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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펌] 타자의 현현, 윤리의 지평(레비나스 사상 소개서)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6-10-08 21:35 조회(9433)
   트랙백 주소 : http://freeview.org/bbs/tb.php/e001/9 


에큐에 올려져 있던 레비나스 연구서에 대한 소개다.
 
=========================================================================
 
 
 
 
 
타자의 현현, 윤리의 지평
『타자의 얼굴-레비나스의 철학』, 강영안 지음, 문학과 지성, 2006.
 

벼리 nomadia@naver.com

 
 
   
레비나스가 자유보다 책임을 강조한 이유는 애초에 서양철학의 전체성에 대한 비판이 있었기 때문이다. 타인의 얼굴을 짓밟고 선 자유는 전쟁과 살육만을 가져온다.
전체성은 서양철학의 비밀이다. 플라톤의 이데아가 현상계의 범형이고, 그 제작의 원동력이었던 이래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거쳐 칸트에 이르기까지 이들 철학자들이 한결같이 원했던 것은 개념화된 추상과 표상 아래 세계와 인간을 환원하는 것이었다. 실재와 사유 즉 진리성에 대한 회의가 창궐할 때조차 이러한 기본적인 가정은 변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한 철학체계의 일관성과 개념적 정합성이 관건으로 떠올랐고 그 외의 것은 부수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다. 이를테면 개념과 정의(horismos, definition)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은 일종의 환각(phantasma, simulacre)으로 아예 철학의 대상에서 배제되었으며(Plato, Aristotle), 일상성(Alltäglichkeit)이란 주제는 <현존재의 가장 가까운 존재양식>으로 인정됨에도 불구하고 본래적인 것이 될 수 없었다(Heidegger). 아우슈비츠와 굴락, 수용소와 대량학살이라는 20세기의 끔찍한 아이콘은 이러한 배제와 통제 그리고 그 배후에 숨은 전체성이라는 이념의 참혹한 결과다.
 
이 책의 저자 강영안은 레비나스를 이 서양철학의 치부에 과감히 메스를 갖다 댄 인물로 소개한다. <레비나스는 유럽의 전체주의는 유럽 철학 전체가 빚어낸 파국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 전체주의 속에서는 한 개체의 고유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레비나스는, 서양 철학은 대체로 질적 다양성 또는 다원성을 수적 다양성으로 대치하고 이것을 또다시 일원성 또는 단일성으로 환원하는 철학이었다고 본다>(30-1).
 
이러한 환원은 개체의 고유성 즉 ‘다름(l'altérité)’을 희생시킨다. 개인의 차원에서 다름은 인격의 고유성으로 드러나며, 주체의 참된 자리는 전체성이라는 배제와 환원의 메커니즘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환대와 책임이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주체는 여기서 기반적인 ‘자아’가 아니라 ‘타자’에 매개된 결과다.
 
다시 말해 레비나스의 철학은 전체성을 떠난 주체가 진정한 주체의 모습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때 타자는 기술적 조작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최대한의 경의를 가지고 대해야 할 윤리적 무한자에 가깝다. 게다가 레비나스는 이 타자를 부자도 권력자도 아니며 <가난한자, 과부, 고아>라고 분명히 못 박는다. <헐벗은 모습으로, 고통 받는 모습으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의에 의해 짓밟힌 자의 모습으로 타인이 호소할 때 그를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책임지고, 그를 대신해 짐을 지고, 사랑하고 섬기는 가운데 주체의 주체됨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32-3).
 
이렇게 해서 타자는 고통에 겨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 현현하며 그것을 통해 하나의 지평, 즉 윤리적 지평이 열린다. 타자의 고통스런 얼굴을 대하기 전에 주체는 단지 먹고, 마시고, 즐기는 향유(jouissance)의 존재, 또는 경제적 존재일 뿐이다. 자기의 거주와 향유 안에 고립된 주체는 어떤 윤리적 책임도 느낄 수 없다.
 
