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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To. 들뢰즈안 김재인] 부정성을 간직한 탈주fuite 번역은 어떨지요..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6-11-11 22:48 조회(8482)
   트랙백 주소 : http://freeview.org/bbs/tb.php/e001/38 


들뢰즈 번역에 있어 김재인이 이진경보다는 꼼꼼하다고 하다는 점에는 동의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fuite의 단어 채택만큼은 도주보다 '탈주'가 좀더 낫다고 여겨진다..
아래의 글은 2004년도에 김재인의 홈피(http://armdown.net) 게시판에 올렸던 그러한 얘기들이다..
물론 직접 들어가서 확인해봐도 좋겠다..
 

 
[제안] 부정성을 간직한 탈주fuite 번역은 어떨지요..
미선이  2004-06-10 03:27:43, 조회 : 497, 추천 : 15


[제안] 그렇다면 부정성을 간직한 탈주 번역은 어떨까요?



개인적인 고백하나 한다면, 나 자신이 들뢰즈에 관심하면서도 이진경씨의 ‘노마디즘’을 굳이 사지도 들여다보지도 않았던 이유는 예전부터 이진경씨의 들뢰즈 이해에서 보여지는 들뢰즈가 정말 너무나도 허술한 사상가라고 느껴졌기 때문입니다(여기에는 이정우씨를 포함한 몇몇 국내 들뢰즈안들도 포함). 정말 이것이 세계적 철학자라는 들뢰즈인가 할 정도로 말이죠. 물론 이것은 지금의 이진경-김재인과 논쟁과 직접적 관련은 없고 다른 차원의 논의이긴 하지만, 암튼 이들의 글에서는 그러한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었기에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그래서인지 이번의 김재인-이진경 논쟁을 저로서는 상당히 유익하다고 보는데, 한국사회는 대체로 논리적 차원인격적 차원을 혼용할 때가 많아 어떤 경우에는 논자의 분명한 논리적 공박을 오히려 어이없게도 '인신공격'이라고 매도해버리기 일쑤인데, 이는 엄밀하게 따지면 논쟁의 핵심적 핀트를 흐리는 것이며 비겁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것이 정말로 구체적이고도 합당한 근거에 기반한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인신공격도 폭력도 아닌 <학문의 건강한 논의> 그 자체로서 수용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럴 경우 <논쟁>만큼 우리네 학문을 비약적으로 발달시키는 기폭제도 없다고 보는데.. 그럼 각설이 길었고 본론을 얘기해보죠..

도주냐 탈주냐 얘기가 많은데 제 개인적 견해를 말한다면 이렇게 제안하고 싶습니다.. fuite를 탈주로 하되 그 진정성에는 '부정성을 담고 있는 탈주'로 모아지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이 점은 김재인씨 스스로도 말하길 이진경씨가 fuite를 탈주라고 번역했기 때문에 공격한 것이 아니라 이진경씨가 번역한 ‘탈주’라는 용어 자체가 들뢰즈-가타리가 애초에 말했던 부정성을 탈각시킨 탈주개념이었기 때문에 비판한 것이라고 했었습니다..(문학동네 p.450-451)

만일 김재인씨의 말대로 이진경씨의 탈주 개념이 들-가의 본래 개념에 있는 부정성을 탈각시킨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명백하게 이진경씨의 잘못일 것입니다.. (실은 제가 보기에도 김재인씨의 문제제기처럼 이진경씨의 탈주 개념은 오히려 탈주와 도주를 대비시키고 있다는 점에서도(p.455) 그의 탈주에서 부정성을 탈각시킨 측면이 있기에 작금의 김재인씨의 문제제기는 온당하다고 보며, 만약 이진경씨의 탈주가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그에 따른 근거를 제시하면 김재인씨에 대한 적절한 반론이 될 것이라고 봄..) 어쨌든 저는 바로 이러한 점에서 부정성을 탈각시키지 않는 탈주 번역은 괜찮지 않을까하고 제안하는 것입니다.. 김재인씨의 글에서도 그것이 분명하게 설명된 것이라면 그 정도는 뭐 괜찮다고 보는 것 같던데..

