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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첫번째 바울: 급진적인 바울이 어떻게 보수 신앙의 우상으로 둔갑했는가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10-02-17 12:41 조회(67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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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첫번째 바울>을 번역하신 김준우 박사의 글입니다. 출처는 당당뉴스구요..
 
...............................................
 
 
- 마커스 보그 & 존 도미닉 크로산, <첫번째 바울: 급진적인 바울이 어떻게 보수 신앙의 우상으로 둔갑했는가> 2장에서(근간)
 
급진적인 바울이 어떻게 보수신앙의 원조로 둔갑했는가?

이 름 김준우  날 짜 2010-01-01 16:52:19
 
 
이처럼 바울은, 인류의 절반 이상이 되는 사람들에게 문화적으로 억압적인 인습들의 체계를 뒷받침하는 데 사용되어 왔다. 그러므로 노예들, 여성들, 동성애자들, 그리고 이들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흔히 바울을 역겹게 생각하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이에 덧붙여서, {뉴스위크}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억압의 체제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종합적인 방식으로 이용되었던 바울의 말씀이 있다. 전체 본문은 로마서 13:1-7이지만, 잘 알려진 그 첫 부분만 인용해보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오랜 세월 동안 기독교인 지배자들은 이 성경 말씀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지배를 합법화시켰으며, 자신들의 지배에 복종하도록 요구했다. 평범한 기독교인들은 이 말씀이 정치적인 침묵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우리는 4장에서 이 본문을 다시 고찰하겠다. 여기서는 2차 세계대전 중에 수많은 독일 기독교인들이 이 말씀에 근거해서 히틀러의 제3 제국에 대한 복종을 정당화했다는 사실만 지적하고 넘어가겠다. 또한 미국에서는 민권운동 기간 동안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말씀에 입각해서 시민불복종 운동에 반대했다. 보다 최근에는 유명한 복음주의 설교자들이 이 말씀을 이용해서,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한 지지를 정당화했다. 즉 기독교인들은 정부가 무슨 일을 하든지 복종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점차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설득력을 잃고 있다.
이런 본문들만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특정한 본문에서 특정한 문제들에 관해서만 단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예수의 메시지를 매우 왜곡시킨 "원흉"이었다고 본다. 학자들을 포함해서 여러 사람들이 쓴 책들은 바울이 예수의(of) 가르침과 메시지를 예수에 관한(about) 추상적인 교리들로 둔갑시켜, 예수의 종교(the religion of Jesus)를 예수에 관한 종교(a religion about Jesus)로 바꾸었다고 주장한다. 바울이 단지 몇몇 구절에서만 잘못된 것이 아니라 포괄적으로 잘못된 것을 가르쳤다고 보는 것이다. 예수는 좋지만 바울은 나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우리는 비록 바울이 어떤 점들에서는 잘못되었다고 기꺼이 말할 용의가 있지만, 바울에 대한 이런 부정적 입장을 갖고 있지 않다. 바울을 긍정적으로 본다는 것이 바울이 쓴 모든 것을 지지한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두 사람은 바울을 찬양하는 사람들에 속한다. 우리는 바울이 예수의 매력적인 사도라고 보며, 바울이 즐겨 사용한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 사는 삶에 대한 비전은 예수 자신의 메시지와 비전에 매우 충실한 것이라고 본다. 우리가 예수와 바울이 활동한 상황이 서로 달랐다는 점을 고려하면, 즉 예수는 유대인들의 고향 땅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말했던 반면에, 바울은 유대인들의 고향 땅을 넘어 로마제국의 여러 도시들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말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바울은 자신의 주님이 된 급진적 예수의 충실한 사도로 드러나게 된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바울을 만나는 것이 생전 처음으로 바울을 다시 만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지난 200년 넘게 발전해온 주류 신약학은, 바울이 쓴 것으로 되어 있는 13개의 편지들을 세 그룹, 즉 (1) 바울이 쓴 편지들, (2) 바울이 쓰지 않은 편지들, 그리고 (3) 그 저자가 불확실한 편지들로 나눌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1) 대부분의 학자들이 합의한 바에 따르면, 적어도 7개의 편지들은 "진정하다"(genuine). 즉 바울 자신이 쓴 편지들이다. 이 7개의 편지들은 3개의 긴 편지들(로마서, 고린도전서와 후서)과 4개의 짧은 편지들(데살로니가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이다. 1세기의 50년대에(한두 해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기록된 이 편지들은 신약성경의 최초의 문서들로서 복음서들보다 먼저 기록되었다(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은 70년경에 기록되었다). 이처럼 바울의 진정한 편지들은 기독교로 발전할 것에 대한 가장 오래된 증언이다.
(2) 학자들이 거의 똑같이 강하게 합의를 이루고 있는 것에 따르면, 3개의 편지들, 즉 흔히 "목회서신"(pastoral letters)으로 불려지는 디모데전서와 후서, 디도서는 바울이 쓴 편지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학자들은 이 편지들이 기원후 100년경, 혹은 그보다 10년이나 20년 후에 기록된 것으로 추측한다. 이 편지들은 보다 후대의 역사적 상황과 바울의 진정한 편지 7개와는 매우 다른 문체(style)를 보여주기 때문에, 바울이 쓰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디모데와 디도에게 보낸 편지들은 바울이 죽은 후 몇 십 년이 지나 바울의 이름으로 쓰여진 것이다. 남의 이름으로 문서를 기록하는 것이 부정직하거나 사기행위라고 생각할 독자들도 있을 수 있지만, 고대세계에서는 이런 일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당시에는 유대교 안에서도 이런 일이 문학적인 습관이었다는 말이다.
(3) 학자들 사이에 합의를 이루지 못하는 세 번째 그룹의 편지들에 대해, 대다수 학자들은 바울이 쓰지 않은 것으로 간주한다. 흔히 "논쟁적인" 편지들로 불리는 이 편지들에는 에베소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가 포함된다. 우리 두 사람은 이 편지들이 "바울 이후" (post-Paul)의 편지들, 즉 바울이 죽은 후 한 세대 정도 지나서, 그의 진정한 편지들과 후대의 목회서신들 사이의 중간에 기록된 편지들로 간주한다.
이처럼 바울이 쓴 것으로 되어 있는 편지들 속에는 세 사람의 "바울"이 있는 셈이다. 이 세 사람의 "바울"에게 이름을 붙이기 위해, 우리는 7개의 진정한 편지를 쓴 바울을 급진적인 바울(radical Paul)이라 부른다. 3개의 목회서신의 바울을 반동적인 바울(reactionary Paul)이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이 편지들의 저자가 바울의 메시지를 단순히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점들에서 바울의 메시지에 반대되는 것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우리가 2장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 편지들의 저자는 바울의 사상을 당시의 관습들에 강력하게 조화시키고 있다. 급진적 바울과 비교해서, 논쟁적인 편지들의 바울을 보수적인 바울(conservative Paul)이라 부른다.
우리의 목적은 "급진적," "반동적," 그리고 "보수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논란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바울 이후에 기록된(post-Pauline) 위(僞) 바울(pseudo-Pauline) 편지들은 바울 신학의 중요한 측면과 관련하여 반(反) 바울적인(anti-Pauline) 편지들이라는 사실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편지들은, 다음 장에서 우리가 논증하겠지만, 바울을 길들인 편지들로서, 바울의 열정을 순화시켜 바울과 그의 추종자들이 살고 있었던 로마제국의 전형적인 세계에 순응하도록 만든 편지들이기 때문이다.
 
 
마커스 보그, 존 도미닉 크로산, <첫번째 바울: 급진적인 바울이 어떻게 보수신앙의 우상으로 둔갑했는가?> 한국기독교연구소 (근간)
 
* 아래 인용이 너무 길어서 두 가지 흥미로운 점만 인용합니다.
 