따라서 타자의 얼굴의 현현은 하나의 사건으로 주체를 <침범한다>. 이때 타자의 고통은 곧 주체의 고통이 된다. 윤리적 지평이 환히 드러남으로써 주체를 깨우는 최초의 정서는 레비나스에게 어떤 기쁨이라기보다 고통이다. 이 지점에서 칸트와의 대별점이 세워진다. <타인에 대한 윤리적 책임은 고통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는 데는 레비나스도 동의한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받는 고통이냐 하는 점에서는 칸트와 구별된다. 고통은 법칙에 대한 존경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고통 받는 이웃의 호소와 부름에 응답했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고 레비나스는 보고 있다>(230).
 
칸트에게 있어서 도덕법칙은 실천이성의 이념 즉 자유에 기반하고 있다. 이것은 주체의 윤리적 자율성에 방점을 두는 것이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자율성이 윤리의 기반이라고 보지 않는다. 윤리적 기반은 시종일관 ‘고통 받는 이웃의 호소와 부름’에 대한 응답이며, 따라서 타율성이다. 호소와 부름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이 윤리는 자유의 윤리라기보다 그래서 ‘책임의 윤리’가 되는 것이다. <칸트 도덕철학의 핵심명제는 “자유는 책임에 선행한다” 또는 “책임은 자유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레비나스의 핵심 명제는 “책임은 자유에 선행한다” 또는 “자유는 책임에서 나온다”는 것이다>(247).
 
그러므로 자유는 책임의 윤리 하에 새롭게 해석된다. 레비나스가 자유보다 책임을 강조한 이유는 애초에 서양철학의 전체성에 대한 비판이 있었기 때문이다. 타인의 얼굴을 짓밟고 선 자유는 전쟁과 살육만을 가져온다. 이때 자유는 그 순전한 의미를 잃어버리고 자아의 권력욕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오직 타자의 고통스런 얼굴을 대하고 거기서부터 윤리적 자각을 얻을 때만 이러한 자유의 타락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유는 전혀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나의 ‘할 수 있음,’ 나의 ‘힘’에서 나오는 자유가 아니라 타인의 부름에 ‘응답’하고 그의 고통에 ‘반응’하며 타인에게 책임지는 가운데 나의 자유도 그 참된 의미를 얻게 된다>(246).
 
그렇다면 전체성에 균열을 일으키는 이 타자의 이념을 우리는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레비나스는 이것을 ‘무한’(infini)이라고 한다. 이 점에서 레비나스는 서양철학에 대한 비판적 수용자다. 이 무한자의 이념은 서양철학의 주요한 지점마다에서 전체성과 대별되어 은밀히 제시되어 왔기 때문이다. 플라톤과 데카르트 그리고 칸트, 싸르트르, 마르셀에서 유대교에 이르기까지 이 무한자의 이념, 즉 타자 철학과 공명하는 지점이 있다.
 
플라톤에 있어서 무한자는 바로 ‘선’이다. 그는 선을 ‘존재 너머’에 두었으며, 이성적으로 파악이 불가능한 무한한 대상으로 설정하였다. 또한 데카르트에 있어서도 Cogito를 객관적으로 떠받치는 것은 신, 또는 무한자였다. 칸트의 실천이성에 대한 강조와 이념들 또한 이러한 무한자에 대한 상당한 접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무한자의 이념은 윤리적 무한자이며 형이상학적 무한자다. 여기에 레비나스가 형이상학과 존재론을 구별짓는 근거가 있다. 다시 말해, 존재론은 타자에 의해 자신의 존재를 문제시하지 않지만, 윤리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은 이 관점에 대한 비판으로 탄생한다는 것이다. 형이상학과 존재론에 대한 이런 특유한 이해는 하이데거의 이해와 대조적이다.
 
<하이데거는 ‘기술적 사유’ 혹은 ‘계산하는 사유’에 바탕을 둔 철학을 ‘형이상학’으로 이해하고 ‘근원적 사유’, 혹은 ‘자각적 사유’를 ‘존재 사유’로 이해한다. 반면 레비나스는 이해와 지배의 틀 안에서 사유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존재론’으로 이해하고 나의 지배와 소유의 틀 안으로 환원할 수 없는 타자와의 관계와 그것에 관한 사유를 ‘형이상학’으로 이해한다>(242). 그러므로 하이데거에 있어서는 존재론이 형이상학에 앞서지만 레비나스에게는 형이상학이 존재론에 앞선다.
 
