은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목적 측면에 의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념의 모험'은 우리를 결합하는 형식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20세기 프랑스에서 궁극적으로 철학적 모험의 시기가 나타났다고 주장할 것이다. 

역주1.  내재성은 들뢰즈의 개념인데, 들뢰즈가 사용하는 용어는  immanence이다. 하지만 interior을 '내적'이라는 불교적 색채를 지닌 단어로 바꾼다면 오해의 소지가 크고 또 내부적이라는 단어도 어색하기 때문에 일단은 내재적이라는 표현을 쓰기로 한다 
 
 
http://negative.egloos.com/1746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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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랭 바디우, 알튀세르 - 주체 없는 주체성 1 | 사고들 | 2008년 04월 24일 02:58
 
A. Badiou, Althusser: Subjectivity without a Subject,

In Metapolitics, Verso, 2005, pp. 58-67.
 
 
알튀세르, 주체 없는 주체성
 
알랭 바디우
 
 
우리가 괴상한 영혼의 수집가들에게 던져진 단순한 병리적 사례로만 알튀세르를 취급하는 수많은 악의적 구경꾼들을 제쳐둔다면, 내 생각에 그의 이론적 작업을 연구하는데 다음 두 가지 관념들이 지배하는 것 같으며, 또한 그러한 연구들은 모종의 국제적 열정을 ― 이것은 좋은 징표이다 ― 가지고 수행되어 왔지만 여전히 비틀거리는 것 같다.

첫째는 알튀세르를 맑스와의 관계에서 위치 짓는 것이다.

둘째는 그의 작업에서 주체의 이론을 발견하려는 노력이다.

첫 번째 요점은 내 생각에, 매우 단순화하자면, 맑스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내가 이미 언급했듯이, 실뱅 라자뤼스는 맑스와 레닌 사이에는 연속성과 발전보다는 단절과 구성이 있음을 설정하였다. 마찬가지로, 레닌과 스탈린 사이에도, 마오와 스탈린 사이에도 단절이 있다. 알튀세르는 이와 다른 또 다른 단절을 묘사하려 하였다. 여기에 사태를 더욱 복잡하게 하는 것은 이러한 모든 단절들 각각이 상이한 종류라는 것이다. 일단 맑스주의가 정치적 개별성들의 역사를 되돌아본다면, 반드시 그래야만 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은 ‘맑스주의’를 절대 불능(해(解)가 없는-역자) 집합의 (빈) 이름으로 만든다.

게다가, 한 때 알튀세르가 제창했던 ‘맑스주의 철학’이라는 기획을 그가 포기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알튀세르는 {레닌과 철학}1)에서 맑스와 레닌은 새로운 철학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철학의 새로운 실천을 시작했으며, 이것은 완전히 상이한 것이며 정치와 관련된 것임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만약에 알튀세르의 작업을 맑스주의의 한 ‘사례’나 맑스주의 철학의 (불완전한) 증거로 생각한다면, 우리가 알튀세르의 작업을 통과하기란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알튀세르의 작업을 통과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그의 과업과 그의 전적으로 특수한 목표들의 개별성을 고려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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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바디우의 <<메타정치 소론>> 3장에 실린 글이며, 바디우 전공자인 서용순 박사의 번역으로 근간(여름 쯤?)할 예정으로 알 고 있습니다. 이 책의 2장은 실뱅 라자뤼스에 대한 글인데, <<이름의 인류학>>의 서문에 번역되어 실려 있습니다. 여하튼 이 글은 바디우와 알튀세르의 관계 내지 해석을 볼 수 있는 짧은 글입니다. 오래 전에 세미나 용으로 대충 번역했던 것을 컴퓨터를 뒤지다가 발견했네요. 2-3번에 나눠서 올리 겠습니다.

1) Louis Althusser, Lenin and Philosophy and Other Essays, trans. Ben Brewster. London: NLB,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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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첫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 어떤 인식 장소로부터 ― 사람들은 알튀세르의 개별성을 이해할 수 있는가? 어떻게 이러한 이해가 선험적인 것, 즉 맑스주의라는 선험적인 것에 의존하지 하지 않고 가능하겠는가?