끝으로, 우리는 방금 언급한 유니아(16:7)에게 다시 되돌아가는데, 이 경우는 비극적인 것이 아니라면 희극적인 것이 될 것이다. 기독교 역사의 처음 천 년 동안에 주석가들은 유니아가 여자 이름이라고 올바르게 인식했다. 그녀는 안드로니고의 아내였다. 브리스가가 아굴라의 아내였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의 두 번째 천 년 동안에는 유니아가 남자로 둔갑했다. 유니아는 유니아누스라는 남자 이름을 간략하게 줄인 형태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사실이 아닌 이유는, 비록 고대 세계에 유니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들이 250명이 넘었지만, 그 중에 유니아누스라는 이름을 줄인 형태로서 유니아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는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억지 주장을 했던 이유 역시 분명하다. 즉 만일 유니아가 여자로 남게 된다면, 그녀가 "사도들 중에 탁월하다"는 말 때문에, 여자도 사도가 되는 것이 명백하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물론 성별과 기능이 결합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 즉 바울은 하나님이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도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신다고 믿었다. 기독교인들의 결혼과 가정에서 존재했던 성별간의 평등성은 공동체 모임과 사도 직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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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성의 지도력에 대한 우리의 주장이 특별한 탄원처럼 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바울의 진정한 편지 속에 나오는 여성 지도력 문제를 자세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학자들은 바울의 진정한 7통의 편지들 가운데 어떤 대목은 후대에 삽입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특정한 기준이 충족될 경우에만 학계에서 설득력을 갖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 특정한 기준들이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로, 특정 본문에서 삽입된 것으로 보이는 대목을 빼면 그 앞뒤 문맥이 더 잘 통해야 한다. 둘째로, 필사본 전승에서 그 대목이 삽입되었다는 객관적인 증거가 있어야 한다. 셋째로, 그 삽입된 대목이 저자의 진정한 본문들과 모순을 일으키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세 가지 기준은 고린도전서 14:33b-36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첫째로, 이 대목 앞에 나오는 14:26-33a의 주제는 예언이며, 이 똑같은 주제는 이 대목 다음에 나오는 14:37-40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위에 인용한 이 대목을 빼버리면, 이 대목을 그래도 둔 때보다 그 문맥이 훨씬 잘 이어진다.
둘째로, 이 논란이 되는 대목이 몇몇 초기 필사본들에서는 14:33a 다음에 나오지 않고 14장 마지막, 즉 14:40 이후에 나온다. 더 나아가 이 대목은 모든 그리스어 필사본에서 하나의 따로 떨어진 단락으로 나온다. 이것은 우리 시대의 공식적인 그리스어 신약성경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영어성경의 신개정표준판(NRSV)에서는 이 대목 전체를 괄호 속에 넣어 별도의 단락으로 표기했다(한글성경들 가운데 이 대목을 괄호 안에 넣은 것은 표준새번역 뿐이다. 그러나 표준새번역 개정판에서는 괄호가 빠졌다. 심지어 공동번역과 공동번역개정판에도 괄호는 없다. - 옮긴이).
마지막으로, 이처럼 교회 안에서 여자들을 침묵시킨 것은 급진적인 바울의 일반적인 태도와 모순될 뿐만 아니라, 바울이 고린도전서의 앞부분에서 말한 것들과도 명백하게 모순된다. 즉 바울은 기독교인들의 모임에서 "남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것은 자기 머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은 채로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것은, 자기 머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11:4-5)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고린도교회에서 너울의 문제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기독교인 모임에서 남자와 여자가 모두 공개적으로 목회활동을 한(minister)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33b-36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어느 필사자가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나님이십니다"(14:33a)를 필사한 후에, 그 무질서의 본보기가 바로 여자 교사들이라고 생각하여, 디모데전서 2:8-15을 요약하여 그 필사본의 여백에 덧붙여 놓았고, 그것이 나중에 후대의 필사자들에 의해서 본문 속에 다른 곳에, 즉 14:33a 혹은 14:40에 삽입되었다고 보는 방법이다.
양성평등과 여성지도력을 위한 바울의 복음 --가부장제도에 대해 급진적인 바울, 보수적인 바울, 반동적인 바울
이 름 김준우 날 짜 2010-01-05 11:29:01
1. 가부장제도에 대해 급진적인 바울
남녀 성별간의 평등성(gender equality)에 대한 바울의 비전은 (1) 기독교인 가족 안에서 아내와 남편의 관계, (2) 기독교인들의 모임, 특히 (3) 기독교인 사도들 안에서 여자와 남자 사이의 관계로 확장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런 성적인 평등성은 기독교인의 삶의 모든 측면과 관련되어 있다.
(1) 가족 내의 평등성. 바울 자신은 금욕적인 독신이었으며,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 유대교의 관례를 따라 이미 가족을 이루었을 수도 있다. 적어도 바울은 가족을 이루는 것을 거부하는 모델로 예수를 언급한 적은 없었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자신이 회심시킨 사람들에게 "나는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7:7a)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모든 기독교인이 금욕생활로 부름 받았다고는 결코 주장하지 않았다. 즉 "각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가 있어서,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합니다"(7:7b).
그는 금욕생활의 이유로서 "지금 닥쳐오는 재난," 즉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며" 또한 "이 세상의 형체는 사라집니다"(7:26-31)라고 말한다. 그러나 또 다시 그는 이것이 사도의 명령이 아니라 개인적인 선택이라고 강조한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여러분을 유익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이지, 여러분에게 올가미를 씌우려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이 품위 있게 살면서, 마음에 헛갈림이 없이, 오직 주님만을 섬기게 하려는 것입니다"(7:35).
바울은 그 세상이 완성되는 때의 타이밍을 잘못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인의 금욕생활에 대한 그의 특수한 비전만이--기독교인의 생활에 대한 일반적인 비전이 아니라--그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기독교인의 생활에 대한 일반적인 그의 비전은 그리스도에 의한(by) 미래의 행동과 상관없이 그리스도 안에서의(in) 현재의 생활과 관련된 것이다.
이제까지 말한 것은 단지 서론으로서, 고린도전서 7장 전체를 통해서, 바울이 아내의 의무는 남편의 의무와 균형을 이룬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긴장된 구문을 사용하고 있다는 중요한 사실의 서론일 따름이다. 그것은 항상 서로 간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것이다.
7:3-4의 주제는 절제다. 바울이 의무를 말하는 순서는 남편/아내, 그리고 아내/남편이다(7:3). 아내/남편 그리고 남편/아내다(7:4). 부부가 절제와 성행위 가운데 무엇을 결정하든 "합의"로 결정해야만 한다(7:5).
7:10-16의 주제는 이혼이다. 기독교인의 결혼생활에서 이혼은 허락되지 않는다. 여기서도 그 순서는 뚜렷하게 상호적이다. 즉 아내/남편 그리고 남편/아내의 순서다(7:10-11). 기독교인과 "믿지 않는" 이교도가 결혼한 경우에는 이혼이 허락된다. 만일 믿지 않는 사람이 평화롭게 사는 것을 거부할 경우에 말이다(7:15). 그 믿지 않는 사람이 기독교인의 아내든 남편이든 마찬가지다(7:12-13). 예를 들어, "믿지 않는 남편은 그의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해지고, 믿지 않는 아내는 그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졌습니다"(7:14)라는 선언과 "아내 된 이여, 그대가 혹시나 그대의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압니까? 남편 된 이여, 그대가 혹시나 그대의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압니까?"(7:16)라는 선언 속의 상호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7:25-28의 주제는 동정(童貞, virginity)이다. 바울은 남자에게서 시작하여 "아내에게 매였으면"(7:25-27)이라는 대목부터 시작한 후에 여자의 문제로 넘어간다(7:28).
7:29-35의 주제는 또 다시 절제다. 바울은 자신의 금욕생활을 모방할 것을 주장하는데, 금욕생활이 "세상 일"로부터 자유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금욕생활은 남편과 아내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된다. "결혼한 남자는, 어떻게 하면 자기 아내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 일에 마음을 쓰게 되므로... 결혼한 여자는, 어떻게 하면 남편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 일에 마음을 씁니다"(7:32, 34).
7장 전체에서 여성/남성 그리고 남성/여성이 의도적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한 편에게 옳은 것은 다른 편에게도 옳은 일이며, 한 편에게 그른 것은 다른 편에게도 그른 것이다. 아내와 남편은 가족 안에서 평등하다.
(2) 신자들의 모임 안에서의 평등성. 바울이 가르친 금욕생활을 남편이 아니라 아내가 따르기를 바랄 때, 남편과 아내 사이의 기독교적인 평등성에 대한 주장이 갈등을 초래했다는 사실을 고린도전서 7장의 첫마디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평등성을 지킬 것인가? 바울의 권고는 이렇다. "서로 물리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기도에 전념하기 위하여 얼마 동안 떨어져 있기로 합의한 경우에는 예외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 다시 합하십시오. 여러분이 절제하는 힘이 없는 틈을 타서 사탄이 여러분을 유혹할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7:5). 분명히 훌륭한 권고이지만,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만일 아내가 결혼생활 안에서 금욕의 권리를 주장한다면, 평등성이 어떻게 실현될 것인가?
한편 바울이 고린도전서 11:1-16에서 논의한 문제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 절대적인 합의점은 없지만, 이 문제가 분명히 그를 자극해서 날카로운 수사학적 낭패를 일으켰다. 그러나 바울로 하여금 이처럼 매우 강력하고 매우 이상한 반응을 초래한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여자들이, 만일 머리에 너울(veil)을 쓰기만 한다면, 모임을 이끄는 것이 왜 그리 큰 문제가 되는가?
우리가 가장 잘 짐작할 수 있는 것은 11:1-16보다 앞에 나오는 7:1-7을 되돌아보는 길이다. 결혼한 어떤 여자들은 금욕생활에 대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결혼의 너울을 벗어버림으로써 자신들의 "순결한" 상태를 주장하고 있었다. 이것은 가족 안에서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모임 안에서도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이 문제는 결혼 계약 안에서 평등성과 금욕생활이 서로 충돌한 경우였다. 이혼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는가?
바울은 결혼한 여자들이 너울을 써야 하는 것은 창조(11:8-13)와 자연(11:14-15)에 근거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만일 남자가 머리를 길게 하는 것은 그에게 불명예가 되지만, 여자가 머리를 길게 하는 것은 그에게 영광이 되지 않습니까?"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의무의 평등성에 호소하는 듯이 보이기까지 한다. 창조와 자연은 분명히 바울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어야만 했지만, 그러나 그는 마치 그 무모함을 인식한 듯이, 다음과 같이 용두사미로 끝낸다. 즉 "이 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이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나, 그런 풍습은 우리에게도 없고, 하나님의 교회에도 없습니다"(11:16). 바울의 주장은 창조와 자연에 근거한 것인가, 아니면 단순한 풍습에 근거한 것인가?
이 모든 것에서, 그 문제와 해결책이 무엇이었으며 바울의 주장이 얼마나 타당한 것이었는가 하는 것과 상관없이,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바울의 논의의 시작에서부터 바울이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의 모임에는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남자들"과 또한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여자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명백하다(11:4-5). 이런 평등성은 당연한 것으로 간주된다. 즉 여자와 남자는 기독교인의 사적인 가족에서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인의 공동체 모임에서도 평등하다는 말이다.
(3) 사도 직분에서의 평등성. 평등성의 마지막 분야는 바울에게 가장 중요하며 또한 가장 정점을 이루는 곳이다. 실제로 만일 여자와 남자가 기독교인 사도의 직분에서까지 평등하다면, 기독교인의 가정과 신자들의 모임에서 남녀가 이미 평등하지 않았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이것에 대한 우리의 중요한 증거는 로마서 16:1-16이다. 그리고 우리는 바울이 이미 개인적으로 알고 있거나 적어도 이름을 알고 있던 로마의 기독교인들에게 인사하면서, 어떻게 여자들과 남자들을 언급하는지를 강조하고 싶다.
첫째로, 바울의 편지를 고린도의 동쪽 항구로부터 로마의 기독교인 집단에게 가져간 사람, 그래서 그 편지를 읽고 설명한 사람은 바로 여자였다. "겐그레아 교회의 일꿈이요 우리의 자매인 뵈뵈를 여러분에게 추천합니다. 여러분은 성도의 합당한 예절로 주님 안에서 그를 영접하고, 그가 여러분에게 어떤 도움을 원하든지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많은 사람을 도와주었고(prostatis), 나도 그에게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롬 16:1-2). 뵈뵈는 바울의 후견인이었다.
둘째로, 결혼한 두 부부가 특별한 칭찬을 받고 있다. 한 부부는 최초의 기독교인-이방인 부부다.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내 목숨을 구해 준 사람들입니다. 나뿐만 아니라, 이방 사람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16:3-4). 브리스가를 처음에는 나의 동역자로 언급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 하나의 부부는 최초의 기독교인-유대인 부부다. 즉 "나의 친척이며 한 때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사도들 중에 탁월하며(prominent among the apostles, 표준새번역 개정판에는 "그들은 사도들에게 좋은 평을 받고 있고"),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입니다"(16:7).
셋째로, 로마서 16장의 목록에 나오는 전체 27명의 기독교인들 가운데, 10명이 여자들(뵈뵈, 브리스가, 마리아, 유니아, 드루배나, 드루보사, 버시,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어머니, 율리아,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자매)이며, 17명이 남자들(아굴라, 에배네도, 안드로니고, 암블리아, 우르바노, 스다구, 아벨레, 헤로디온, 루포, 아순그리도, 블레곤, 허메, 바드로바, 허마, 빌롤로고, 네레오, 올름바)이다. 그러나 이렇게 칭찬받은 사람들 가운데 5명의 여자들(마리아, 드루배나, 드로보사, 버시,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어머니)과 6명의 남자들(에배네도, 암블리아, 우르바노, 스다구, 아벨레, 루포)은 특별한 칭찬을 받고 있다.
넷째로, 바울은 헌신적인 사도의 활동을 뜻하기 위해 "수고를 많이 한다"는 동사(kopiao)를 사용했다. 그는 이 동사를 자신에게 두 번 적용했다(갈 4:11; 고전 15:10). 그러나 여기서는 네 차례 적용하며 모두 여자들에게만 사용했다. 즉 마리아(16:6), 드루배나, 드루보사, 버시(16:12)에게 사용했다.
끝으로, 우리는 방금 언급한 유니아(16:7)에게 다시 되돌아가는데, 이 경우는 비극적인 것이 아니라면 희극적인 것이 될 것이다. 기독교 역사의 처음 천 년 동안에 주석가들은 유니아가 여자 이름이라고 올바르게 인식했다. 그녀는 안드로니고의 아내였다. 브리스가가 아굴라의 아내였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의 두 번째 천 년 동안에는 유니아가 남자로 둔갑했다. 유니아는 유니아누스라는 남자 이름을 간략하게 줄인 형태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사실이 아닌 이유는, 비록 고대 세계에 유니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들이 250명이 넘었지만, 그 중에 유니아누스라는 이름을 줄인 형태로서 유니아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는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억지 주장을 했던 이유 역시 분명하다. 즉 만일 유니아가 여자로 남게 된다면, 그녀가 "사도들 중에 탁월하다"는 말 때문에, 여자도 사도가 되는 것이 명백하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물론 성별과 기능이 결합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 즉 바울은 하나님이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도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신다고 믿었다. 기독교인들의 결혼과 가정에서 존재했던 성별간의 평등성은 공동체 모임과 사도 직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 가부장제도에 대해 보수적인 바울
우리는 노예제도와 관련하여 확장된 가족들을 위한 윤리를 다시 한 번 살펴보겠다. 특별히 기독교인 가정의 대가족을 위한 가르침들을 자세하게 읽어보자. 독자들은 대가족 안에 계급구조의 여러 계층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즉 대가족을 위한 가르침은 수직적으로 위에서부터 밑바닥까지, 즉 부모로부터 시작해서 자녀들을 거쳐 노예들에게 내려가는 순서로 나온다. 수평적으로는 각각의 계층에서, 하급자로부터 상급자의 순서로 나온다. 즉 아내들 다음에 남편들에 대한 가르침, 자녀들 다음에 아버지들에 대한 가르침, 그리고 노예들 다음에 주인들에 대한 가르침이다.
아내들과
남편들 골로새서 3:18, 19 에베소서 5:22-24, 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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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들과
아버지들 골로새서 3:20, 21 에베소서 6:1-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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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들과
주인들 골로새서 3:22-25; 4:1 에베소서 6:5-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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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독자들은 이것이 내적으로 자녀들과 부모들의 문제가 아니라, 자녀들과 아버지들의 문제이며, 노예들과 소유주들(owners)의 문제가 아니라 노예들과 주인들(masters)의 문제라는 것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노예들에 대한 로마인들의 태도를 우리가 살펴보았던 것처럼, 로마인 가장(家長, paterfamilias)은 십중팔구 위의 가르침들이 너무 자유주의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첫째로, 위의 가르침들은 비록 불평등하고 계급적인 의무이기는 하지만 서로간의 호혜적 의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하급자로 간주되는 아내들, 자녀들, 노예들에게 직접 말하고 있지, 그 상급자들 곧 남편들, 아버지들, 주인들을 통해서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치고, 우리는 여기서 아내들과 남편들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위의 두 본문에서 기독교인의 성별 평등성에 대한 바울의 급진성이 어떻게 그 날카로움이 무디어져 다시 로마의 성별 계급구조로 후퇴했는지를 강조하고자 한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골 3:18)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 3:19)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엡 5:22-24)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엡 5:25-33)
골로새서에서는 아내들과 남편들에게 각각 한 절씩만 말하고 있지만, 에베소서에서는 그 비율이 3 대 9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에베소서에서는 남편들이 훨씬 더 큰 문제를 안고 있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더 나아가, 에베소서는 아내들보다는 남편들에게 훨씬 더 무거운 부담을 지우고 있다. 즉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 아내들이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남편들의 의무, 곧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였듯이 남편들도 아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라는 의무보다 훨씬 쉬운 것이다. 남편들에 대한 이런 가르침은 아마도, 만일 종교적 박해가 일어나면, 남편들은 자기 아내들을 구하기 위해 죽을 준비를 해야만 한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후대의 기독교 전통이 아내들에게 복종을 요구하고, 이어서 남편들에게 자기 희생을 요구하기보다는 그런 자기 희생을 아내들에게도 요구하게 되었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3. 가부장제도에 대해 반동적인 바울
학자들이 목회서신이라 부르는 편지들, 즉 디모데서와 디도서는 각각 바울이 에베소와 크레타 섬에 맡겨둔 것으로 생각된다. 디모데서에는 기독교인 모임 안에서 여성의 지도력의 문제가 생겨났으며, 이 유명한--악명 높은--본문에서 여성의 지도력은 절대 금지된다.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 2:11-15)
우리가 이 본문을 단순히 "보수적"이라 부르지 않고 "반동적"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 본문이 당시 일어나고 있었던 사태에 대해 분명하게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상상했던 적이 없는 것을 금지시킬 이유는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로마인들이 여자가 원로원이 되는 것을 금지시키는 법을 정하기 않았던 것은 아무도 그것을 실행하는 것을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그럴 가능성을 상상했던 적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의 지도력에 대한 우리의 주장이 특별한 탄원처럼 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바울의 진정한 편지 속에 나오는 여성 지도력 문제를 자세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학자들은 바울의 진정한 7통의 편지들 가운데 어떤 대목은 후대에 삽입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특정한 기준이 충족될 경우에만 학계에서 설득력을 갖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 특정한 기준들이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로, 특정 본문에서 삽입된 것으로 보이는 대목을 빼면 그 앞뒤 문맥이 더 잘 통해야 한다. 둘째로, 필사본 전승에서 그 대목이 삽입되었다는 객관적인 증거가 있어야 한다. 셋째로, 그 삽입된 대목이 저자의 진정한 본문들과 모순을 일으키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세 가지 기준은 고린도전서 14:33b-36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첫째로, 이 대목 앞에 나오는 14:26-33a의 주제는 예언이며, 이 똑같은 주제는 이 대목 다음에 나오는 14:37-40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위에 인용한 이 대목을 빼버리면, 이 대목을 그래도 둔 때보다 그 문맥이 훨씬 잘 이어진다.
둘째로, 이 논란이 되는 대목이 몇몇 초기 필사본들에서는 14:33a 다음에 나오지 않고 14장 마지막, 즉 14:40 이후에 나온다. 더 나아가 이 대목은 모든 그리스어 필사본에서 하나의 따로 떨어진 단락으로 나온다. 이것은 우리 시대의 공식적인 그리스어 신약성경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영어성경의 신개정표준판(NRSV)에서는 이 대목 전체를 괄호 속에 넣어 별도의 단락으로 표기했다(한글성경들 가운데 이 대목을 괄호 안에 넣은 것은 표준새번역 뿐이다. 그러나 표준새번역 개정판에서는 괄호가 빠졌다. 심지어 공동번역과 공동번역개정판에도 괄호는 없다. - 옮긴이).
마지막으로, 이처럼 교회 안에서 여자들을 침묵시킨 것은 급진적인 바울의 일반적인 태도와 모순될 뿐만 아니라, 바울이 고린도전서의 앞부분에서 말한 것들과도 명백하게 모순된다. 즉 바울은 기독교인들의 모임에서 "남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것은 자기 머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은 채로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것은, 자기 머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11:4-5)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고린도교회에서 너울의 문제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기독교인 모임에서 남자와 여자가 모두 공개적으로 목회활동을 한(minister)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33b-36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어느 필사자가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나님이십니다"(14:33a)를 필사한 후에, 그 무질서의 본보기가 바로 여자 교사들이라고 생각하여, 디모데전서 2:8-15을 요약하여 그 필사본의 여백에 덧붙여 놓았고, 그것이 나중에 후대의 필사자들에 의해서 본문 속에 다른 곳에, 즉 14:33a 혹은 14:40에 삽입되었다고 보는 방법이다.