타자의 얼굴의 현현, 윤리학으로서의 형이상학, 그리고 무한자의 이념은 레비나스 철학의 근간을 이룬다. 그렇다면 레비나스는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무엇을 하려고 한 것인가? 강영안은 레비나스 철학이 <주체성의 변호>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주체성’은 데카르트적 코기토나 하이데거의 현존재와는 물론 다르다.
 
주체는 레비나스에게 윤리적이며 타율적이다. 그러나 이 윤리적이고 타율적인 측면이 소극적으로 이해되는 것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윤리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존재 너머’에 있는 무한자를 가리키는 것이며, 타율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자율성의 전횡을 비판적으로 교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레비나스는 서양철학의 전체성에 대한 진정한 비판자이면서도 현대 프랑스 철학에서 주요하게 운위되는 주체부정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주체부정에 대한 레비나스의 응답은 반휴머니즘에 대한 반응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인격적 개인의 자유를 타자의 얼굴이라는 일상적 대상을 통해 정당화함으로써 그는 그 자유의 기반을 더 탄탄하게 다지기 때문이다.
 
자유는 자율성의 이념임과 동시에 타율성, 즉 타자라는 구체적 대상을 존재근거로 채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레비나스는 주체가 도대체 타자 없이는 존속할 수 없다는 것, 타자 없는 세상은 단지 ‘있음 il y a’의 암흑이며 이때 주체란 단지 고립되어 자연적 요소들에 가뭇없이 침범당하는 필멸의 존재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의 후기 철학에서 인간의 출산성이 중요하게 거론되는 것은 타자 철학의 사전 작업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타자의 무한성이 출산성을 통해 주체의 영원성이라는 철학 고유의 주제와 맥락을 맞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강영안이 레비나스의 철학을 <주체성의 변호>라고 한 것은 레비나스 철학에 대한 정당한 경의며 규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레비나스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연구서라는 것 외에 이 책이 소중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저자의 레비나스 철학에 대한 상당한 연륜과 애정이다. 저자 자신도 밝히고 있다시피 석사와 박사 논문을 칸트로 썼지만 70년대 초 유학시절부터 강영안은 레비나스에 매료되었었고 당시 생존해 있었던 그의 저서를 읽고 강연을 직접 들었다. 햇수로만 본다면 근 30년 이상 레비나스와 인연을 두고 있었던 셈이다.
 
남한 사회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동시대의 한 서양철학자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고 꾸준히 연구해 왔다는 것은 사조의 유행에 과도하게 민감하여 갈팡질팡하고, 부실한 말잔치에만 익숙한 연구자들에게 귀감이 될만한 혜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오랫동안의 연구에 힘 입어 저자는 레비나스의 난해한 철학을 놀라울 정도의 평이한 언어로 풀어낸다.
 
어떤 저자의 문체가 쉽다고 해서 무조건 대단하다거나 어렵다고 해서 덮어 놓고 경시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독자에게 익숙치 않은 한 서양철학자의 원전을 충실히 해석해서 쉬운 말로 써 나가는 능력은 철학에 대한 오랜 연륜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 점이 또한 이 책이 레비나스 철학을 탐구하는 연구자나 일반 독자들에게 값진 하나의 선물인 이유다.
 
 
 
정강길 (06-10-08 21:38)
 
아.. 레비니스.....


개인적으로 레비나스 사상만큼 타자를 위해 지극정성으로 헌신하는 사상이 어디 또있을까 싶다.. 사실 알고 보면 기존 민중신학에서 느껴졌던 그 처절한 매력도 레비나스 사상의 정수에서 느끼는 매력과 거의 흡사한 것이라고 하겠다...

후설과 하이데거의 제자로 있었지만 레비나스는 나중에 이들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는 하이데거류 철학의 전체주의적 성격을 여지없이 폭로한다.. 솔직히 세계사적으로 볼 때도 하이데거의 철학은 전체주의와도 친화적인 감이 없잖아 있다.. 레비나스는 바로 그러한 사상에 철저히 안티를 걸고 있는 것이다.. 서구철학의 근간에는 동일자의 횡포가 깔려 있다.. 그리고 그것은 놀랍게도 죽음마저 황홀한 영웅적 주체로도 미화된다.. 나찌를 위해서 그리고 천황폐하를 위해서 기꺼이 목숨마저 바치거나 할복하는 주체.. 실로 그 주체는 자유의 극한이자 불사의 영웅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레비나스가 서구 철학을 한 마디로 "reduction of the Other to the Self"으로 파악했다면, 내가 볼 때 그의 철학은 역으로 표현해서 "reduction of the Self to the Other"으로 파악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즉, 이렇게 볼 때 레비나스에게 있어 파쇼적인 것은 주체가 아닌 타자라는 사실이다.. 바로 이점 때문에 주체의 자유보다는 타자를 향한 책임을 강조하는 레비나스의 사상은 한편으로는 매우 거북스럽고도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던 것이다..