두 번째 요점에 대한, 나의 평결은 단호하다. 평결은, 알튀세르에게 주체에 대한 어떠한 이론도 없으며, 결코 있었던 적도 없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모든 이론은 개념들을 수단으로 행해진다. 하지만 ‘주체’는 개념이 아니다. 이 테마는 「헤겔에 대한 맑스의 관계」에서 아주 명확하게 발전되었다. 예를 들어: ‘“과정(process)”이란 개념(concept)은 과학적이며, “주체”라는 통념(notion)은 이데올로기적이다2).’ ‘주체’는 개념의 이름이 아니라, 통념의 이름, 즉, 어떤 존재하지 않는 것(an inexistence/비존재)에 대한 표식이다. 주체는 없으며, 따라서 단지 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이 문제에 대해 알튀세르를 라캉으로 보완하려는 매우 잦은 시도는, 이러한 시도는 정신분석에 관한 알튀세르의 몇몇 언급으로부터 논거를 대려 한다, 내가 보기에 쓸모없는 일이다. 라깡에게는 주체(the subject)에 관한 이론적 개념이 있으며, 이것은 심지어 존재론적 지위를 가진다. 라깡에게서 공백과 ‘대상 a(objet petit a)’의 쌍은 주체의 존재를 위한 것이다. 알튀세르에게 그와 같은 개념 쌍은 없는데, 알튀세르에 따르면 대상(the object)은 심지어 주체와 다름없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대상=주체의 거울 반영’3)이라고 언급한다. 따라서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비존재)의 이미지이다. 주체 없는 과정은 꼭 대상 없는 과정만큼 효과적으로 기능한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두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다. 만약 주체가 없다면, 만약 오직 주체 없는 과정들만 있을 뿐이라면, 어떻게 우리는 역사유물론의 형식 내에서 정치를, 주체 없는 과정들의 과학으로부터, 다시 말해, 역사의 과학으로부터 식별할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는 정치를 (역사유물론의) (그) 과학으로부터, 더 명확하게 표현하면, 과학을 이데올로기로 환원시키지 않은 채로 식별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 정치가 과학도 이데올로기도 아니라는 점은 알튀세르가 끊임없이 단언했던 확신이다. 1965년에, 그는 정치적 실천을 이데올로기적 실천과 과학적 실천으로부터 식별하였다. 1968년에, 그는 모든 과정은 ‘관계 속’에 있다고 했으며, 생산관계를 의미하는 그 관계는, 또한 다른 관계들, 즉 정치적 관계 또는 이데올로기적 관계를 서로 각각 식별하였다.
 
또한, 알튀세르는 오직 ‘혁명적 계급투쟁의 전위’만이 관계 속의 과정에 대한 사고를 실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진정한 과정의 사고는 정치적 실천에 개입한 사람들에 의해서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전체적으로 통합해서 이해해야만 하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정치는 과학과 이데올로기 모두와 식별된다. 둘째, 주체라는 통념은 이러한 식별에 근거가 될 수 없다. 셋째, ‘관계 속의 과정’이라는 관념(notion)을 사고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정치를 통해서 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다. 알튀세르에 대한 모든 ‘사고’는 두 가지 질문을 다룸으로써 시작되어야만 한다. 첫째, ‘맑스주의’라는 텅 빈 이름의 사례와 명확히 구별되는, 알튀세르 과업의 개별성을 질문해야 한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 개별성 내에서 제기되는, 주체 없는 과정으로서 정치에 관한 질문이며, 곧 오직 정치적 과정만이, 정치적 과정의 전위적 차원 내에서, 주체 없는 과정이 일반적으로 무엇인지에 관한 사고를 가능하게 함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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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Louis Althusser, ‘Marx's Relation to Hegel’, in Politics and History. Mantesquieu, Rousseau, Hegel, Marx, trans. Ben Brewster. London: NLB, 1972, p. 185

3) Ibid.
 
 
 
 
알랭 바디우, 알튀세르 - 주체 없는 주체성 2 | 사고들 | 2008년 04월 25일 02:08
 

이러한 두 가지 전제조건에 대한 몇 가지 지침을 제공해보자.

알튀세르가 발언하는 장소는 철학이다. 모든 철학처럼, 알튀세르의 목표는 철학 자체의 정의규정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알튀세르가 철학에 대한 (최소한) 두 가지의 정의를 내렸음을 알고 있다.