 
마커스 보그 & 존 도미닉 크로산, <첫번째 바울: 급진적인 바울이 어떻게 보수 신앙의 우상으로 둔갑했는가?> (근간) 2장에서
 
오네시모의 계산된 선택과 바울의 치밀한 전략

이 름 김준우
날 짜 2010-01-02 12:16:29
 
오네시모가 분명히 빌레몬의 허락 없이 바울에게로 왔기 때문에, 그의 상황을 우리가 어떻게 정확하게 상상할 수 있을까? 한편으로 그는 분명히 도망친 노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곳, 즉 로마인들의 감옥에 갇혀 있는 로마인들의 죄수에게로 도망친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바울의 목숨도 위태롭게 만든 것이 아닌가?
여기서 만일 오네시모가 단순히 철없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의 행동을 이해할 또 다른 길이 있다. 엄한 처벌이나 심지어 사형이 임박했을 때, 로마법은 노예가 어떤 신전으로 도망쳐서 도피처로 삼는 것을 허락했을 뿐만 아니라, 주인의 "친구에게"(라틴어로 ad amicum) 도망쳐서 중재와 자비를 구하는 것도 허락하고 있었다.
사례를 들어 설명하면 분명해질 것이다. 세네카(Seneca the Younger)는 비록 네로 황제 말년에 그 희생자가 되었지만, 그는 젊은 네로의 철학 교사였었다. 그가 {자비}(On Mercy)와 {분노}(On Anger)라는 논문을 쓴 때는 바울이 빌레몬서--이 편지는 실제로 {의무}[On Duty]라 부를 수 있다--를 쓴 때와 거의 같은 시기였다. 세네카는 {자비}에서, "노예는 신의 석상에서 피난처를 구할 권리가 있다"(I.18.2)고 말한다. 그리고 {분노}에서는 어느 노예가 (잠시) 주인의 "친구에게" 도망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신과 같은 아우구스투스께서 베디우스 폴리오와 더불어" 나폴리 만을 내려다보는 베디우스의 호화로운 저택에서 식사를 하는 중에 일어난 일이다.
노예 하나가 크리스탈 컵 하나를 깨뜨렸다. 베디우스는 그를 체포하여 유별난 방식으로 처형하도록 명령했는데, 그것은 연못에서 키우던 거대한 칠성장어에게 던지라는 것이었다... 그 노예 소년은 기를 쓰고 벗어나 카이사르의 발 밑으로 도망쳐, 단지 칠성장어에게 잡아먹히는 것이 아니라 제발 다른 방식으로 죽여 달라고 간청했다. 전례가 없는 잔인함에 충격을 받은 카이사르는 그를 풀어주었으며, 자기 앞에서 모든 크리스탈 그릇들을 깨뜨리도록 명령하고 그 연못도 메워버리도록 했다(3.40.2-4)
세네카는 그 노예가 "위로" 도망쳤다고, 즉 주인의 친구이지만, "주인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행동할 수 있는 사람에게로 도망쳤다고 지적했다. 이 이야기는 역사라기보다는 비유일 수 있지만, 폴리오가 유언을 통해 그 대저택을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쳤을 때, 황제는 그 건물들을 헐고 정원으로 만들었다.
오네시모의 의도와 상황에 대해 우리가 철저하게 재구성해볼 때, 그는 주인 빌레몬에게 매우 심각한 문제를 일으켜, 로마법에 따라 합법적으로 중재를 받기 위해 바울에게 도망친 것이며, 바울은 오네시모가 생각하기에 자기의 주인보다 "더욱 높은" 친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 본래적인 상황이 바뀌었는데, 그 이유는 이 이교도 노예가 기독교인 개종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바뀐 상황에서 정확히 빌레몬의 의무는 무엇인가? 오네시모를 용서받고 이제는 기독교인 노예로 다시 받아들이는 일인가? 아니면 오네시모를 바울에게 주어 바울 자신의 노예로 삼게 하는 일인가? 그 일은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도 아니다. 훨씬 더 급진적인 것이다.
바울의 편지는 이렇게 이어진다.
나는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그는 바로 내 마음입니다. 나는 그를 내 곁에 두고 내가 복음을 위하여 갇혀 있는 동안에 그대를 대신해서 나에게 시중들게 하고 싶었으나, 그대의 승낙이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대가 선한 일을 마지못해서 하지 않고, 자진해서 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12- 14)
따라서 바울은 분명히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노예상태로든 해방된 자유민 상태로든, 바울과 함께 에베소에 남아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그 주인에게 "내 마음"으로서 돌려보낸다. 첫째로, "그대를 대신해서"라는 말 속의 가시돋힌 표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사실상, "오네시모는 여기서 나를 돕고 있는데, 사랑하는 빌레몬아, 그대는 어디에 있는가? 안타깝구나!"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약간 빈정거림의 말투로 "오네시모가 그대의 대리인으로 여기에 있는 것인가?"라는 말이다. 둘째로, 당신이 이제는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내가 복음을 위해 갇혀 있다"는 말을 또 한 차례 하기에 좋은 시점이다. 문자적으로는 "내가 복음의 사슬에 묶여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은 앞에서 이미 두 차례나 보았던 것처럼, 똑같이 의도적인 모호함으로서, 로마제국이 복음 때문에 바울을 사슬에 묶었는가, 아니면 복음이 로마제국 때문에 바울을 사슬에 묶었는가 하는 것이다. 끝으로, 빌레몬이 "선한 일을 마지못해서 하지 않고, 자진해서 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신앙 없는 행위'(works-without-faith)에 맞서서 '신앙과 더불어 행위'(faith-with-works)를 주장하는 바울 신학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도록 만든다. 그러나 이것을 '행위가 아니라 신앙' (faith-against-works)이라는 종교개혁의 가짜 문제, 즉 유대인들에 맞서서 기독교인들, 그리고 가톨릭에 맞서서 개신교 편을 드는 논쟁적인 논설들을 위해 매우 유용했던 종교개혁의 가짜 문제와 혼동하지 말기 바란다. 빌레몬이 반드시 오네시모를 자유롭게 풀어주어야 하는 것은 신앙으로부터 내면적으로 우러나는 행위로서 해야 하는 것이지, 바울에게 마지못해 복종함으로써 외부로부터 비롯되는 행위로 해야 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이 바울이 이 편지에서 롤러 코스터를 태우듯이 빌레몬을 추켜올렸다가 내리처박고, 칭찬과 비난의 수사학을 구사하는 이유이다.
그가 잠시 동안 그대를 떠난 것은, 아마 그대로 하여금 영원히 그를 데리고 있게 하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부터는 그는 종으로서가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그대의 곁에 있을 것입니다. 특히 그가 나에게 그러하다면, 그대에게는 육신으로나 주 님 안에서나, 더욱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15-16)
여기서 우리는 마침내 그 일, 즉 그 "의무"와 "선한 일"이 오네시모를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빌레몬은 오네시모가 바울 곁에 영원히 남아 있을 수 있도록 하려는 필요성 때문에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네시모가 빌레몬으로부터 자진해서 해방되도록 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이 모든 일이 벌어진 이유일 거라고 바울은 빌레몬에게 말하는 것이다. 오네시모가 잠시 동안 빌레몬의 노예생활에서 "떠난 것"(수동태로 된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이 아닌가?)은 그가 자유를 얻기 위해 빌레몬에게 되돌아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말이다.
"육신으로나 주님 안에서나"(16)라는 말은 바울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말이다. 바울은 우리 모두가 우리의 영혼에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앞에서 영적으로 평등하다고 주장함으로써 빌레몬이 더 이상 오네시모를 기독교인 노예로서 데리고 있을 수 없게 만든 것이다. 해방의 평등성은 영적이며 신학적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육체적이며 사회적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의 요점을 다시 강조함으로써 확실하게 못을 박는다.
그러므로 그대가 나를 동지로 생각하면, 나를 맞이하듯이 그를 맞아 주십시오. 그가 그대에게 잘못한 것이 있거나, 빚진 것이 있거든, 그것을 내 앞으로 달아놓아 주십시오. 나 바울이 친필로 이것을 씁니다. 내가 그것을 갚아 주겠습니다. 그대가 오늘의 그대가 된 것이 나에게 빚진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굳이 말하지 않겠습니다.(17-19)
여기서도 가시 돋친 표현이 매우 분명하게 드러난다. 바울은 마치 빌레몬에게 지불할 "계좌"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데, 빌레몬 자신은 "오늘의 그대가 된 것"이라는 말에서처럼, 곧 기독교인이 된 것이 바울에게 "빚진 것"이라는 말이다. 빌레몬으로서 더욱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은, 바울 자신이 이 구절을 큰 글자로 써서, 마치 차용증에 서명을 하여, "사랑하는 빌레몬아, 그대는 이것을 법적인 문서로 만들기 위해 서명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구나"라고 말하는 셈이다. 이 대목에 이르러서는, 난처해진 빌레몬은 자신이 도무지 무슨 꼴을 당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게 되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개인적인 편지지만 공개적인 편지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어서 바울은 또 다시 강력하게 밀어붙인다.
형제여, 나는 주님 안에서 그대의 호의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마음에 생기를 넣어 주십시오. 나는 그대의 순종을 확신하며 이 글을 씁니다. 나는 그대가 내가 말한 것 이상으로 해주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나를 위하여 숙소를 마련해 주십시오. 여러분의 기도로 내가 여러분에게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2)
이 세 구절의 리듬을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 구절(20)은 부드럽다. 이 구절은 빌레몬을 또 다시 "형제"라 부르며 "나의 마음에 생기를 넣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마치 바울이 편지의 시작 부분에서 사용했던 똑같은 단어들(7)을 가리킴으로써 편지를 끝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기억하듯이, 7절 다음에는 바울이 빌레몬에게 명령하기보다는 간청하겠다는 말(8-9)이 이어진다.
그러나 이 세 구절에서는 그 다음 구절인 21절이 앞의 8-9절을 무효로 만들어버린다. 즉 "나는 그대의 순종을 확신한다"(21)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그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아주 담대하게 명령할 수도 있지만, 우리 사이의 사랑 때문에 오히려 그대에게 간청하려 합니다"(8-9)는 말을 무효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므로 이것은 결국 명령이다. 그러나 누구의 명령인가? 바울의 명령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명령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명령인가, 아니면 이들 모두의 명령인가? 세 번째 구절(22)은 한 번 더 친구와 동급자의 언어로 되돌아가지만, 여기에도 약간 날이 서 있어서, 마치 "사랑하는 빌레몬아, 내가 총독의 감옥에 갇혀 있다고 해서 그대가 나를 두 번 다시 못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말아라" 하는 식이다.
그리고 편지의 매듭을 짓는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에바브라가 그대에게 문안합니다. 나의 동역자인 마가와 아리스다고와 데마와 누가도 문안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의 영과 함께 하기를 빕니다.(23-25)
이 편지의 종결은 그 시작과 마찬가지로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문제가 전부 개인적인 것이지만 사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반복함으로써, 이것이 공개적인 문제이며 그가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모두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빌레몬에게 상기시켜주고 있다.
 
 
 
 
 
정강길 (10-02-17 13:00)
 
아래의 글 역시 같은 출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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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바울이 아니라 로마서의 바울

바울은 갈라디아와 로마의 기독교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은총에 의해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에 관해 말했다. 이 장에서 우리는 로마서에 초점을 맞출 것인데, 다음 몇 가지 이유 때문에 로마서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선 로마서는 바울의 편지들 가운데서 가장 긴 편지로서, 고린도전서만이 그에 버금간다. 또한 로마서는 바울 자신이 방문했던 적이 없어 그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공동체에게 썼던 유일한 편지이다. 따라서 로마서는 바울이 예수의 의미와 복음의 중요성에 대한 그의 이해를 포괄적으로 설명한 유일한 편지이다. 로마서의 목적은 자신이 방문할 계획을 세웠던 공동체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자신이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전하려는 것이었다. 은총에 의해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것은 로마서 첫째 부분의 정점이다.
급진적인 바울이 이 말을 통해 무엇을 뜻했는지를 우리가 살펴보기 전에, 우선 기독교인들, 특히 개신교 신자들이 일반적으로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검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겠다. 첫째로, 이 말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내세(next life)로서, 우리가 어떻게 천당에 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때 기초가 될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행위"(works)와 율법(the law), 즉 우리들의 행동을 기초로 해서 심판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은총" (grace)과 "신앙"(faith), 흔히 "우리가 믿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에 기초해서 심판을 받을 것인가? 하나님께 더욱 중요한 문제는 우리의 행동인가 아니면 우리의 믿음인가? 종교개혁 이후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그 대답은 믿음으로서의 신앙(faith as beliefs)과 더불어 물론 선한 행동을 하려는 노력이 덧붙여진 것이었다.
둘째로, 앞의 질문이 함축하고 있듯이, "행위"와 "율법"은 "은총"과 "신앙"과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이해되어, 핵심적인 문제는 흔히 신앙 대 행위(faith versus works)가 되어버렸다. 셋째로, 이런 이해는 흔히 함축적으로 혹은 노골적으로 반(反)유대교적인 것으로 이해되는데, 왜냐하면 이런 이해는 "행위"와 "율법"을 유대교와 같은 것으로 간주하여, 마치 "율법"은 일차적으로 "유대교 율법"인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지난 몇 백 년 동안 개신교가 로마 가톨릭에 맞서왔던 논쟁에서, 개신교는 은총과 신앙의 종교인 반면에, 가톨릭은 흔히 "행위"의 종교로 간주되어 왔다.
이 모든 것은 바울이 의미했던 것에 대한 심각한 오해이다. 바울이 은총에 의해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을 말했을 때, 그는 우리가 어떻게 천당에 가는가에 관해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바울이 신앙과 행위를 대조시켰을 때, 그는 "행위 없는 신앙"(faith-without-works)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이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신앙에는 항상 행위가 포함되기 때문이다―"신앙 없는 행위"(works-without-faith)에 관해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불행하게도 너무 자주 존재하는 것이다. 즉 때로는 습관이나 죄의식 때문에, 때로는 생각 없는 반복으로, 혹은 계산된 위선으로 인해, 신앙 없는 행위 속에 매몰된 채 살아가는 것이다.
이 책에서, 특히 이 장에서, 우리는 바울이 오해되어왔고 지금도 여전히 오해되고 있는 방식들에 관해 자주 언급할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과거와 현재의 다른 사람들보다 바울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우리가 바울을 해석하는 기본 원칙은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즉 바울과 그의 로마서를 16세기의 논쟁적인 종교개혁의 세계로부터 끌어내어, 다시 1세기의 로마제국의 세계 속으로 정위치시킨다는 해석 원칙 때문이다. 바울을, 바울이 아닌 사람을 위해 읽는다는 것은 잘못이며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즉 (바울은 루터교 신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가톨릭을 비판하는 루터교 신자로 읽거나, 더욱 잘못된 것은 유대교를 비판하는 기독교인으로 본 것이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말이다. 바울을 바울답게 읽는 것이 올바른 것이며 오해를 피할 수 있는 길이다. 즉 바울은 로마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언약의 유대교 속에 있는 기독교적 유대인(a Christian Jew within covenantal Judaism criticizing Roman imperialism)이었다.
로마서에 대한 주석들과 논의들은 작은 도서관을 채울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으며, 그 축적된 연구 결과들을 오늘날 일반 독자들이 파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서의 신학이 아무리 심오하다 할지라도, 로마서 자체는 당시 그 수신인이었던 로마의 기술자 공동체들과 상점 교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었음에 틀림없다. 더군다나 우리가 2장에서 보았던 것처럼, 로마서를 전달한 것은 뵈뵈(Phoebe)라는 이름의 여자 집사였다. 그녀는 이 편지를 들고, 로마의 한 공동체에서 다른 공동체로 찾아다니면서, 읽어주고, 설명해주고, 질문에 대답해주어야만 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자. 만일에 로마서 주석자들이 지난 몇 백 년 동안에 걸쳐 매우 난해한 것으로 만들어버린 것처럼 로마서가 정말로 난해한 것이었다면, 뵈뵈는 아마도 어거스틴이나 아퀴나스, 루터나 칼뱅보다 훨씬 더 위대한 신학자일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뵈뵈에게 무례하게 굴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당시 그 공동체들에게는 틀림없이 이해될 수 있었던 편지를 우리가 우리들 자신에게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편지로 만들어버린 것인가?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사실은, 단순하면서도 동시에 심오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예수는 언제나 그랬으며, 바울 역시 그랬다. 특히 로마의 기독교인 공동체들에 보낸 그의 편지에서 그랬다.

