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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아님/비움/반대/버림/끊음/없음' 같은 부정법 표현이 갖는 한계    
  글쓴이 : 미선이 날 짜 : 07-06-07 02:43 조회(6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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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비우다/반대하다/버리다/끊는다/없다' 같은 부정법 표현이 갖는 한계
 
 
[사례 1]
어떤 기독교인이 자신에 대해 <아니>라고 말한다.
"나는 보수기독교인이 아니다."
- 그럼 진보기독교인가요?
"나는 진보기독교인도 아니다."
- 그럼 안티기독교인인가요?
"나는 안티기독교인도 아니다"
- 그럼 도대체 뭐죠?
"..............."
 
 
[사례 2]
어떤 사람이 <비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비워야 합니다"
- 자기 안에 무엇을 비우나요?
"생각도 비우고, 비워야 하는 그 생각조차도 비우고, 그 어떤 것도 다 비워내야 합니다"
- 그럼 아무 생각없이 사는 '무뇌아'하고는 어떻게 다르죠?
"................"
 
 
[사례 3]
어떤 사람이 <반대>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나는 A에 대해 반대합니다"
-그럼 B에 대해서는 찬성하나요?
"나는 B에 대해서도 반대합니다"
- 그럼 C에 대해서는 찬성하나요?
"나는 C에 대해서도 반대합니다"
- 그렇다면 도대체 당신의 입장은 무엇인가요? 
"..............."
 
 
부정법 표현의 한계 
 
나는 살아가면서 <아니다><비운다><반대한다><버린다><끊는다> 같은 부정법 표현의 한계를 많이 본다.
현실 존재들은 근본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무엇인가를 선택해서 살아가야만 한다.
기본적으로 여기서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
내가 살아간다는 것은 여러 다양한 선택들 가운데 어느 한 가지 선택을 밟아나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無)속에 떠 있는 자족적 사실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상은 부정법 표현을 쓰기보다
궁극적으로는 <맞다><채운다><찬성한다><가진다><관계한다>와 같은 긍정성의 표현이 더욱 적절한 것이다.
사실상 그것이 진리라면, 그것은 부정성을 꿰뚫는 긍정성이다.
 
이를테면 불교의 법문 가운데 이런 것과 같다.
 
1. 긍정성의 표현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2. 부정성의 표현 -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
3. 긍정성의 표현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이때 1과 3은 같은 긍정성의 표현이어도 전혀 다른 차원이다.
 
물론 부정법 표현을 아주 쓰지 말아야 한다는 얘긴 결코 아니다.
부정법 표현은 그저 전략적으로 그리고 방편적으로 쓸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궁극적 지점이 못된다는 얘기인 것이다.
 
특히 "무아(無我)"라는 개념을 잘못 해석해서 강조하는 얼치기 도인들일수록 부정법의 표현이 많다.
그 같은 부정법 표현의 얘기들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기울기 십상이다.
 
"우리는 버려야 합니다. 생각도 버리고, 물질도 버려야 합니다."
- 그럼 어떻게 살죠?
"버리면 살 수 있습니다"
- 어떻게요?
"버려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 그 얘긴 보수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식으로 '성령체험에 빠져봐야 성령을 알 수 있다'는 얘기와 같은 논리군요?
".................."
 
 
그렇다! 결국 그런 식의 얘기들은 어떤 면에서 하나마나 한 얘기다.
이러한 부정법의 폐해는 아마도 생각컨대, 동양사회에선 더 비일비재할 것이다.
서양사회의 생각 패턴들에는 일반적으로 부정법이 갖는 한계와 모호함을 못견뎌하고
가능하면 어떤 사물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려는 사고의 경향들이 있다.
 
흔히 동양의 얼치기 도인들이 곧잘 하는 얘기들이 있다.
내가 보기엔 불교 안에서도 그런 얘기들이 많이 나오기도 한다.
"욕구를 버려야 한다"고.
 
하지만 올바른 삶은 욕구 자체를 버려야 해결되는 삶이 아니다.
현실적 삶에 있어선 욕구를 버릴 것이 아니라 욕구를 제대로 추구하면 해결되는 문제인 것이다.
이때 <제대로>란 바로 <욕구없음>의 차원이 아니라
여러 가능성들 가운데 어차피 하나를 선택해서 살아야 한다면
최선의 바른 가능성을 추구하고 선택하라는 얘기다.
 
우리 모두는 살아 있는 한 어차피 그 어떤 욕구들을 선택해야 하는 존재이기에
상대방에게 "욕구를 버려라"라고 말하는 것은 결국 "죽어달라"는 의미밖에 안된다.
진정한 욕구 없음은 죽음이기에. 만일 "죽어달라"는 뜻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인가?
 
같은 표현이라도 긍정의 표현이 훨씬 더 낫다.
 