첫 번째는 ‘이론적 실천의 이론’4)이다. 이 정의는 사고 과정에 대한 형식 종합으로서 여전히 변증법적 유물론의 범위 내에 머물고 있다.

두 번째는 ‘과학들에서 계급투쟁에 대한 재현’5) 이다. 즉, 과학과 마주하고 있는, 정치에 대한 재현이다. 이러한 정의는, 철학적 활동을 위한 근본적 조건이 철학의 정치에 대한 의존, 정치적 해명에 대한 의존임을 의미한다. 이에 따를 때, 알튀세르의 기획은 철학적 단절이라는 방패아래서 스탈린 이후 정치의 성격을 사고하려는 시도가 된다.

왜 이러한 기획을 지지할 수 있는가? 정확히 말해, 철학에서 발생하는 것은 철학의 정치적 조건에 원천적으로 결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철학을, 그 자체 내에서, 일종의 자신의 정치적 조건을 기록하고 있는 장치로 취급할 수 있다. 특히, 새로운 철학적 가능성은 자신을 정치적 조건의 실재 운동에 대한 철학 내적인 지표로 ― 비록 복잡한 ‘비틀림’을 대가로 하지만 ― 해독되도록 할 수 있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그러한 희망이, 새로운 철학적 활동이 스탈린 이후 정치 아래에서 사고가능하게 되었던 과정에서 입증하려 했던 것이었다.

이 기획의 충분한 뉘앙스를 이해하려면, 이것을 정치철학의 기획과 혼동하지 말아야 하며, 이러한 측면에서 알튀세르가 일으킨 단절은, 우리 자신의 메타정치(metapolitics)를 인도하는 문제제기를 예견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알튀세르는 철학이 스탈린 이후 정치가 사고되는 장소가 될 수 있다 주장을 신랄하게 기각했다. 실로 오직 정치적 전위만이 정치적 새로움을 효과적으로 사고한다. (단지-역자) 철학이 할 수 있는 일은,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철학적 가능성들을 표명하면서, (라자뤼스에 따르면) 정치 자신의 실천에 토대하여 발명되는 정치에 대한 새로운 ‘사고가능성’의 징표(sign)를 기록하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철학이 직접적으로 정치를 사고한다고 주장하는 ― 따라서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 것을 다시 명명하려는 것 ― 사람들은 누구나 철학을 단순히 국가의 객관적 실재(objectivity)로 종속시킴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철학이 정치에서 발생하는 일을 기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정확히 철학이 정치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 실재 정치의 사건들(알튀세르의 용어로 계급투쟁의 사건들)에 자신이 조건 지어짐을 발견하는 사고의 독특한(sui generis) 활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의 지진기록계 기능을 사고 가능한 정치라는 실재 운동과 마주하게 함으로써, 알튀세르는 철학이 전제할 필요가 있는 매우 특별한 배치를 구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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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Ibid., p. 186.
5) Louis Althusser, For Marx, Ben Brewster. London: NLB, 1969; Althusser and Etienne Balibar, Reading Capital, trans. Ben Brewster. London: NLB, 1970.
 

• 철학은 이론이 아니며, 분리하는 활동, 곧 사고 속의 식별에 관한 사고이다. 따라서 철학은 결코 정치를 이론화 할 수 없다. 하지만 철학은 새로운 구획선을 그릴 수 있고, 즉 새로운 식별을 사고할 수 있으며, 이것은 정치적 조건의 ‘변경(shifting)’을 입증한다.

• 철학은 대상을 가지지 않는다. 특히, ‘정치적’ 대상은 철학에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은 행동의 효과들이 순전히 내재적인 종류의 행동이다. 바로 행동을 통한(in actu) 새로운 가능성의 발견이야 말로 철학을 자신의 새로운 정치적 조건으로 기울인다.