마커스 보그 & 존 도미닉 크로산, <첫번째 바울> 6장에서(근간)

제국의 성격을 드러낸 십자가

바울과 그의 청중들의 1세기 상황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반(反)제국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 바울이 요약한 말은 "예수가 죽었다"도 아니며, "예수가 살해당했다"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였다. 즉 예수는 단지 죽은 것이 아니며, 단순히 살해당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것이다. 이것은 예수가 로마제국의 당국자들에 의해 처형된 것을 뜻했다. 십자가는 로마제국의 처형 형태였다. 바울의 세계에서 십자가는 언제나 로마제국의 십자가였다.
로마제국은 십자가 처형을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국한시켰는데, 제국의 통치에 대해 (폭력적으로든 비폭력적으로든) 도전한 사람들과 끈질기게 반항하는 노예들(단순히 가끔씩 불순종하거나 다루기 힘든 노예들이 아니라)이 십자가 처형의 대상이었다. 즉 살인자나 강도는 다른 형태로 처형될 수는 있지만, 십자가에 처형되지는 않았다. 십자가에 처형되는 그 두 부류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모두 로마제국의 지배를 거부했다는 점이다. 십자가 처형은 그 처형 방식이 공개적이며 시간이 오래 걸리며 매우 고통스러운 형태로서, 그 메시지는 "이런 꼴을 당하고 싶지 않다면, 감히 제국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꿈도 꾸지 말아라!"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국가가 자행하는 고문이며 테러리즘이었다.
따라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은 즉시 예수가 반제국적인 인물이었으며, 바울의 복음이 반제국적인 복음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다. 제국이 예수를 살해했다. 십자가는 로마제국이 예수에 대해 "틀렸다"(no)를 선고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셨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예수에 대해 "옳았다"(yes)고 하신 것이며, 예수의 정당성(결백)에 대해 확증한 것이기 때문에, 그를 살해한 권력에 대해 "틀렸다"고 선고한 것이다.
예수가 로마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것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그의 정당성을 확증하셨다는 두 가지 패턴이 사도행전 앞부분에 두 번 나온다(행 2:23-24). 그 몇 절 뒤에, 약간 다른 표현으로 다시 반복된다. 즉 로마 당국에 의해 처형된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주님과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2:36). 물론 이런 말들은 바울의 말이 아니라 사도행전에 나온 말들이지만, 우리가 이런 말을 인용하는 이유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라는 선언의 명백하며 즉각적인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다.
로마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사실은 그 세계의 통치자들의 성격을 폭로한다. 즉 그들은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에(고전 2:8), 예수를 살해한 지배와 폭력 체제의 성격을 드러낸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셨다, 즉 그의 정당성을 확증하셨다는 것은 예수가 주님이지, 예수를 처형한 권력이 결코 주님이 아니라는 것을 뜻했다. 이것은 로마의 제국신학과 대결하며 그것을 맞받아 치는 것으로서, 예수가 주님이지, 카이사르가 주님이 아니라는 선언이다.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강조한 것의 일차적인 의미이다. 고린도전서의 탁월한 서론(1:17-2:16)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를 연달아 대조시키고 있다. 바울이 "지혜로운," "지혜"라는 말과 그 반대말인 "어리석은," "어리석음"이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이 이 서론에서 북을 두드리듯 울린다. 또한 "약한," "약함"과 "강한," "능력"도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바울은 이런 대조적 표현들을 거의 숨돌릴 겨를도 없이 사용하고 있다. 그의 수사학, 그의 사고방식과 그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을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 고린도전서 1:18- 2:8의 대부분을 인용하면서, 바울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따져보기 위해, 구절들 사이를 떼어놓을 것이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멸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이 세상은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그렇게 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이방]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바울이 이 말을 처음 사용했다]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이방]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로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병행을 이루며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것이 세상의 지혜로는 어리석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어리석음과 약함이 세상의 지혜와 능력보다 지혜롭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며,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습니다.

바울이 또 다시 "그리스도 예수"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라고 밝히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를 다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연결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 ...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바탕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구절은 사람의 지혜, 곧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 사이를 또 한 번 대조시키는 것으로 매듭지어진다.

우리는 성숙한 사람들 가운데서는 지혜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지혜는, 이 세상의 지혜나 멸망하여 버릴 자들인 이 세상 통치자들의 지혜가 아닙니다. 우리는 비밀로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시려고, 영세 전에 미리 정하신 지혜입니다. 이 세상 통치자들 가운데는, 이 지혜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이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찬란한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대조는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 사이의 대조로서, 하나님의 어리석음과 세상의 지혜 사이의 대조로 표현되기도 했다. 즉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게는 어리석음이며, 이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와 반대된다.
바울이 말한 이 세상의 지혜란 무엇인가? 바울이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는다"(1:22)는 말에서 "이방 사람들"을 나타내는 말로 "그리스 사람"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그리스 철학의 지혜를 염두에 두고 이 세상의 지혜를 말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의 지혜를 너무 좁게 이해한 것이며, 또한 잘못된 해석이다. 그리스 철학이 예수를 살해한 것이 아니었다. 로마제국의 당국이 예수를 살해했다.
바울 자신이 그렇게 말한다. 이 세상의 지혜는 그리스 철학이 아니라, "이 세상 통치자들의" 지혜다.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세상의 지혜는 당시의 지혜이며, 당시 통치자들의 지혜다.
바울의 역사적인 맥락에서는 그것이 물론 로마를 뜻했다. 그러나 그것은 로마제국 이상을 뜻했다. 문제는 단순히 로마제국의 당국이 아니었다. 마치 로마제국이 다른 대부분의 제국들보다 더욱 악했으며, 유대인들의 제국이나 기독교인들의 제국이 로마제국보다 더 나을 것처럼, 로마제국만을 문제삼은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단순하게 로마제국만을 고발한 것이 아니라, 로마제국 안에서 그가 본 것, 즉 로마제국이 이 세상의 지혜를 구현했다는 사실, 곧 이 세상이 정상적인 것으로 당연시하는 것(the normalcy of this world), 가장 일반적인 생활방식, 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고발한 것이다.
이 세상이 정상적인 것으로 당연시하는 것은, 기원전 3천 년대에 인류가 대규모 농업을 발전시키고 그로 인해 인구집중이 가능하게 된 이래로 가장 일반적인 사회형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 당시에 등장하게 된 것은 우리가 간단히 "지배체제"(domination systems)라 부르는 것으로서, 소수의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권력과 재물, "지혜"를 사용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만든 사회체제를 말한다.
소수가 다수를 지배했다. 그 소수는 폭력과 폭력의 협박을 통해 자신들의 지배를 확립했다. 우리가 4장에서 로마의 제국신학이라 불렀던 것처럼, 평화와 안정은 승리와 정복을 통해서 실현되었다. 지배체제는 제국과 같은 보다 큰 형태와 작은 왕국처럼 보다 작은 형태로 존재했다(또한 현재도 존재한다). 그 지배체제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은 폭력과 폭력의 위협을 포함해서 권력을 통해 지배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런 방식 이외에, 왕국들과 제국들이 달리 어떻게 만들어지며 유지되는가? 이것이 바로 세상의 지혜이며, 이 지혜에는 그 체제를 합법화시키는 이데올로기도 포함된다.
이런 세상의 지혜에 대한 바울의 고발은 직선적이다. 즉 이 세상 통치자들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고발이다. 세상의 지혜, 즉 폭력을 통해 지배하는 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당연시하는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와 정반대다. 십자가는 이 세상의 지혜가 어리석은 것임을 드러낸다. "어리석은/어리석음"을 뜻하는 그리스어는 "저능아"를 뜻하는 영어 단어(moron)의 어원이다. 하나님의 지혜/어리석음과 비교할 때, 세상의 지혜는 "멍청한" 것이다. 단순히 멍청한 것이 아니라, 잔인하며 살인적인 것이다.
이것이 또한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강조한 것의 의미이기도 하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라는 말에 이어서,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갈 6:14)라고 말한다. 즉 이 세상, 곧 제국이 정상적인 것으로 당연시하는 이 세상이 바울에게는 십자가에 달렸으며, 끝장이 났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는 이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달렸다. 그는 이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말이다.
다음 본문은 비록 논쟁이 되는 편지들 가운데 하나에서 온 것이며, 따라서 아마도 바울이 쓰지 않은 것일 테지만, 바울의 이런 이해와 일치한다. 아마도 80년대에, 즉 바울이 처형된 후 20 몇 년이나 그 이상이 지나서, 골로새서의 저자는,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키시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포로로 내세우셔서, 뭇사람의 구경거리로 삼으셨습니다"(골 2:15)라고 말한다. 어떻게 예수의 십자가가 그 통치자들을 "뭇사람의 구경거리"로 만들었는가? 예수의 십자가는 제국의 성격을 폭로하여, 지배체제와 그것을 합법화시키는 이 세상 지혜의 도덕적 파탄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이야기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예수는 주님이시다"는 선언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삶을 이 세상 파라오의 지배 아래 살기보다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도록 요청한 선언이다. 또한 출애굽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이 선언의 의미도 개인적이며 동시에 정치적이다. 바울이 그의 청중들로 하여금 이 세상의 지혜를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살기보다는 예수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을 자신들의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도록 요청했다는 점에서 개인적이었다. 이것이 바로 개인적인 변화의 길이다. 또한 이 선언은 폭력에 의해 유지되는 지배체제가 정상적인 것으로 당연시하는 것을 뒤집어엎었다는 점에서 정치적이었다. 그것은 그 통치자들을 고발했다. 즉 그 통치자들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고발이다. 더 나아가, 이 선언은 바울과 그의 공동체들로 하여금 이 세상이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에 대한 매우 다른 비전에 헌신하도록 요구했다.


십자가에 대한 두 가지 오해와 바울의 십자가 이해

두 가지 오해

우리는 십자가에 대한 바울의 선포는 두 가지 측면에서 오해되어왔다고 생각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밖에는 아무것도" 전하지 않는다는 말은 때때로 오직 예수의 죽음만이 중요한 것임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두 번째 오해는 더욱 널리 퍼져 있다. 즉 거의 천 년 동안,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를 죄를 위해 대신 희생된 것으로 가장 일반적으로 이해해왔다.

1. 오직 십자가(Only the cross). 십자가에 대해 바울이 강조한 말들을 그 문맥과 그 의미들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강조하게 되면, 예수의 일생 가운데서 마치 바울에게 중요했던 것은 예수의 죽음뿐이었던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학자들과 신학자들이 때때로 바울을 이런 방식으로 읽었기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바울의 입장에 동의했고 또 어떤 학자들은 바울을 비판해왔다. 더군다나, 많은 기독교인들 역시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는데, 예배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흔히 예수의 죽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데에도 그 원인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의 메시지가 일차적으로 또 배타적으로 예수의 죽음에 관한 것이었지, 예수의 삶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는 주장은 사실과 많이 다른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상상할 수 없다. 예컨대, 바울 자신과 바울이 개종시키려던 사람과 나눈 대화를 상상해보자. 바울과 루디아의 대화(행 16:13-15)를 상상해보자.
바울과 루디아는 북부 그리스의 도시 빌립보의 성벽 바깥에 있는 유대인 기도처에서 만났다. 소아시아의 도시 두아디라 출신의 루디아는 자색 옷감(로마 세계의 사치품목) 장수였으며, 꽤 부유했다. 루디아는 총명하고 능력이 있으며 국제적인 감각을 갖춘 여인이었으며, 유대교에 매력을 느낀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바울에게 이들이 중요했던 것은 3장에서 강조했다). 루디아는 개종하기 이전의 "탐색자"였다.
이제 바울이 루디아에게 예수에 관해 말해주는 것을 상상해보자. 또한 바울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물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에 초점을 맞추어 말하는 것을 상상해보자. 그 대화는 시작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루디아가 "당신이 말하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렸다가 죽은 사람들 사이에서 부활했다는데, 그 예수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하고 물을 것이다. 바울은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신경쓰지 말고,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당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한다면, 그런 대답은 루디아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결국 대화를 더 이상 계속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대답이 되고 말 것이다.
바울이 루디아에게 예수의 죽음에 관해 말하면서 예수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면, 그녀에게는 별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가 도대체 무슨 일을 했기에 세상을 통치하는 권력자들이 그를 처형하게 되었으며 또한 하나님은 그를 부활시키셨는가? 지금 주님이신 예수는 누구였는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은, 예수가 누구였으며, 무엇을 가르쳤으며,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해 말하는 것을 빼놓을 수 없었다(지금도 여전히 빼놓을 수 없다).