누군가 말하기를 "내 마음에 <사심>을 버려야 합니다"라고 말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여기에 대해 "내 마음에 <공심>을 채우면 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보다 더 구체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엔 여러 가능성들을 더 많이 내포하는 얘기이기에
정작 자기의 마음의 입장은 더 모호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는 적어도 버리는 게 아니라 공심을 채우면 되기 때문에
그럴 경우 단지 공심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얘기로 좀더 압축되고 구체화될 수 있다.
 
철학에서도 <해체주의>자들의 한계라는 게 그런 것이다.
맨날 해체만 해가지고 도대체 뭘 어떻게 한다는 것일까?
해체 이후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다는 얘긴가?
진정으로 "해체하라"는 얘기의 궁극적 실현은 결국 모두 다 "죽어라"는 얘기와 뭐가 다른가?
 
물론 자기 자신의 그 어떤 입장에 대해 확정적으로 얘기할 순 없다.
인간의 한계, 언어의 한계 또한 분명하게 당면한 현실이다.
 
만일 무엇에 대해 "나의 입장은 A다"라고 표명할 경우
자칫 '나'라는 존재가 결국 A의 한계에 갇힌 게 아니냐고 얘기할 수 있다.
 
그럴 경우에는 오류와 비극에 언제나 열어놓으면 된다.
다시 말해서, "오류와 비극에 의해 수정되지 않을 경우에만 나의 입장은 A다"라고 해주면
그 사람의 입장이 보다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깔끔하게 드러날 수 것이다.
적어도 "아니"라고 얘기하는 사람의 입장보다는 말이다.
 
결국 궁극적으로는 부정법의 표현이 아닌 <긍정성의 표현>을,
혹은 해체가 아닌 <구성>을 얘기하되 그것을 언제든지 열어놓으면 되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기본적으로 무엇인가를 이 세계 안에서 대체하고 있는 존재다.
심지어 해체주의자들도 실상은 자기의 해체주의 입장으로서 세계 안에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해체주의자들은 자기 안의 그 모순조차 제대로 보질 못하는 자들이다.
 
<대체>란, 이미 <해체>마저 내포하면서 이를 넘어서는 대안적인 구성의 차원인 것이다.
해체를 얘기하는 것보다 오히려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라는 식으로
대체를 얘기하는 것이 오히려 더 생산적이다.
 
존재는 필연적으로 무엇인가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죽은 존재가 아닌 한 말이다. 
내가 내뱉는 말이나 행동들은 어차피 수많은 가능한 말과 행동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무언무행>을 추구하는가? 그것은 결국 존재가 생물학적으로도 죽어야만 이뤄지는 차원이 아닐는지.
 
물론 과정상에 있어선 부정성의 표현들을 쓸 수는 있다.
하지만 결국에 무언가를 선택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고 한다면
궁극적으로 긍정성의 표현은 필연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온갖 색(色)의 세계들을 버리고 비우고 끊고 반대만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선택하고, 제대로 채우고, 제대로 바르게 해야할 지를 고민하는 게 훨씬 더 생산적인 것이다.
제대로 <채움>을 한다면 우리 안에 비워져야 할 것은 저절로 비워지게 된다.
앞서 예를 들어 말했듯,
<공심>을 마음 속에 채우고자 한다면, <사심>을 버리는 행위는 이미 그 속에 자동으로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불교의 팔정도(八正道)도 그것은 결국 바른 생각(正思惟), 바른 견해(正見), 바른 말(正語) 등등을 얘기했지
無생각, 無견해, 無어를 얘기한 것이 아니다.
 
참고로 노자의 <무위>라는 개념도 오해의 여지가 많다.
그것은 <하지 않음>의 무위가 아니다.
인위란 필연적인 현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노자의 무위를 추구할 수 있는가?
그것은 결국 <인위로서 수행되는 무위>의 차원인 것이다.
쉽게 얘기한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다.
 
(전)무위→인위→(초)무위 
 
여기서 '전무위'와 '초무위'를 혼동하는 것이 바로 <전초 오류>pre-trance fallacy라는 것이다.
이 같은 오류들은 불행하게도 동양사상을 논하는 많이 사람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대표적인 오류 가운데 하나다.
그럼으로서 불교도 노장도 매우 관념적으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어차피 올라가야 하고 걸어가야 할 길이라면 올바른 길로 걷자.
(* 이때 올라갈 길 자체가 아예 없다고 생각하라는 입장이 바로 관념에 빠지는 쪽이다.)
진정한 공의 실현, 곧 무아의 실현이라는 것도
결국은 <색의 없음>에서 오는 게 아니라 <색의 바름>을 추구할 때 이뤄진다.
대각의 성취란 그래서 멀고도 험한 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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