내가 볼 때, 기존 민중신학의 대중성 상실에는 이점 또한 나는 한 몫 작용했다고 본다.. 아무리 옳고 좋은 일이라도 타자를 위한 사회변혁이 그 시작부터 강요되어버리면 실은 매우 부담스러워 할 점도 없잖아 있는 것이다.. 집회에 가자고 할 때 다들 좋아할 리는 만무하잖은가..

한때 데리다가 풍요로운 서구 사회에 소개하기도 했던 레비나스는 그러나 포스트구조주의 열풍만큼이나 먹혀들진 않는다.. 할 수만 있다면 타자의 고통에 눈을 감고 싶고, 꼬랑지를 말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그러니 레비나스 같은 사상이 별로 인기가 없을 수밖에.. 그것은 예수가 저지르는 강권과도 흡사하다.. 곧바로 십자가를 지고 따르란 것이다.. 아마도 레비나스만큼 약자인 타자를 위한 처절한 헌신과 희생을 얘기하는 사상도 앞으로는 더이상 나오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좋은 책을 소개하신 것 같다.. 위의 책 외에 이미 나와 있는
콜린 데이비스의 <엠마누엘 레비나스-타자를 향한 욕망>도 참 괜찮다..
그래도 금번에 나온 책은 레비나스 연구서로서
국내 학자가 쓴 단행본 저서로는 매우 이례적일 듯 싶다..

만일 누군가가 레비나스를 좋아한다면
아마도 그는 좋은 사람일 확률이 높다고 본다..
그만큼이나 그의 철학은 거의 성인의 철학에 가깝다..

들른이 (07-01-12 01:21)
 
알랭 바디우는 레비나스의 타자윤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나는 바디우에 매우 공감한다. "사실상 그 유명한 타자란 오직 그가 좋은 타자일 때에만 제시될 수 있는 것이다. 좋은 타자란 누구인가? 바로 우리와 동일자가 아닌가? 물론 차이는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그 차이나는 자가 의회민주주의자이고, 시장경제의 신봉자이며, 언론 자유의 지지자이고, 페미니스트이고, 환경주의자일 때에 한해서이다. ... 나는 나와 차이나는 자가 정확하게 나처럼 차이들을 존중하는 한에서만 차이를 존중한다." (<윤리학>, 33-4쪽, 동문선) 그래서 레비나스는 야만적인 아프리카인, 소름 끼치는 이슬람교인, 전체주의적인 중국인이라는 또다른 타자들과 직면해선 무조건적 존중 대신 (계산적인) 유보를 표하고 있다. 바디우는 레비나스 윤리학을 한마디로 요약한다. "나처럼 되어라, 그러면 너의 차이를 존중하겠다." 그는 핵심을 찌른다.

바디우가 근거 없는 비난을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증명해주는 사례를 소개한다. 그것은 어느 방송에서 '이스라엘인에겐 팔레스타인인이야말로 당신이 말한 타자가 아니냐'는 상대의 질문에 레비나스 자신이 직접 한 답변이다. "나의 타자 정의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타자는 이웃입니다. 동족일 것까지는 없지만 동족일 수 있는 이웃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만일 당신이 타자를 지지한다면 당신은 이웃을 지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이웃이 다른 이웃을 공격하거나 부당하게 대한다면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 때 타자성은 또 다른 성격을 띠게 됩니다. 타자성 속에서 우리는 적을 발견할 수 있지요."(지젝, <신체없는 기관>, 207쪽, 도서출판b)