2. 대속제물로서의 십자가(The cross as substitutionary sacrifice). 바울이 십자가를 강조한 것에 대한 두 번째 오해는 더욱 중요한 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죽음을 죄에 대한 대속제물로 이해하여 왔다.
예수의 죽음을 이렇게 보는 방식은 매우 낯익은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과 기독교에 관해 들어본 적이 있는 비기독교인들은 십자가가 뜻하는 것이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는 우리 죄를 위해 죽었다.
예수는 죄에 대한 희생제물이다.
예수는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다.
예수는 죄에 대한 변상(payment)이다.

이런 십자가 이해에서는 처벌, 대리(代理, substitution), 변상과 같은 개념이 핵심적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처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예수가 우리를 대신해서 그 값을 치렀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죄와 잘못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우리 시대에도, 어떤 기독교인들은 이런 십자가 이해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라고 강력하게 옹호한다. 다른 기독교인들은 이런 십자가 이해에 대해 마음이 편하지 않은데, 특히 하나님이 피의 제물을 요구했으며 예수가 그 제물이었다는 개념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이런 십자가 이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지 못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이런 십자가 이해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정통 기독교의 의미라고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런 십자가 이해는 천 년이 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1097년에 캔터베리의 안셀무스(Anselmus of Canterbury)가 쓴 신학 책에서 처음 등장한 것이다. {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는가?}(Cur Deus Homo?)라는 책제목 자체가 그 책의 목적을 말해준다. 즉 왜 하나님은 예수 안에 성육할 필요가 있었는가? 안셀무스는 다음과 같은 논증으로 그 질문에 대답한다.

1.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불순종 때문에, 우리는 모두 죄인들이다.
2. 용서는 변상을 요구한다. 변상없이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는 것은 죄가 하나님께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우리가 불순종한 값은 반드시 갚아야만 한다.
3. 그러나 무한한 존재이신 하나님께 대해 우리가 진 빚은 무한하다. 그러므로 유한한 존재는 그 빚을 갚을 수 없다. 오직 무한한 존재만이 무한한 빚을 갚을 수 있다.
4. 그래서 예수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나님의 성육신으로서 그는 무한한 존재이며, 그의 죽음은 우리의 불순종에 대한 값을 치르기 위한 대속제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서받을 수 있다.

안셀무스 이후 시대에는 십자가에 대한 이런 이해가 "보통 기독교"의 한 부분이 되었다. "보통 기독교"란 말은 경멸하는 뜻이 아니라 단순히 "대부분의 보통 기독교인들이 믿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지난 천 년 동안과 오늘날까지도, 대부분의 기독교인들, 심지어 안셀무스에 대해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도,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우리 죄를 위한 대속제물로 생각해왔다.
멜 깁슨 감독의 2004년작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Christ)은 이런 십자가 이해를 잘 보여준다. 이 영화는 예수의 생애에서 마지막 12시간, 즉 그의 체포, 고문, 유죄선고, 죽음에 초점을 맞춘 영화로서, 예수에 대해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죽음이라는 생각만이 아니라, 예수가 이 모든 수난을 겪은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라는 생각을 강조한 영화다. 그는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다. 그리고 예수가 그처럼 엄청난 고통을 겪은 것은 우리의 죄가 그만큼 엄청나기 때문이다. 작고한 교황을 비롯해서 많은 가톨릭 신자들과 개신교 신자들이 이 영화에 열광한 것은 십자가에 대한 이런 이해가 기독교인들 사이에 얼마나 넓게 퍼져있는지를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십자가 이해가 복음의 핵심이라고 믿는다. 어떤 기독교인이 "당신은 십자가를 믿습니까?"라고 묻거나, "예수님이 당신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걸 믿습니까?"라고 물으면, 그 물음이 뜻하는 것이 바로 이런 십자가 이해다. 즉 예수가 우리를 대신해서 죽음으로써 대속제물이 되었다는 것이, 많은 기독교인들이 십자가의 의미를 바라보는 렌즈가 되었으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라는 말을 들을 때 걸러서 듣는 여과장치가 되었다.
문제는 안셀무스의 논증이 아니다. 그 논리는 나무랄 데 없다.

(문제는 안셀무스의 만족설이 제1차 십자군 전쟁을 준비하던 중에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Antony W. Bartlett이 지적한 것처럼, 하나님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는 논리는 성지 예루살렘을 무슬림들에게 빼앗긴 기독교인 군주들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군인들은 마땅히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논리였다는 점이다. Cross Purposes: The Violent Grammar of Christian Atonement (Harrisburg, Pa.: Trinity Press International, 2001), 103-4; Kwok Pui-lan, Postcolonial Imagination & Feminist Theology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5), 13에서 재인용. - 옮긴이.)

문제는 이런 십자가 이해가, 바울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복음의 핵심으로 만들 때 뜻했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속제물은 바울에게 낯선 것이었다.
실제로 예수의 십자가를 죄를 위한 대속제물로 보는 것은 틀린 역사이며, 해로운 인간론이며, 불량한 신학이다. 그것이 틀린 역사인 이유는 그것이 바울 당시에는 없었던 예수의 죽음에 대한 이해를 거꾸로 바울에게 투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장의 뒷부분에서 왜 그것이 해로운 인간론이며 불량한 신학인지를 설명하겠다.

십자가에 대한 바울의 이해

이제부터 바울이 예수의 십자가 안에서 보았던 의미를 찾아볼 것인데, 먼저 두 가지 요점을 지적하고 싶다. 첫째로 이 장을 시작하면서 언급한 것처럼, 바울에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함께 간다. 하나가 다른 것에 의미를 준다. 즉 예수의 십자가는 바울에게, 하나님이 예수를 부활시켰다는 확신이 없었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이 확신이 없었다면, 예수의 십자가는 바울에게 단지 로마제국이 처형한 또 하나의 죽음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처럼 부활은 십자가에 의미를 주었다. 바울의 다마스쿠스 체험은 바울을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죽음을 이해하는 바울의 방식도 불가피하게 변화시켰다. 그의 죽음은 더 이상 단순히 하나의 처형이 아니라 계시였다.
부활이 십자가에 의미를 준 것처럼, 십자가 역시 부활에 의미를 주었다. 예수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죽었다는 것을 상상해보자. 예를 들어, 예수가 자신의 몸을 돌보려 하지 않은 채 용감하게 전염병 환자들을 돌보다가 죽었으며, 죽은 사람들로부터 부활했다고 상상해보자. 그의 부활이 똑같은 의미를 지닐 것인가? 부활한 분이 십자가에 달린 분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문제가 되는가?
바울에게는 이 문제가 분명히 중요하다. 십자가가 부활절에 의미를 주는 것은 부활절이 십자가에 의미를 주는 것과 같다.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의 의미도 없다. 십자가와 부활이 함께 계시였다. 실제로 복수로 "계시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적절한 것은 십자가와 부활이 한 가지 이상을 계시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요점은 "속죄"(atonement)라는 말의 의미에 관한 것이다. 기독교 신학에서 "속죄의 교리"는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다루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속죄는 대속(代贖, substitutionary atonement)이라는 특별한 이해로 간주되어 버렸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속죄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질문하면, 그들이 묻는 것은 십중팔구 대속을 믿는지를 묻는 것이다.
그러나 속죄라는 말에는 훨씬 폭넓은 신학적 의미가 들어 있다. 바울이 십자가에서 보았던 속죄의 의미를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속죄의 폭넓은 의미를 되살릴 필요가 있다. 다른 많은 일반적인 기독교 용어들과 마찬가지로, 속죄라는 용어도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 속죄는 화해의 수단(a means of reconciliation)을 가리킨다. 속죄는 분열이나 불화, 소외된 상황을 전제한다. 그런 불화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어떻게 화해할 것인가? 이것이 속죄의 문제다.
속죄가 지닌 폭넓은 의미를 보여주는 것은 그 말을 재구성하는 방식이다. 즉 속죄(atonement)는 다시 "하나됨"(at-one-ment)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과 하나됨은 어떻게 가능한가? 예수의 십자가는 여기서 무슨 역할을 하는가? 예수의 죽음이 어떻게 하나됨을 가져오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신약성경 전체에서만이 아니라 바울에게도,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최근에 어느 학자는 바울이 십자가의 속죄하는 의미에 관해, 열 가지 이상으로 말했다고 썼다. 그것은 좀 과장일 것이지만, 지나친 과장은 아니다. 우리는 바울의 십자가 이해를 세 범주로 나눌 것이다. 즉 십자가는 제국의 성격을 드러내며, 개인적인 변화의 길을 보여주며, 하나님의 성격을 계시한다.

마커스 보그 & 존 도미닉 크로산, <첫번째 바울>(근간)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해야 합니다"

바울은 기독교의 평등성과 로마인들의 계급구조 사이의 반대, 바울의 기독교 신학과 로마의 제국신학 사이의 반대, 그리스도와 카이사르 사이의 반대를 어떻게 하려고 의도했기에, 정확히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충고나 명령을 하는 것인가? 그 전체 문단을 살펴보자.

사람은 누구나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해야 합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이미 있는 권세들도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권세를 거역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요, 거역하는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치안관들은, 좋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고, 나쁜 일을 하는 사람에게만 두려움이 됩니다. 권세를 행사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으려거든, 좋은 일을 하십시오. 그러면 그에게서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권세를 행사하는 사람은 여러분 각 사람에게 유익을 주려고 일하는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그러나 그대가 나쁜 일을 저지를 때에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는 공연히 칼을 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나쁜 일을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집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진노를 두려워해서만이 아니라, 양심을 생각해서라도 복종해야 합니다. 같은 이유로, 여러분은 또한 조세를 바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꾼들로서, 바로 이 일을 하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든 사람에게 의무를 다하십시오. 조세를 바쳐야 할 이에게는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바쳐야 할 이에게는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해야 할 이는 두려워하고, 존경해야 할 이는 존경하십시오.(롬 13:1-7)

학자들은 위의 질문에 대해 몇 가지로 설명을 했다. 그 가운데 두 가지만 살펴볼 것인데, 비록 우리가 그 설명의 타당성을 인정하지만, 우리는 바울의 의도에 대한 제3의 해석을 주장할 것이다.
첫째로, 바울의 이 본문을 일반적이며 제한이 없는 원리로 간주하는 한, 그것은 바울의 모든 편지들 가운데 가장 분별없는 본문들 가운데 하나가 된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 본문이 어떻게 이용되었는가를 되돌아보면, 바울은 분명히 이런 본문을 결코 쓰지 말아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둘째로, 이 본문은 50년대 중반에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죽고 십대의 네로가 황제로 등극한 혼란한 상황에 처한 로마인들에게 쓴 것이다. 그 일반적인 시작 부분은 조세와 관세에 관한 구체적인 끝마디 선언의 기초를 잡으려는 의도였다. 다시 말해서, 이 본문은 잘못된 이유 혹은 부적절한 이유 때문에 순교 당하는 것을 피하려는 의도였다는 말이다. 현대 시대에 이와 비슷한 사례는 본회퍼가 에버하트 베트게에게 보낸 편지에서, 1940년 6월 17일, 프랑스가 항복했다는 뉴스를 듣고 까페에 있던 모두가 일어나서 나찌에게 경례를 했다는 것이다. 본회퍼는 "당신의 팔을 들어 올리시오!"라고 말했다. "당신은 제 정신인가요? 우리는 지금 매우 다른 것들을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지 그딴 경례 따위에 목숨을 걸어서는 아니 됩니다." 이처럼 경례나 조세 혹은 관세 따위를 위해서 순교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순교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이 본문을 쓴 목적에 대해 다른 해석을 제시하고자 하는데,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쓴 편지의 최초 필사본들은, 신약성서 본문의 다른 모든 필사본들과 마찬가지로, 현재와 같은 장(章)과 절(節)로 나뉘어지지 않은 채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로마서 13장 1-7절에 초점을 맞추어, 마치 이 대목이 바울 사상의 완전히 통일된 하나의 단락인 것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생각함으로써 그 앞뒤 문맥을 무시하기가 매우 쉽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바울의 이 단락이 12장14절에서 시작되어 13:1-7을 거쳐 13장10절에서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면, 즉 이 유명한(악명 높은) 본문을 12:14-13:10의 문맥 속에서 읽고 해석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살펴보자.
특히 12:14-13:10의 전체 단락이, 예수가 산상설교에서 말한 것, 즉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들에 대한 폭력 사용을 부정하는 급진적인 언어들을 얼마나 철저하게 반영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실제로 이 전체 단락은 마태 5:39-48과 누가 6:27-36에 나타난 예수의 메시지와 똑같은 바울의 표현이다.
첫 번째 병행. 예수는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누가 6:27-28)고 말한다. 바울은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을 하고 저주를 하지 마십시오"(롬 12:14)라 말한다.
두 번째 병행. 예수는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마태 5:39) 하고 말한다. 바울은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롬 12:17), 그리고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롬 12:21)라고 말한다.
세 번째 병행. 방금 본 것처럼, 예수는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마태 5:39) 하고 말한다. "맞서지 말아라"는 말의 그리스어 동사는 anti + histemi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리스어 사전(Liddell & Scott)은 이 동사가 "특히 전투에서, 맞서다, 저항한다, 대적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마태 5:39에서, 그 말은 "폭력적으로 대항한다"는 뜻이다.
로마서 13:1-7에서 바울이 말하는 대항의 개념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폭력적인 대항을 문제삼고 있으며, 마태 5:39보다 그것을 더욱 강조한다. 바울이 다음 두 절에서 그리스어 동사 두 개를 어떤 순서로 사용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권세를 거역하는 (anti + tasso) 사람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는 (anti + histemi) 것이요,
거역하는 (anti + histemi)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노를 두려워해서만이 아니라, 양심을 생각해서도
복종해야 (hupo + tasso) 합니다.(13:2, 5)

anti + histemi가 (군사적인) 폭력을 생각나게 한다면, anti + tasso는 더욱 그렇다. 그리스어 사전은 anti + tasso를 "대결하다, 전투에서 서로 겨누다"는 뜻과 "맞서다, 얼굴을 맞대다, 전투에서 맞부딪치다"는 뜻으로 설명한다.
이 동사는 anti, 즉 "맞선다"는 말과 taxis, 즉 "정렬, 군대의 전투대형이나 배치, 포진... 군인들의 한 횡렬이나 종렬... 군인들의 한 본대, 중대"라는 말에서 온 동사로서, "전술"을 뜻하는 영어 tactics는 이 그리스어 어원에서 온 말이다.
마지막 병행. 예수는 마태복음(5:44)과 누가복음(6:27-28) 모두에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룬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아라. 살인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탐내지 말아라" 하는 계명과, 그 밖에 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는 말씀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13:8-10)

바울은 이 세 절 속에서 "사랑"을 다섯 번이나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바울이 로마서 13:1-7에서 무엇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가 하는 것을, 이 본문을 12:14-13:10의 전체 맥락 속에 놓고 읽었을 때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본문은 물론 로마가 요구한 조세와 관세에 관한 것이며, 정확히 그런 세금을 폭력적으로 거부하는 것에 관한 것이며, 기독교인들 사이에 돌아다니는 폭력적인 세금 반란의 유령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바울을 너무나 질겁하도록 만든 것이기 때문에, 그런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매우 지각이 없으며 제한이 없는 말을 하게 된 것이다.
바울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기독교인들이 살해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해하게 되는 것이며, 로마가 기독교인들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로마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로마의 평화와 그리스도의 평화 사이의 궁극적인 차이를 강조하는 것이다.