• 철학은 그 자신의 역사가 없기 때문에, 역사와 정치(따라서 과학과 정치)를 혼동하는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역자) 철학은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비-역사주의적 인식을 특권화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측면에서 볼 때, 알튀세르의 철학적 개별성은 매우 뚜렷하지만, 아직도 결코 그것의 효과들을 완벽히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 반드시 모든 참된 현대 철학은, (앞서-역자) 알튀세르가 정의한 철학의 개별적 테제들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

알튀세르의 기획이 철학적 활동 내에 있는 정치의 내재적 효과들을 통해 정치를 정의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러한 기획의 첫 번째 단계는 본질적으로 분리(separation)의 질서에 속한다. 여기서 (알튀세르의-역자) 어떻게 과업은 정치가 그 자신을 이데올로기와 과학으로부터 구별하는가를 증명하는 것이며, 그리고 그것은 철학적 인물이 수행하는 행동(즉, 테제들)을 통해서 증명하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과학을 자신의 대상들에 대한 개념적 구성으로 특징짓는다. 만약 일반적인 의미에서 ‘대상’이 (주체라는 비존재와 상관적인) 이데올로기적 통념이라면, 반면 또 다른 의미에서 ‘대상’(이번에는, 어떤 주체가 부재하는 가운데, ‘대상성(objectivity)’과 상관적인)은 바로 과학적 실천의 핵심을 가리킨다. 과학은 주체가 없지만 대상을 가지는 과정이며, 따라서 대상성은 과학의 특정한 규범이다. 정치를 과학과 구별하는 것은 무엇보다 정치는, 철학과 마찬가지로, 대상을 가지지 않고 대상성의 규범에 종속되지 않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정치의 비-대상적 규범을 ‘당파성’, ‘(계급)위치’ 또는 ‘(혁명적) 전위 활동’ 이란 표현들로 지칭했다.

(부르주아지) 이데올로기는 주체라는 통념으로 특징지어지며, 이데올로기의 모체(matrix)는 법률이고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에 종속시킨다. 이것이 ‘주체의 호명’ 테제이다. 이데올로기는 ―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은 장치들에 의해 제공된다 ― 국가주의의 통념이며, 따라서 정치의 통념이 아님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알튀세르적 의미에서, 주체는 국가의 기능이다. 따라서, 혁명적 정치는 국가의 기능일 수 없기 때문에, 결코 정치적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알랭 바디우, 알튀세르 - 주체 없는 주체성 3 | 사고들 | 2008년 04월 26일 01:24
 
그렇다면, 모든 문제는 다음과 같다. 어떻게 우리가 대상과 대상성(정치는 과학이 아니다)뿐만 아니라 주체(정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며, 국가의 기능도 아니다)로부터 벗어나 있는, 정치의 개별적 공간을 명명할 수 있겠는가? 실천에 입각해서, 또한 분명히 불완전한 방식으로, 알튀세르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 질문에 접근했다.
 
1. ‘계급’과 ‘계급투쟁’은 정치의 유동하는(fleeting) 정체성에 끊임없이 ‘말안장을 씌우는’ 기표들이다. 이 기표들은 정치의 이름들이다. ‘투쟁’이란 단어는 정치적 대상이란 존재하지 않음을(투쟁은 대상이 아니다) 가리키며, ‘계급’이란 단어는 주체 역시 존재하지 않음을(알튀세르는 역사의 영역에서 프롤레타리아트 주체에 관한 어떠한 관념도 반대했다) 가리킨다. 이러한 명목적 동일시(nominal identification)(계급투쟁이란 ‘기표’가 ‘투쟁’과 ‘계급’의 결합, 곧 대상도 없고 주체도 없는 정치를 가리키는 표현임을 의미 한다-역자)는 엄밀히 말해 임시적이고, 심지어 의심스럽기도 한데, 라자뤼스가 설득력 있게 진전시킨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계급’이란 단어는 순환하며, 역사의 과학(역사과학에 의하면 계급은 대상의 구성에 관련된 개념이다)과 정치 간에 모호성을 도입한다.
 
2. ‘당파성’, ‘선택’, ‘결정’ 또는 ‘혁명적 전위’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여, 알튀세르는 정치에 몰입하는 것은 온전하고 진실된 주관적 질서(the subjective order)임을 가리킨다(indicates).

이제 알튀세르가 우리들을 이끌고 가는 지점은, 알튀세르 자신이 그 지점을 깨달았다고 말할 수 없을지라도, 다음과 같다. 과연 주체 없는 주체성(subjectivity without a subject)을 사고할 수 있는가? 나아가, 자신의 형상이 더 이상 (과학적) 대상이 아닌 주체 없는 주체성을 사고할 수 있는가? 소위 알튀세르의 토픽적 작업 틀 전체가 지향하는 바는 정치의 철학-내 표지로서 주체 없는 주체성이라는 바로 이러한 수수께끼인 것이다.
 