그가 존중하고 지지해야 한다고 보는 타자란 기껏해야 "동족일 수 있는 이웃"으로서의 타자일 뿐이다. "동족일 수 있는"? 이 표현은 "동일자일 수 있는"과 바꿔도 말이 되지 않는가? 또 사실 그런 뜻 아닌가? 이스라엘인에겐 미국인은 그러한 이웃이지만, 팔레스타인인과 아랍인은 절대 동족이 될 수 없고 그저 적에 지나지 않는, 따라서 존중할 필요가 없고 대신 아주 조심해서 대해야 하는 타자이다. 이처럼 타자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적이라 한다면, 타자가 약자가 아니라 강자라 한다면, 레비나스는 태도를 180도 바꾸어 저들에게 일정한 거리를 둔다. 약자는, 약자이기에, 단순히 약자라는 단순한 이유로 항상 우리의 힘으로 통제할 수 있으며 그래서 사실상 우리와 동일자인 타자이다. 약자는 적어도 우리에게 치명적인 존재일 리는 없으니까. 약자를 누가 두려워하겠는가? 약자에 공포를 느끼는 자는 그보다 더한 약자밖에 없다. 어떤 점에선, 약자란 동일자와 타자의 구분을 무효화시키는 그런 타자라고까지 말할 수도 있겠다. 타자이지만 동시에 동일자이기도 하니까.

자기보다 못한 불쌍한 약자를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하자? 이는 아무리 좋게 보아도 '동정의 윤리'에 지나지 않는다. 대체로 성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동정의 가르침 또한 설파했으니, 레비나스 철학을 "성인의 철학"에 견준 강길님의 판단도 틀렸다고 볼 수는 없겠다.
 
결국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는 '거짓' 타자 윤리이다. 혹은 조금 호의적으로 말하면, 제한적인 '조건부' 타자 윤리이다. 그리고 조건부인 한에서, 그것은 자신의 명칭과는 정반대로 '동일자' 윤리이다. 오직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확실히 보장해주는 한에서만 타자를 인정하자는 윤리가, 어떻게 진정한 타자 윤리일 수 있겠으며 어떻게 동일자 윤리가 아닐 수 있을지 정말 궁금하다.

정강길 (07-01-12 03:22)
 
좋은 관점을 주셨네요.. 레비나스의 철학이 '동정의 윤리'라는 점에도 공감하지만 제 생각에는 그 이상의 느낌도 받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도 만일 타자가 약자가 아니라 강자일 경우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들른이님께서 지적하신 사항들 중에서 제게 신선하게 느껴졌던 점은
그럴 경우 그것은 결국 타자의 윤리가 아닌 '동일자의 윤리'가 아니냐 라는 비판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약자란 동일자와 타자의 구분을 무효하시키는 그런 타자"라는 얘길 하셨지만,
그럴 경우 역으로 강자는 동일자와 타자를 구분해버리는 정말로 섞일 수 없는 이질적인 타자가 되겠지요..
아마도 레비나스가 보는 강자는 그가 비판하고 있는 서구 주체 철학에서 곧잘 보여졌던 파쇼적 주체들이 아닐는지요..
만일 약자 강자에 대한 이 구분자체가 아예 없다면 그의 철학에서 오히려 '윤리'라고 말할 수 있는 기반 자체도 없을 듯 한데..

물론 들른이님께선 "약자란 동일자와 타자의 구분을 무효화시키는 타자"라고 하셨지만,
제가 보는 레비나스 철학에서 문제되는 지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구분이 무효화되지 않는 지점도 분명하게 있다고 본 것이며,
이 부분에서까지 레비나스는 과잉하게 타자에 대한 복종을 요구한다는 점을 저는 비판하고 싶은 거였습니다..

사실 타자가 약자일 경우 공포를 느끼진 않더라도 일종의 손해감을 느끼기도 하잖아요.. 경우에 따라선 되려 혐오감까지도.. 
그럴 경우 그 타자는 약자라도 여전히 동일자로 포섭되지 않는 타자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그런 점에서 저는 레비나스 철학이 비록 타자의 철학이지만, 또다른 파쇼성도 여전히 함축하고 있고
그런 점에서 들른이님이 지적한 '동일자의 윤리'의 맥락도 여기에 중첩적으로 내포되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정확히 말하면, 레비나스가 비판했던 그 동일자의 윤리가 가지고 있던 횡포를 오히려 그 자신도 여전히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타자 앞에서 너는 왜 나처럼 못하냐"는 거죠..
 