마커스 보그, 존 도미닉 크로산, <첫번째 바울>(근간)

정복자가 신이 된 역사 - 로마의 제국신학

사령관 막사로부터 신전의 벽에로

기원전 1세기 중엽에, 거의 한 세기 동안 계속된 격렬한 사회적 소요사태와 원한에 사무친 계급간의 투쟁이 로마의 최악의 악몽으로 변하여, 양편 모두 군단 병력이 충돌하는 끔찍한 내전으로 치달았다. 모든 게 끝장난 것처럼 보였다. 로마는 파멸되었고, 로마제국은 끝장났으며, 그 해체과정의 참혹함 가운데 지중해 세계를 파괴할 것처럼 보였다.
호레이스는 그의 {서정시}(Epodes)에서, "어떤 미친 광란이 우리를 몰아가는가, 아니면 어떤 강력한 힘, 혹은 잘못이 우리를 몰아가는가?"(7.13-14)라고 물었다. 로마가 시작될 때 로물루스(Romulus)가 쌍둥이 동생 레무스(Remus)를 살해한 것이 결국에는 "가혹한 운명이 로마인들을 쫓고 있으며, 형제를 살해한 죄가 후손들에게 저주"를 뜻하는 것인가?(7.17-20). 이제 "두 번째 세대는 내전으로 가루가 되고 있으며, 로마는 그 자신의 세력으로 인해 비틀거리고 있다"(16:1-2)고 그는 말했다. 아마도 로마는 "우리들 스스로 파괴해버릴 것이며, 우리 사악한 세대는 저주받은 세대"로서, 마침내 사나운 짐승들과 더욱 사나운 야만인들이 "우리 도시의 잿더미"를 배회하게 될 것이다(16.9-12).
그러나 기원전 31년 9월 2일, 그리스 북서 해안의 악티움 앞 바다에서 옥타비아누스, 즉 조만간 아우구스투스가 될 옥타비아누스는 고대세계의 마지막 대 해전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 함대를 격파했다. 그는 그 두 사람을 추격하여 결국 그 둘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모두 자살하는 것으로 끝나게 만들었지만, 그는 악티움의 북쪽 갑(岬)에 있던 자신의 사령관 막사(tent)를 성지(聖地)로 만들라고 지시한 후 그들을 추격했던 것이다. 그 자신의 사령관 막사 터 자체를 성소로 만들기 위해, 적군에게서 포획한 함선들에서 떼어낸 청동 충각(衝角, attack ram)의 1/10을 쏟아 부어야만 했다.
이렇게 그 성소의 정면을 장식한 후에, 옥타비아누스는 그 성소 위에 매우 커다란 라틴어 대문자로 선언문을 새기도록 만들었다. 그 선언문은 단순히 그 성소를 봉헌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선언문은 그 자신이 성소를 봉헌했다고 썼다. 그 선언문의 상당부분은 아직도 그곳에 보존되어 있으며, 비록 2차 세계대전 이전에 기록했던 그 선언문의 부분들은 사라져버렸지만, 다른 부분들은 그 이후에 복구되었다. 여하튼, 우리는 그 선언문을 충분히 재구성할 수 있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는, 하나님의 아들[DIVI F]로서, 이 지역의 공화정을 위해서 그가 싸웠던 전쟁에서 승리한 후, 그가 다섯 번째로 집정관(consul)이 되고 일곱 번째로 정복자(imperator)가 되어 육지와 해상에서 평화를 확보한 이후, 적군에 대한 공격을 명령했던 막사를 마르스(Mars, 軍神)와 넵튠(Neptune, 海神)에게 봉헌하면서 해전의 전리품들로 장식했노라.

이 성소 낙성식 선언문은, 로마의 제국신학의 기본 구조가 황제 자신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그에게서 구체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명하게 요약해주고 있다.

종교 → 전쟁 → 승리 → 평화

당신은 먼저 신들을 예배하고 신들에게 희생제물을 바쳐야 한다. 그러면 당신은 신들이 당신 편에 있는 상태에서 전쟁에 나갈 수 있다. 그럼으로써 물론 당신은 승리할 수 있다. 그 다음에야 비로소 당신은 평화를 얻는다. 이것이 로마제국의 평화 계획의 구조적인 순서이며, 당신은 이것을 로마제국 전역에 걸쳐서 문서들과 비문들, 동전들과 형상들, 동상들과 신전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핵심에서 로마의 제국신학은 "승리를 통한 평화"(peace through victory)를 선포하며, 혹은 이 비문에서처럼 "승리"와 "육지와 해상에서 평화를 확보"한다고 선포하는데, 그 마지막 라틴어 구절(pace parta terra marique)은 거의 북을 치는 리듬과 같다. "승리를 통한 평화"라고 로마는 말했다. 실제로 그 이전이나 그 이후에나, 제국의 이런 평화 계획 이외에 또 다른 어떤 대안적인 평화 계획이 단 한번이라도 있었던 적이 있는가?

<첫번째 바울>

바울의 도시 선교 전략

바울은 도시 사람이었으며, 그가 사도로서 활동한 것 역시 전부 도시에서 벌인 활동이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예수와 매우 달랐다. 예수는 작은 마을에서 자라났으며, 공적인 활동 전부가 농촌에서 시골 마을들과 작은 성읍들을 무대로 했다. 비록 바울이 도시에서 도시로 여행하는 동안 농촌 지역을 거쳐갔지만, 사도행전이나 그의 편지들 속에 그가 통과했던 마을들과 성읍들에서 사람들을 개종시키려 했다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바울은 도시들에 초점을 맞추었을 뿐만 아니라, 주로 로마 지방들의 수도(capitals)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즉 출생 장소였던 길리기아의 수도 다소를 비롯해서, 시리아 안디옥의 경험을 거쳐, 마케도니아의 데살로니가, 아카이아의 고린도, 소아시아의 에베소 등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그런 도시들에서의 생활, 특히 그런 수도와 같은 대도시의 생활은 어떠했는가?
바울의 도시들. 지중해 세계의 과거를 찾아다니는 오늘날의 여행자들은 "기념물"과 같은 유적들을 보게 된다. 즉 2천 년 동안 살아남은 건축물들로서 도로, 하수구, 아치(arches), 신전, 광장, 주랑, 수도교, 분수, 목욕탕, 극장, 원형극장, 경기장 등이 그것이다. 어떤 도시들에서는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대저택들도 남아 있다. 우리는 이런 건축물 속에서 과거의 영광을 보며, 그것도 매우 인상적인 영광이다.
그러나 우리는 "평민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들의 집들과 동네는 오랜 세월을 견디기에는 너무 엉성해서 모두 사라졌다. 몇 가지 단서들만 있어도 평민들의 생활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평민들이 그런 대도시들에 살았다는 사실 자체를 우리는 너무 쉽게 망각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이 함께 살면서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은 도시의 평민들이었다.
고대 세계의 "평민들"은 도시 인구의 대다수였다. 그들은 도시의 노동자 계급이었다. 다음 목록은 그 전체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직업에 대한 상상을 촉발시키기 위한 것이다. 즉 마부, 가축 상인, 청소부, 공공건물의 관리인, 목욕탕 시중드는 사람, 건축 노동자, 벽돌 제조공, 석공, 목수, 가죽 무두질하는 사람, 가축 도살자, 빵굽는 사람, 방적공, 직조공, 그리고 옷감, 가죽, 도기, 금, 은, 나무, 돌을 다루는 기술자들 (모든 것을 손으로 만들어야만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다양한 물건들을 도매하고 소매하는 상인들, 그리고 때로는 일감을 찾지 못하던 일용직 노동자 등이다.
도시 노동자 계급에는 일을 할 수 없었던 사람들 혹은 여러 가지 이유들, 즉 나이, 질병, 기술 부족, 고용 부족, 신체장애 등으로 인해 가끔씩만 일을 할 수 있었던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극빈층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부득이 거지가 되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힘겨운 가족들의 빈약한 수입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연명했다.
또한 도시 노동자 계급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필요에 따라 읽고 쓸 줄을 알았다. 어떤 사람들은 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유대교 경전을 포함해서 고대 문헌들에 친숙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 집단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하게 설명하겠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을 읽지 못했는데, 지적인 능력 때문이 아니라 글을 배울 기회가 없었거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경제적으로 안정을 누렸는데, 아마도 상점 운영을 잘 했거나 기술이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부자 후견인들에 의해 장기간 고용되었는데, 그 후견인들이 불행을 당하거나, 그들의 눈밖에 나기 전까지는 안정된 미래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 계급 내에서의 경제적인 차이는 다른 부자 및 권력자 계급과의 차이에 비해 사소한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도시 노동자 계급의 생활을 상상해보기로 하겠다. 우선, 고대 세계의 도시들은 현대 도시들과는 매우 달랐다. 오늘날 우리가 도시를 생각할 때는 흔히 "중심가"에 상업 지역이 있고, 그 주변에 거주지역이 펼쳐져 교외로까지 확장되는 것을 생각한다. 우리에게 도시는 크게 펼쳐진 모습이다.
그러나 고대 도시들은 그렇지 않았다. 도시들은 규모가 작았는데, 그 분명한 이유는 성벽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 성벽을 쌓는 것은 매우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도시 인구가 늘어나도 성벽 안에 밀집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인구밀도가 매우 높았으며, 특히 노동자 계급이 살던 지역이 그랬다.
우리는 고대 로마 지방 시리아의 수도였던 안디옥에 대한 최근의 연구를 통해 이런 사실을 살펴볼 수 있는데, 이것은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의 {기독교의 등장}(The Rise of Christianity, 1997) 덕택이다. 1세기에 안디옥의 인구는 대략 15만 명이었으며, 그 성벽 안의 지역은 5km2로서, 인구밀도는 1km2당 3만 명에 이르렀다(pp. 147-62). 이것은 오늘날 시카고의 6배, 뉴욕의 15배, 서울의 2배에 해당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도시들은 고층빌딩 속에 "수직적으로" 살고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로마제국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안디옥에서도 성벽 안의 거의 40%에 이르는 상당한 지역이 공공건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부자들의 대저택들이 나머지 몇 퍼센트를 점유했다. 따라서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도시 노동자 계급은 그 지역의 60%가 채 못되는 지역에서 살았다. 따라서 그들의 인구밀도는 1km2당 5만 명에 이르러, 뉴욕 맨해튼의 두 배가 되었지만, 맨해튼과 같은 고층건물들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노동자 계급이 살았던 건물들은 남아 있지 않지만, 우리는 문헌 자료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대부분이 여러 층으로 된 건물에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건물들은 기껏해야 5층이나 6층이었던 것은 고대의 주택 건설 기술의 한계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주택의 주인이라기보다는 임차인이었다. 고대에 "공동 소유권" 제도가 있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많은 가족들이 마련할 수 있었던 단칸방에서 살았으며, 그 방을 주로 침실과 창고로 사용했다. 그들은 낮에는 밖에서 일하느라 보냈는데, 날씨가 나쁘거나 병에 걸려 일을 하지 못할 때만 예외였다.
이처럼 인구가 밀집된 거주 지역에 하수도 시설이 없다는 것은 가장 큰 문제였다. 그 도시들을 여행해 본 사람들이 흔히 놀라게 되는 것은 부자들의 대저택에 있는 정교한 수도시설이었다. 즉 수돗물, 실내 화장실, 목욕을 위한 온수 시설 등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공동주택에는 이런 시설들이 없었다. 수돗물이 없었기 때문에, 집에서 사용할 물을 길어와야 했으며 흔히 몇 층을 오르내려야 했다. 화장실 시설은 땅에 판 웅덩이였거나 요강이었고, 요강은 대개 좁은 길에 있는 도랑에다 비웠다.
하수도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악취가 심했을 뿐만 아니라 벌레들과 질병이 많았다. 고대 세계에서는 어디에서나 질병으로 인한 사망률이 높았으며, 특히 도시에서는 더욱 높았다. 질병으로 인한 사망률이 너무 높았기 때문에, 시골에서 인구가 계속적으로 유입되지 않았다면, 도시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유입되는 인구는 항상 넘쳐났다. 그 주된 이유는 로마제국의 경제정책이었다. 즉 농업이 체계적으로 상업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가족들이 소유한 작은 토지를 경작하여 생계를 이어갔지만, 점차 작은 토지들이 대지주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고, 이들 대지주들은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상업용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결과 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토지를 잃은 수만 명의 농민들은 일할 곳도 없거나 가족의 생계를 이어갈 수 없게 되자 도시로 몰려들 수밖에 없었다. 도시 노동자 계급의 대다수는 이처럼 새로 유입된 사람들로서 서로 간에 낯선 사람들이었다. 즉 도시로 이주했다는 것은 마을에서 대가족을 이루어 오랜 세월 살면서 서로 간에 도우며 살았던 전통적인 상부상조의 공동체를 상실했다는 뜻이었다. 더군다나 도시 안에서의 높은 사망률 때문에, 가족들과 함께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조만간 가족들을 잃고 혼자 남게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도시로 이주했다는 것은 또한 서로 다른 언어와 인종 집단이 함께 어울리게 되었다는 뜻이다. 안디옥은 1km2당 3만 명의 인구가 살았는데, 그 안에는 열여덟 개의 인종 구역이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오해, 경쟁, 적개심이 만연했으며 종종 폭동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바울이 여행했던 도시들은 그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의 유적들이 상징하는 영광에도 불구하고, "비참함, 위험, 공포, 절망, 증오심"으로 가득한 도시들이었다(p. 160)고 로드니 스타크는 결론지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도시선교를 했던 당시의 상황이었다. 바울이 도시선교를 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 자신이 천막 만드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막을 오늘날 캠핑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텐트나 전근대적인 의미에서 유목민들이 살던 천막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유목민들은 천막을 사러 도시에 오지는 않았다. 오히려 바울이 천막 만드는 일을 했다는 것은 천이나 가죽을 사용해서 차일(遮日, blind)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차일로서의 천막은 지중해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그 수요가 무척 많았으며, 기술만 있으면 가능했기 때문에 이동하면서 일하기가 쉬웠다. 그의 도구들은 가벼웠고 들고 다닐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어느 도시에서나 일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우리는 그가 예를 들어 고린도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상점(shop)에서 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생업이 서로 같으므로, 바울은 그들 집에 묵으면서 함께 일을 하였다. 그들의 직업은 천막을 만드는 일이었다"(행 18:3).