이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개인적으로는 fuite를 ‘도주’보다 ‘탈주’라는 번역으로서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김재인씨의 논의에서도 보이듯이 fuite는 결국 두 가지로 나뉘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살한 fuite’와 ‘살아남은 fuite’.. 이것은 니체가 ‘수동적 니힐리즘’과 ‘능동적 니힐리즘’ 그 두 가지로 나눠봤던 맥락과 상응한다고 볼 수 있겠죠. 이를 들뢰즈는 ‘미완의 니힐리즘’과 ‘완성된 니힐리즘’으로 봤듯이(453).. 이 때 들-가가 추구했던 fuite는 궁극적으로는 후자라고 생각됩니다.. 다시 말해 '부정성을 극복한 fuite'는 분명하게도 긍정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fuite는 니힐리즘의 극한에서 다시 살아남은 fuite요 김재인씨 말대로 영원회귀의 시험을 통과한 fuite일 것입니다..(450)

그런데 언젠가 김재인씨는 스스로 말하길 탈주라는 번역어에서는 자꾸 엑소더스 ‘대탈주’가 떠올려진다고 해서 도무지 탈주라고 번역하기보다 도주라고 써야하지 않겠나라고 쓴 것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사실이 그렇다면 이것은 매우 근거가 미약한 주관적 해석이 아닐런지요.. 왜냐하면 우리가 탈주라는 번역어에서 죄다 엑소더스 대탈주를 떠올리진 않으니까요..

또한 김재인씨가 도주를 선호하는 중요한 근거로서 든 것은, fuite가 동물학과 관련된 것이라고 하여 탈주보다 도주가 맞다고 얘기합니다.. 물론 언급한 바대로 실제로도 들-가에서의 fuite는 분명하게 동물학적 기원과 관련하고 있지요..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는 매우 미묘한 어감(실은 ‘어감’이라는 것도 이미 인간중심적 발상을 의미할테죠)의 차이 정도라고 생각되는데, ‘도주’와 ‘탈주’라는 용어에서 느껴지는 어감에서 본다면, 그것은 분명 ‘도주’라는 단어가 더 동물학과 관련된 것이라고 저 역시 느껴지는 바입니다.. 적어도 이 점에서는 저역시 김재인씨의 의견에 충분히 공감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소수자라는 동물-되기에서 본다면 동물에서도 모든 fuite가 부정성만을 간직한 실패한 것이라고 볼 근거는 없을 것입니다.. 그럴 경우 동물학과 관련해서도 이들 역시 ‘탈주선’이라고 옮기는 것 정도는 오히려 소수자에 대한 이해를 더욱 넓힌다고도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물론 이 때 제가 말씀드리는 ‘탈주’는 어디까지나 작금의 이진경씨와 달리 내부적 위험성과 부정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의 탈주 개념입니다..

게다가 수동성과 능동성에서도 본다고 할 때도, 솔직히 저는 '도주'라는 용어에서는 내부적 위험과 부정성은 느껴지지만 그 반대의 경우, 즉 능동성은 거의 희석되거나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는 역효과의 경우죠.. 예컨대, 들-가가 ‘천 개의 고원’(p.389)에서 명시했던 “…동물에게든 인간에게든 ‘도주선’보다 능동적인 것은 없다”라는 문구에서 볼 때도 이를 ‘도주선’보다 ‘탈주선’으로 옮길 때 그 문맥이 더 와닿지 않냐는 것이죠.. 즉, 동물이라고 해서 탈주하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요..

끝으로 하나 더 말씀드린다면, 제 자신이 '도주'보다 '탈주'라는 번역을 제안하는 이유는 fuite가 내부적 부정성을 간직한 것이며 비열한 것이었다고 해도 결국은 들뢰즈가 추구하는 fuite는 이를 극복한 것으로서의 '니힐리즘의 극한에 있는 fuite'일 것이며, 이런 점에서 김재인씨 역시 들뢰즈라는 철학자를 긍정과 창조의 철학자라고 보는 전반적 평가에서 볼 때도 '탈주'라는 번역어는 솔직히 포기하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제가 지금 제안하는 탈주 개념은 이진경씨의 탈주와도 다르다는 점을 염두에 두었으면 하네요.. 즉, 김재인씨의 비판대로 이진경의 탈주에는 도무지 내부적 위험성과 부정성이라곤 없다고 볼 경우 말이죠.. )

결국 탈주를 그렇게 본다면 도주냐 탈주냐 하는 작금의 서로 간의 논쟁에서는 어느 정도 합의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그럴 경우 김재인씨는 내용면에서는 이진경씨를 공략한 셈이고, 이진경씨는 그저 형식면에서는 탈주를 계속 쓰는 것이니 체면 유지(?) 정도랄까.. 물론 두 사람의 논쟁이 아직 끝난 것은 아닐테고 더 지켜봐야 할 테지만...훔...