적어도 제겐 여전히 레비나스 사상이
"오직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확실히 보장해주는 한에서만 타자를 인정하자는 윤리"라기보다
"오직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타자(약자)를 위해선 무조건 희생해야만 한다"는 윤리로 읽히는 점이 더 많습니다..
그것은 흡사 칸트의 막강 정언명법처럼..  혹은 "너도 타자에겐 나처럼만 접대를 좀해라"식으로..
물론 이때의 '나'는 일종의 이타적인 성인군자급 정도의 인물쯤 되겠죠..
하지만 여전히 버거운 현실도 엄연히 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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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펌] 요가철학 정강길 7251 04-24
37 '알랭 바디우'에 대하여 미선이 8731 03-07
36 알랭 바디우-진리와 주체의 철학 (서용순) 미선이 10030 03-07
35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 (2) 미선이 12129 10-14
34 호모 모미엔스 (김용옥) 정강길 8256 03-28
33 주체 해체의 시대에 주체 말하기 (2) 산수유 7776 12-05
32 '아님/비움/반대/버림/끊음/없음' 같은 부정법 표현이 갖는 한계 미선이 7051 06-07
31 철학과 신학의 관계2 (*권하는 글) 정강길 9528 05-07
30 철학과 신학의 관계1 (*권하는 글) 정강길 9066 05-06
29 언어와 우주 그리고 철학 정강길 7196 04-21
28 "좋다/싫다"와 "옳다/틀렸다"의 표현들, 어떻게 볼 것인가 : 감성과 이성의 문제 정강길 7850 04-13
27 마르틴 하이데거의 생애와 사상 이기상 19872 11-12
26 논리와 직관, 그리고 감각에 대한 논의들 (답변: 정강길) 이재우 8713 11-11
25 심리학 및 정신분석 그리고 철학(존재론) 정강길 8689 11-11
24 [펌] 윤회, 사실인가 사상인가 정강길 10987 11-11
23 [To. 들뢰지안 김재인] 두 가지 질문.. 정강길 7708 11-11
22 [To. 들뢰즈안 김재인] 부정성을 간직한 탈주fuite 번역은 어떨지요.. 정강길 9101 11-11
21 [자료]『천 개의 고원』이 『노마디즘』에게 (김재인) 정강길 9089 11-11
20 네그리, 유물론과 비유물론의 경계선에서 정강길 6888 11-11
19 〈탈중심주의〉혹은〈해체주의〉의 한계 정강길 7779 11-11
18 [펌] 맑스, 유물론, 존재론적 형이상학 정강길 8280 11-11
17 [펌] 왜 《왜 동양철학인가?》인가 장동우 7477 11-11
16 무정체성/다정체성 혹은 상대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우화 정강길 7923 11-10
15 다양성의 생산과 다양성 간의 충돌에 대한 고찰 정강길 7647 07-10
14 슬라보이 지젝Slavoj Zizek 정신분석학적 사회이론 양운덕 8015 10-08
13 [펌] "포스트모더니즘" 에 대한 촘스키의 견해 정강길 10378 10-08
12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계 개념 (서동욱) 정강길 11186 10-08
11 [책] 『라깡의 재탄생』 김상환ㆍ홍준기 엮음 관리자 8986 10-08
10 자연과 신과 인간, 그리고 근대 학문의 탄생 이현휘 7290 10-08
9 [20세기 사상을 찾아서] 질 들뢰즈의 철학 정강길 10932 10-08
8 [펌] 모더니즘 정강길 8904 10-08
7 [펌] 타자의 현현, 윤리의 지평(레비나스 사상 소개서) (3) 정강길 9434 10-08
6 레비나스 사상에 대한 좋은 개론서 정강길 8084 10-08
5 [펌] 레비나스를 아시나요? (1) 정강길 9918 10-08
4 [참고자료]본인과 이정우(들뢰즈안)와의 논쟁 글모음 정강길 11293 10-08
3 [펌] 아퀴나스, 하이데거, 화이트헤드 정강길 6590 10-08
2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에 빠진 들뢰즈 (2) 정강길 12878 05-01
1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 (1) 정강길 13338 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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