바울의 청중들. 바울은 로마 지방의 그런 수도들에서 무엇을 했는가? 그의 중요한 청중들은 누구였는가? 우리는 또 다시 사도행전에 나오는 누가의 이야기를 그 정보와 해석을 구분하기 위해 매우 주의 깊게 읽어야만 한다. 누가는 바나바의 선교전략을 바울에게도 포개어 놓았지만, 바울은 바나바 밑에서 선교전략을 배운 후에, 자기 혼자 선교여행을 하면서는 그 전략을 매우 과감하게 바꾸었다.
바울의 선교전략에 대한 누가의 이야기는 바울이 비시디아의 안디옥(13:14), 이고니온(14:1), 데살로니가(17:1), 베뢰아(17:10), 아테네(17: 17), 고린도(18:4), 에베소(18:19; 19:8) 등의 도시들에서 마다 즉시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동료 유대인들을 기독교적 유대교로 개종시키려 했던 것으로 설명한다. 바울의 선교전략에 대한 누가의 이해는 분명하며 한결같다. 즉 바울이 각각의 도시에서 항상 회당에서 그의 동료 유대인들과 더불어 전도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실제로 그랬는가?
바울 자신의 선교에 대한 이야기는 항상 자신이 "이방인들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는 주장으로 시작한다. 첫째로, 그는 우선 다마스쿠스에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이방 사람에게 전하게 하시려고, 그를 나에게 기꺼이 나타내 보이셨습니다"(갈 1:16)라고 말한다. 둘째로, 그 이후 바울은 언제나 자신의 소명을 그런 방식으로 말한다. 예를 들어, 로마서에서는 "모든 민족"에게로(1:5), "다른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1:13), "이방 사람들을 복족하게 하시려고 나를 시켜서 이루어 놓으신 것"(15:18)이라고 말한다. 끝으로, 로마서에서 그는 자신에 대해 특수한 칭호를 붙여, "이방 사람에게 보내심을 받은 사도"(11:13), "이방 사람에게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15:16)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만일 바울이 누가의 사도행전에서처럼, 회당에 가서 유대인들을 개종시키려 했다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신의 선교적 명령을 불순종한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운명에 대한 자신의 이해와도 모순되는 행동을 한 셈이다.
더 나아가, 바울은 50년경에 예루살렘 회의에서 그 자신과 다른 모든 사도들 사이에 합의했던 결정에 위배되는 행동을 했던 것이 된다. 우리가 위에서 말한 것을 통해 기억할 수 있는 것처럼, 예루살렘 회의의 문제는 기독교로 개종한 이방인 남자들에게 할례를 강요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리고 사도들이 합의했던 것은 그들에게 할례를 강요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의 사도들의 회의는 두 개의 분리된 선교를 창안했는데, 하나는 유대인에 대한 선교이며 다른 하나는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였다. 그리고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세 차례에 걸쳐 이방인들을 위한 자신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1. 베드로가 할례 받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은 것과 같이, 내가 할례 받지 않은 사람[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은 것...
2. 베드로에게는 할례 받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사도직을 주신 분이, 나에게는 할례 받지 않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사도직을 주셨다는 사실...
3. 그래서... 여고보[예수의 형제]와 게바[베드로]와 요한[야고보의 형제이며 세배대의 아들]은... 친교의 악수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이방 사람에게로 가고, 그들은 할례 받은 사람에게로 가기로 하였습니다.(2:7-9)

우리의 결론은, 바울이 각각의 도시에서 회당에 들어가 유대인들을 기독교적 유대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선교를 시작했을 수는 결코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다른 일을 위해서 회당에 갔었을 수는 있는데, 다마스쿠스에서의 하나님의 위임과 예루살렘 회의에서의 인간적인 위임을 지키는 선에서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찾아갔던 이방인들은 도대체 누구였는가?
우리는 대개 고대 세계의 유대인의 관점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구분되는 두 집단, 혹은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한 것처럼, "유대 사람과 그리스 사람"(3:28)을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세 번째 집단이 있었다. 즉 이방인으로 남아 있었지만--만일 그들이 남자들이라면 예를 들어 할례 받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지만, 우리가 회당의 이방인 참가자들(gentile synagogue adherents)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된 집단이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유대교 유일신론을 받아들여, 유대인의 도덕, 가족 윤리, 공동체의 가치를 존경하고, 특히 정기적으로 회당에 출석했던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이 집단에 관해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와 철학자 필로(Philo)와 같은 저술가들의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대 유대인 비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놀라운 사례는 아닐지라도 하나의 두드러진 사례는 오늘날 터키의 에베소 동쪽에 있는 도시 아프로디아스의 회당 문에 새겨진 재정적 기부자들의 명단이다. 이 명단에는 126명의 이름이 나오는데, 세 집단으로 구분할 수 있다. 즉 55%는 유대인들이며, 2%는 "개종자들"이며, 43%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렸던, 회당 참가자들이다(그 가운데 9명은 그 도시 의회의 회원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들 회당의 이방인 참가자들에 관해 누가를 통해 알 수 있는데, 이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보겠다. 사도행전 전체를 통해서 누가는 이들 회당의 이방인 참가자들을 묘사하는 데 두 개의 사로 다른 그리스어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첫째는 그들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라 부른다(행 10:2, 22, 35; 13:16, 26). 둘째 동사는 그들을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 혹은 "이방 사람 예배자들"이라 부른다(행 13:43, 50; 16:14; 17:4, 17; 18:7). 이들 회당의 이방인 참가자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나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에 대한 누가의 자료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누가는 위의 본문들에서 반복적으로 완전한 유대인과 이들 회당의 이방인 참가자들을 구분하고 있다. 즉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여"(행 13:16), "아브라함의 자손인 동포 여러분, 그리고 여러분 가운데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여"(13:26), "유대 사람들과 경건한 개종자들"(13:43), "유대 사람들과 이방 사람 예배자들"(17:17)로 구분한다(그러나 실제로 "참가자들"은 13:43에서 누가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개종자들"은 아니었다). 또한 회당 참가자들 가운데서 여자들은 특별히 강조되고 있으며, 그 중 일부는 중요한 인물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루디아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색 옷감 장수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었다"(16:14), "또 많은 경건한 그리스 사람들과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그렇게 하였다"(17:4).
우리는 회당의 이방인 참가자들 모두가 완전히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기독교를 반대했다는 기록이 있다. 즉 "그러나 유대 사람들은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의 지도층 인사들을 선동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였고, 그들을 그 지방에서 내쫓았다"(13:50). 그러나 애쨋건, 바울이 각각의 도시에서 항상 회당에 간 것은 유대인들을 개종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들 이방인 참가자들을 기독교적 유대교로 개종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게 우리의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바울의 자료들의 상당부분을 해명해준다.
바울이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혹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사실은, 유대인들이 바울에 대해 드러냈던 진정한 원한을 설명해준다. 바울은 회당 참가자들 가로채기를 했던 셈이기 때문이다. 만일 바울이 단지 그의 동료 유대인들에게 말했다면, 그들은 그를 비웃을 수 있었다. 만일 그가 단지 순전한 이교도들에게 말했다면, 그의 동료 유대인들은 그를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 바울과 유대인 회당이, 그들 이방인 참가자들이라는 제3의 집단을 놓고 서로 다투고 있었던 것이다. 회당은 "전통적인 유대교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한 반면에, 바울은 "기독교적인 유대교로 개종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더 나아가, 바울이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그들 개종한 이교도들이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와 같은 바울의 편지들 속에 나오는 신학을 이해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준다. 그들은 순전한 이교도들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회당에 출석하며 부분적으로 유대인의 관례를 지킴으로써 이미 유대교 신앙과 사상을 배웠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끝으로, 아마도 다른 점들보다 더욱 중요하게, 바울이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었다는 사실은 50년대 중반 이후 그의 놀라운 주장, 곧 "그러나 이제는 이 지역에서, 내가 일해야 할 곳이 더 없습니다. 여러 해 전부터 여러분에게로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므로, 내가 스페인으로 갈 때에, 지나가는 길에 여러분을 만나 보고, 잠시 동안만이라도 여러분과 먼저 기쁨을 나누려고 합니다"(롬 14:23-24)라는 주장을 설명해준다. 즉 30년대 중반부터 50년대 중반까지 겨우 20년 만에, 바울은 로마제국의 동부지역에서 일을 끝내고 이제는 서부지역으로 향하려 했다는 말이다. 바울이 어떻게 이런 주장을 할 수 있었는가? 이것은 바울의 도시 선교전략에 관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가 이처럼 놀라운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특별한 전략적 초점, 즉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자면, 그의 "인구학" 때문이었다. 바울은 자신이 선교 가능한 전체 도시들 가운데서 우선은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도시들을 선택했다. "나는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이름이 알려진 곳말고,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명예로 삼았습니다"(롬 15:20). 그 다음에는 그 "새로운" 도시들 가운데서, 로마의 지방 수도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그 중심 도시들에서 회당의 이방인 참가자들, 즉 사도행전에 나오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혹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을 겨냥했다. 한편, 누가 자신이 바로 이런 사람들 중에 하나였을 가능성이 있다. 바울이 이런 초점에 맞추었기 때문에, 겨우 20년 만에, 로마제국의 동부지역을 끝내고 서부로 갈 준비가 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울의 공동체들. 바울이 상점에서 기술자로 일을 했던지, 아니면 도시의 회당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을 스카우트(참가자 가로채기)했던지 간에, 이런 두 가지 활동은 모두 조직망(net- works)과 관련되었다. 바울이 회당에서 말했던 유대교에 심취한 사람들은 이방인과 유대인 양쪽 모두의 친구들과 연결고리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가 개종시킨 많은 유대인들은 이들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함께 뒤섞인 집단 출신이었을 것이다. 그는 상점에서 일하면서 주로 그 도시의 이방인 기술자 계급만이 아니라 그 상점 근처의 다른 이방인들과도 관계를 맺게 되었을 것이다.
바울의 공동체들은 작은 규모였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앞에서 인용했던 로드니 스타크의 초기 기독교 연구에서, 그는 기원후 60년까지 로마제국 전체의 기독교인 숫자를 2,000명으로 추정했는데, 바울의 진정한 편지들 대부분, 혹은 아마도 전부가, 60년까지는 완료되었을 것이다. 사도행전의 오순절 이야기는 훨씬 더 많은 기독교인들을 제시한다. 즉 기독교적인 설교의 첫날에만도 "약 삼천 명"이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행 2:41). 그러나 이것은 과장된 것이다. 누가는 고대의 다른 저술가들과 마찬가지로 흔히 과장된 숫자를 사용했다. 그보다 적은 숫자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보다 사실적이다.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의 본토에 대략 1,000명 정도 있었을 것이며, 나머지 1,000명은 제국의 나머지 지역, 주로 시리아, 소아시아, 그리스, 아마도 이집트와 멀리는 로마에까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바울이 공동체를 세운 도시들에서는 한두 곳을 제외하고는 기독교인 숫자가 100명을 넘지 않았을 것이며, 아마도 몇 명 혹은 몇 십 명이었을 것이다.
바울의 공동체들이 작은 규모였다는 두 번째 이유는 공간적인 제한 때문이었다. 특별히 교회 건물로 건축하게 된 것은 2∼300년이 지난 다음의 일이었기 때문에, 바울의 공동체들은 기존의 공간에서 모임을 가졌다. "가정 교회"(house churches)라는 말을 흔히 사용하지만, 오히려 "상점 교회"(shop churches)라는 말이 적절할 것이다. 즉 기독교인들이 상점에서 모였는데, 상점은 일반적으로 공동주택과 기타 건물들의 1층에 있었다. 상점들은 작았으며, 대부분 3m×6m를 넘지 않았으며, 그보다 작은 상점들도 많았다. 그보다 큰 모임이 가능했던 것은, 고린도에서처럼 개종자들 가운데 자신의 대저택을 소유하고 사람들을 대접할 만큼 부유한 사람들이 있을 경우였다. 그러나 대부분은 규모가 작은 모임이었을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또한 한 도시 안에 몇 개의 "상점 교회들"이 있었을 법도 하다.
바울은 그런 공동체 안에서의 생활에 대해 어디에서도 포괄적인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는 공동체 예배에 대한 매뉴얼을 쓰지도 않았다. 따라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이 비록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자주 모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주간에 한번 모였을까? 아니면 그보다 더욱 자주 모였을까? 이 질문에 대한 유일한 힌트는, 바울이 예루살렘의 기독교적인 유대인들을 위해 그의 기독교적인 이방인들로부터 헌금을 모았던 것에 관한 구절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성도들을 도우려고 모으는 헌금에 대하여 말합니다. 내가 갈라디아 여러 교회에 지시한 것과 같이, 여러분도 그대로 하십시오. 매주 첫날에, 여러분은 저마다 수입에 따라 얼마씩을 따로 저축해 두십시오. 그래서 내가 갈 때에, 그제야 헌금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고전 16:1-2)

우리는 이 헌금에 관해 에필로그에서 다시 설명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이 구절이 적어도 주간마다 모였음을 보여주지만, 한 주간에 한번 모였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실제로, 이들 모임이 규모가 작고 상점 근처에 살던 매우 헌신적인 사람들의 친밀한 공동체였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그 회원들은 서로간에 자주 만났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1:20에서 "주님의 만찬"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성만찬을 축하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은 모일 때마다 그렇게 했는가, 아니면 한 주간에 한번 "매주 첫날에" 했는가? 우리는 세례가 이 새로운 공동체로 들어가는 입회의식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는 세례의식이 가볍게 진행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세례를 받기 전에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교육과 분별의 시간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사도행전에서 개종자들이 때로는 "말씀"을 들은 직후에 세례를 받았던 것으로 묘사된 것은 실제로 그랬으리라고 상상하기 매우 어려운 대목이다. 그러나 기독교 공동체의 일부가 된다는 것은 로마제국에 의해 처형된 주님을 따른다는 뜻이었으며, 제국의 문명이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에 반대되는 생활방식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이었다. 이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우리가 급진적인 바울의 편지들을 통해 그 공동체를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재구성할 것이다.