어떻든 저로서는 '탈주'라는 용어가 계속 쓰여졌으면 싶은데, 김재인씨도 이 정도쯤은 책에서도 말씀하신대로 양보하실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그래서 행여 앞으로 김재인씨께서 fuite를 번역할 경우엔 그래도 ‘도주’보다는 ‘탈주’라고 써 주시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바램에서 글을 올려봤습니다.. (물론 한 번 뱉어낸 번역어를 다시 거두긴 힘들테지만, 뜻은 양보하지 못할지언정 폭넓은 마음으로서 '탈주'라고 옮겨주심 안되남..핫핫 ^.^! )

이외 또 다른 문제들은 담에 또 기회 되면 얘기해보죠..


김재인 2004/06/13 11:01:53
 
 님의 의견은 잘 들었습니다. 그러나 님께서도 수긍하시듯이, 한국에서 당분간 '탈주'는 이진경 씨의 해석이 주도하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탈각한) 뜻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게다가 '탈주범 신창원'이라는 표현에서도 보았듯이 탈주는 도주에 비해 확실히 긍정적입니다. 부정의 끝에서 되찾는 긍정, 그 의미를 살리려면 부정적인 뉘앙스밖에 없는 듯 보이는 도주가 더 니체적이고 들뢰즈적이어서 적합하다고 봅니다. 끝으로 이진경 씨는 님의 절충적인 제안을 별로 절충적이라 보지 않을 것 같습니다.
미선이 2004/06/13 16:42:28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부정성이 깃든 탈주로 못박자는 것이며, 이는 거간의 이진경씨의 탈주 개념이 부정성이 탈각된 잘못 기술된 것이었음을 폭로하는 일과 병행될테져.. 저는 여기에 김재인씨의 주도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제안한 것뿐입니다.. 물론 김재인씨의 뜻이 끝까지 '도주'를 쓰겠다고 하신다면 할 수 없지만요.. ‘탈주’가 ‘도주’에 비해 긍정성이 더 배여있다는 점은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탈주’에는 그나마 일말의 부정성도 충분히 느껴지는 바지만, 그에 반해 '도주'에서는 도무지 긍정성이라고는 느껴지지 않고 그냥 부정성에서만 머무는 느낌이죠.. 즉, 소극적 수동적 니힐리즘으로서의 fuite일뿐이라는 겁니다,. 분명 이것만이 니체적 들뢰즈적이라고는 생각지 않지요.. 끝으로 윗글은 이진경씨한테-그가 절충적이라고 볼 것이라는 점을-기대하고서 쓴 글은 아니고, 실은 김재인씨 한테만 드린 글이었습니다..
바까본 2004/06/15 04:37:22
 혹시 논의에 참고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본에서는 일찍이 1980년대 초에 들뢰즈를 소개한 아사다 아끼라가 "도주론"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쓴 바 있습니다. 이 책은 한국에서도 번역이 되었는데, 출판사명은 기억이 안 나는군요. 아사다는 이 책 이외에 "구조와 힘" 등,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포스트 구조주의 사상'에 대한 간명한 소개를 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했습니다. 아사다 책의 영향 때문인지, (제가 아는 범위내에서는) 일본에서는 '탈주'보다는 '도주'라는 용어를 더 선호하는 듯 한데, 덧붙여 지적하자면 요즈음은 들뢰즈의 사상을 거론할 때, '도주'('탈주')론 보다는 다른 맥락에서 활발히 논의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아사다가 '도주론'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때의, 그 의도를 알아보면, 위 논의에 대해 약간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미선이 2004/06/18 04:46:57
 일본어 번역이라고 해서 꼭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닐테지만 님의 말씀대로 저 역시 참조할 필요는 분명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 책에는 그 자신이 왜 탈주가 아닌 도주를 쓰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나오지 않더군요.. 아마도 그런 논의 자체가 거의 없는 듯 싶은데.. 게다가 그 저서는 제목은 ‘도주론’인데 정작 책내용에는 ‘도주’가 아닌 ‘탈주’라고 온갖 쓰여 있었습니다.. 이것이 아시다의 원서가 그런 건지 아니면 역자가 제목만 도주론으로 그대로 따르고 내용은 탈주라고 옮긴 것인지는 불명확합니다.. 그에 관한 설명도 없었으니까요.. 제 생각에는 도주(逃走)와 탈주(脫走)에 대한 어감 자체가 같은 단어라고 해도 한글문화권 사람들의 의식과 일어문화권 사람들의 의식에서 받는 느낌이 서로 약간 다르기 때문에 저들에게는 별로 문제시되지 않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어쨌든 윗 글은 제가 ‘부정성을 담은 탈주’가 가장 좋지 않겠나 싶어 그냥 가볍게 제안해본 정도이니 이 정도로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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