‘이미 모두 그곳에 있다’는 독트린에 따를 때, 토픽적 구조화는 세 가지 핵심 요점을 드러낸다.
 
1. 경제에 의한 물질적 결정, 이것은 강력한 안정성의 원리를 제공한다. 사실상, 경제는 대상성의 형상이며, 대상의 장소이고, 따라서 과학의 장소이다.
 
2. 상상적 종합, 이것은 개인들에 의해 지탱되며, 이들은 명목적인 비존재이다. 이것은 주체의 장소이며, 이데올로기의 장소이다. 그것은 또한 국가의 조작적 범위 내에서, 국가가 개별적 육체들을 ‘양도(take)’ 받는 한에서, 국가장치들의 기능적(대개 객관적이지 않은) 존재 내에서 국가의 장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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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건적 중층결정들, 파국들, 혁명들, 발명들, 비-주요 모순의 주요-[모순]되기. 여기에 당파성의 실재 재료(stuff), 전위의 기회, 선택의 계기들이 놓여 있다. 중층결정은 가능성을 의제에 올리지만, 이에 반해 경제적 장소(대상성)는 질서 잡힌 안정성의 의제이며, 그리고 국가주의적 위치(이데올로기적 주체성)는 개인을 ‘기능’으로 만든다. 중층결정은 진정한(in truth) 정치적 장소이다. 또한 비록 중층결정이 어떠한 주체-효과(그런 효과들은 국가주의적이다)도 모르고, 어떤한 대상(그런 대상들은 오직 과학의 영역에서만 존재한다)도 수정하거나 구성하지 못하지만, 중층결정은 주관적 영역(선택, 당파성, 전위)에 귀속됨을 반드시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체 또는 대상 없는 ‘주체성’을 이해해야 하는가? 그것은 전위의 물질적 형식 속에 있는 동질적인 사고의 과정이며, (과학적) 대상성을 통해 결정되지 않으며, (이데올로기적) 주체-효과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다. 중층결정의 장소에서, 이러한 과정은 가능성 쪽으로 기울여지며, 따라서 당파성, 즉 예단(a prescription)에 조응하는 것이다. 이러한 당파성, 예단은 경제의 객관적 질서 안에서나 주체의 국가적 질서 안에서는 아무런 보장을 받지 못하지만, 상황 속에서 실재의 경로를 찾아갈 수 있게 한다.

알튀세르는 이 장소를, 최근에 라자뤼스가 시도한 것처럼, 철학적 우회를 포기하고 직접적인(철학의-역자) 조건에 접근함으로써 사고하지 않았다. 반면 그는 사변적 지형학을 추구했는데, 이것은 맑스와 엥겔스의 전망을 확대하는 것, 알튀세르의 표현대로 ‘충당하는(fulfilling)’ 것이며, 그것은 이러한 전망이 가능하도록 사고하는 것이다. 직접적으로가 아니라(실제로 알튀세르 자신은 정치적으로 활동적이지 않았다), 철학적 등재(registration)로부터 추론된 영역에서 말이다.

한 동안 그것은 매우 중요한 기획이었고, 여전히 현 시기에 대한 우리의 지적 과업에 시사점을 주고 있다. 이러한 경탄할만한 노력은, 여전히 명명되지 않은(주체 없는 주체성을 사고하는 것) 노력은, 루이 알튀세르가 우리에게 최상의 존경을 받을 충분한 가치가 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모든 정치철학 외부에서, 정치적으로 조건 지어진 새로운 철학적 효과를 삶에 도입하려는 이러한 어려운 과업에 접근하도록 해준 사람이 바로 알튀세르이기 때문이다. 또한 정치의 추상적이고 궁극적으로 노예화된 전망과 권리의 목적론적 윤리학을 결부시키는, 결속(the bond), 혹은 공동체(being-together)의 휴머니즘적 전망을 우리가 거부하게된 것도 알튀세르가 이끌었다. 나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정치적 결속’과 민주주의 각각에 관한 통념을 다루는 다음 두 장의 메타정치적 연구를 알튀세르에게 헌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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