늘오늘 (10-02-17 14:41)
 
바울을 인용하여, 불의와 억압이 합리화되는 현실.
불의와 억압에 저항하는 이들은, 비판의 화살을 바울에게 겨누었는데,
실제의 바울은, 불의와 억압에 저항했던 변혁가라는 논증이 제시되는군요.

낭패감은 이겁니다.
‘현실의 문제’가, 바울을 인용하는 과정에서, 문헌에 대한 ‘해석의 문제’로 돌변했다는 거죠.
전에 니체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때와 비슷합니다.

‘신’이 억압의 기제로 작동하는 현실.
‘신은 죽었다’라고 말한 니체를 인용했고, 이는 상식적인(?) 니체 인용에 해당되는 경우였지만,
‘반민주적인 너무나 반민주적인’이라는 저작이 제시되면서, 신과 현실에 대한 ‘문제 제기’는 실종되고,
니체 ‘해석에서의 우열’, 서양철학의 계보, 등을 따지는 모양새로, 댓글 공방으로 전개됐죠.


내가 무슨 말을 할려구 했더라? ??  --;;
ㅋㅋ 그러니까 말인즉슨,
제대로 해석할 자질과 정보를 갖춘 학자 지식인 여러분들이시여!
이거 어디 우리 같은 사람들은 변혁운동에 끼지도 못 하겠네 그랴?

ㅋㅋ^^ 한 판 붙자는 건 아니고요,
학자들의 세계에선 정보의 질과 양이 매우 중요하겠지만,
일상에선 정보의 방향성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

암튼, 무슨 주장할 때, 누구 인용하지 말아야겠어,, ^^;
글타고, 누구 인용을 안 할 수는 없으니,, 끌~ --;;
인용이 좀 틀리더라도, 부디, 살살~ ^^*

정강길 (10-02-17 15:40)
 
흔히 상식적 인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정작 들여다보니까
본래적 의미가 아닐 수도 있기에 그렇게 된 것이랍니다.
직접 비교 확인 검토해보시면 아실테지요. 관계적 현실에서
정보의 질과 양의 문제 역시 정보의 방향과도 동떨어질 수 없습니다.
글구 담론에 참여하는 한 늘오늘님 역시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고 있는
혹은 그 어떤 입장에 놓여 있는 학자적 맥락일 수밖에 없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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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 식물에 대한 편견을 넘기 - 『매혹하는 식물의 뇌』 읽기 미선 2091 08-25
267 존 매설리 <인생의 모든 의미>, 삶의 의미에 대한 백과사전 (1) 미선 2647 07-27
266 <역사적 예수 논쟁> 예수의 역사성에 대한 다섯 가지 신학적 관점 (1) 미선 2895 06-21
265 흥미진진한 고고학 저서, <기원과 혁명: 휴머니티 형성의 고고학> (1) 미선 2094 06-15
264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미선 2479 05-02
263 책소개 - <이성의 꿈>, <핀치의 부리>, <양자 정보 생명> 미선 2653 02-28
262 플라톤의 초-중-후기 저작들 소개 (서양 철학 공부의 기본 토대) 미선 6750 01-29
261 배철현 <신의 위대한 질문>, 인간의 위대한 질문> (1) 미선 4054 12-29
260 앤서니 케니의 서양철학사 제1권, <고대 철학>Ancient Philosophy (1) 미선 3295 12-23
259 [초강추] 노동의 대한 새로운 시각, 이반 일리치의 <그림자 노동> (1) 미선 3342 12-20
258 게오르그 짐멜, 『돈의 철학』(길) 코기토총서 세계사상의 고전 27 (1) 미선 3098 12-02
257 서양철학사 공부, 어떤 것부터 시작하고, 어떤 책들을 봐야 할 것인가? (5) 미선 32852 11-15
256 조지 레이코프 <프레임 전쟁>, "보수에 맞서는 진보의 성공전략" (1) 미선 3072 10-26
255 <행복산업> 자본과 정부는 우리에게 어떻게 행복을 팔아왔는가? (1) 미선 3280 09-26
254 <미움받을 용기> 철학자와 청년의 대화로 본 아들러 개인심리학 (1) 뱅갈고양이 3729 08-23
253 <진화의 무지개>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야말로 진화의 원동력이다. 뱅갈고양이 3167 08-02
252 <인간은 유전자를 어떻게 조종할 수 있을까>후성유전학이 바꾸는 우리의 삶 그… (1) 미선 3469 07-31
251 <구원과 밀매> 입양을 선교 수단으로 삼는 보수 기독교에 대한 고발 (1) 미선 3050 06-25
250 하코다 유지 외, <인지심리학>(거의 인지심리학 진영의 끝판왕격에 가까운 책) (1) 미선 3811 02-26
249 <종교 유전자>, 진화심리학으로 본 종교의 기원과 진화 (니콜라스 웨이드) (1) 미선 4655 02-16
248 앤드류 린지의 <동물신학의 탐구> (대장간, 2014), 같은 하나님의 피조물 미선 3895 12-15
247 [초강추] 리 스몰린, <양자 중력의 세 가지 길>(사이언스북스, 2007) (6) 미선 4642 12-07
246 크리스토퍼 코흐, <의식> 현대과학의 최전선에서 탐구한 의식의 기원과 본질 (1) 미선 6004 09-06
245 사회학 연구사의 명저, 조지 허버트 미드의 <정신 자아 사회> 미선 5801 07-29
244 거대한 불평등의 근원, <0.1% 억만장자 제국> (1) 미선 4094 07-02
243 Thomas Piketty, Capital in the Twenty- First Century 미선 3767 06-30
242 성경의 형식을 빌려 풍자한 <자본이라는 종교> 미선 3877 06-09
241 <사회복지사를 위한 정치경제학>, 사회복지 논쟁의 기초 이론서 추천 미선 4209 04-18
240 <직접민주주의로의 초대>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명쾌하고 정확한 입문서 (1) 미선 4520 04-08
239 [새책] 에코페미니스트 마리아 미즈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 여성, 자연, 식민지… 다중지성의… 3515 02-11
238 군사독재정권과 보수 개신교의 야합이 담긴 <산업선교, 그리고 70년대 노동운동&g… (1) 미선 4752 01-30
237 <사회주의>에도 여러 사회주의'들'이 있다! (1) 미선 4317 01-04
236 <지구의 정복자>, 유전자중심설에서 집단선택설로 입장을 바꾼 에드워드 윌슨 … (1) 미선 4644 12-12
235 "누가 왜 복지국가에 반대하는가" <복지국가의 정치학> (1) 미선 4488 12-04
234 [좋은세상 만들기 필독서!] 에릭 올린 라이트의 <리얼 유토피아> (3) 미선 4497 11-26
233 [정말 대단한 책] <신경 과학의 철학-신경 과학의 철학적 문제와 분석> (3) 미선 7420 11-23
232 [좋은책 추천!] 심리학 개론서의 최고봉, <마이어스의 심리학> (1) 미선 6919 11-20
231 "돈벌이 경제학에서 살림살이 경제학으로" 홍기빈 <살림/살이 경제학을 위하여>… (1) 미선 4922 10-18
230 [☆로열 반열에 올릴만한 걸작] 에릭 얀치의 <자기 조직하는 우주> 미선 5314 10-06
229 최신 사회학 이론 공부를 한다면 <현대 사회이론의 흐름>을 추천! (1) 미선 5737 08-17
228 요즘 유행하는 책들...CEO성공기, 명망 인사의 에세이, 유행적인 종교 비판, 취업 성… 미선 3988 08-14
227 Thinking with Whitehead: A Free and Wild Creation of Concepts, by Isabelle Sten… (1) 미선 4273 08-13
226 [좋은책추천] 신재식,<예수와 다윈의 동행> 기독교와 진화론의 공존 모색 (2) 미선 5637 08-04
225 이자벨 스땅제, <화이트헤드와 함께 사유하기> (브뤼노 라투르의 서문) (1) 미선 5183 07-02
224 [좋은책추천] 댄 스미스의 <인문 세계 지도>, 지금의 세계를 움직이는 핵심 트… (1) 미선 5389 06-27
223 <편향>(이남석), 나도 모르게 빠지는 생각의 함정 (1) 미선 6018 06-16
222 [좋은책추천] 르네 지라르의 모든 것을 풀어놓은 대담 <문화의 기원> (1) 미선 5246 06-01
221 정일권, <붓다와 희생양 - 르네 지라르와 불교문화의 기원> (2) 미선 6564 05-17
220 <불교 파시즘>, 선(禪)은 어떻게 살육의 무기가 되었나? (1) 미선 5012 05-17
219 <빅 히스토리>, 우주 지구 생명 인간의 역사를 통합하다 (1) 미선 4924 05-09
218 안심하고 추천할 수 있는 맥그래스의 책, <과학과 종교 과연 무엇이 다른가> (1) 미선 5772 04-15
217 <대한민국 건강 불평등 보고서>, 가난한 이들은 쉽게 아팠고 쉽게 다쳤고 쉽게… (1) 미선 6811 03-24
216 인간 인지 능력의 생물학적 뿌리, 마뚜라나와 바렐라의 <앎의 나무> (1) 미선 5592 03-21
215 <이야기의 기원>, 인간은 왜 스토리텔링에 탐닉하는가 (1) 미선 4743 03-12
214 뇌과학과 정신분석학의 만남 <뇌와 내부세계 : 신경 정신분석학 입문> 미선 4921 02-25
213 필립 클레이튼,『신학이 변해야 교회가 산다』 (1) 미선 5263 02-03
212 <양자역학의 역사와 철학> 보어, 아인슈타인, 실재론 (1) 미선 7789 01-26
211 보수주의자들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책, <보수주의자들은 왜?> (1) 미선 5193 01-16
210 [경이로운 책] 박테리아에서 인간으로, 진화의 숨은 지배자 <미토콘드리아> (1) 미선 5183 01-01
209 [좋은책 추천] <믿음의 탄생> 왜 우리는 종교에 의지하는가 (1) 미선 5519 12-07
208 [좋은책 추천] <섹스 앤 더 처치>, 젠더, 동성애, 그리고 기독교 윤리의 변혁 (2) 미선 7975 11-28
207 [좋은책 추천] 여성신학자 래티 M. 러셀의 <공정한 환대> (2) 미선 5812 11-28
206    래티 M. 러셀의 <공정한 환대>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이런 그림이.. 미선 4932 03-19
205 <화풀이 본능>, 우리 몸 안의 폭력 유전자가 복수와 화풀이를 일삼다! (1) 미선 5818 11-24
204 [좋은책 추천] 성경에 나타난 구원과 폭력, <희생양은 필요한가> (1) 미선 6903 11-19
203 <권력의 병리학> 왜 질병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먼저 찾아오는가 (1) 미선 5243 11-09
202 괜찮은 무신론 소개의 저서, <무신예찬> (1) 미선 6046 10-30
201 뇌의 책임? 뇌과학자 마이클 가자니가 교수의 <뇌로부터의 자유> 미선 5414 10-16
200 성서에 있는 사회주의, 이덕주의 <기독교 사회주의 산책> (1) 미선 5221 10-12
199 민중신학 공부에 있어 최소한의 필독서들입니다. (5) 미선 10107 10-03
198 성경공부를 정말 제대로 하시려면 꼭 필독할 책들! (2) 미선 7631 09-29
197 [추천]『오늘날의 무신론은 무엇을 주장하는가』근본주의 무신론자에게 답하다! (5) 미선 6803 09-10
196 [좋은책 추천!] 스튜어트 카우프만의 <다시 만들어진 신> (8) 미선 7110 08-14
195 [좋은책 추천] 현대 과학 종교 논쟁 - 과학과 종교와의 관계 모색 (2) 미선 6458 07-25
194 갓(God) 바이러스 감염자들을 위한 저서, <신들의 생존법> (1) 미선 6006 07-21
193 <창조자 없는 창조> 경이로운 우주를 말하다 미선 4699 07-01
192 숀 캐럴, 현대물리학 시간과 우주의 비밀에 답하다 (다른세상) (1) 미선 6962 06-25
191    브라이언 그린, <멀티 유니버스 우리의 우주는 유일한가>(김영사) (1) 미선 6572 06-25
190 성산(聖山) 아토스(Atos) 순례기 - 니코스 카잔차키스 (1) smallway 5413 06-20
189    아나톨리아, 카파도키아 smallway 4325 06-20
188 [좋은책 추천] 김영진,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철학』(그린비) (1) 미선 5731 06-13
187 보수 종교인들의 사회보다는 차라리 <신 없는 사회>가 더 낫지 않을까요? (1) 미선 5435 04-25
186 [좋은책 추천] 스티븐 로, <왜 똑똑한 사람들이 헛소리를 믿게 될까>(와이즈베… (1) 미선 5848 04-19
185 함석헌의 종교시 탐구, <내게 오는 자 참으로 오라> (1) 관리자 5119 04-04
184 [좋은책추천!]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 캅과 그리핀의 <과정신학> (1) 미선 5918 03-08
183 몸에 해로운 정치인 투표가 있다! <왜 어떤 정치인은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 (1) 미선이 5129 03-01
182 [비추] 루크 티머스 존슨의 <살아있는 예수> (1) 미선이 5442 02-26
181 자연계가 보여주는 성의 다양성, <진화의 무지개>(조안 러프가든) (1) 미선이 5399 02-19
180 페미니즘 내부의 통렬한 자기반성, <잘못된 길>(엘리자베트 바댕테르) (2) 미선이 6179 02-19
179 다윈주의 페미니즘의 걸작, <어머니의 탄생>(세라 블래퍼 하디) (1) 미선이 5827 02-18
178 페미니스트들이 껄끄럽게볼만한 책, <욕망의 진화>(데이비드 버스) (3) 미선이 7325 02-18
177 페미니스트들이 좋아할 책, <모자란 남자들>(후쿠오카 신이치) (1) 미선이 5631 02-18
176 [좋은책 추천]<이교에 물든 기독교>(현대 교회에서 행하는 관습의 뿌리를 찾아… (2) 미선이 6599 02-03
175 <신은 뇌 속에 갇히지 않는다>, 신 존재와 뇌과학 연구에 대한 비유물론적 입… (1) 미선이 6104 01-28
174 "종교와 신은 뇌의 산물", 유물론적 입장의 <신의 뇌> (1) 미선이 6721 01-28
173 [좋은책 추천] 스튜어트 머레이 <이것이 아나뱁티스트다> (대장간) (1) 미선이 6452 01-12
172 [정말 좋은 책] 기독교의 여성 잔혹사, 기 베슈텔의 <신의 네 여자> (1) 미선이 5866 01-10
171 창조론 및 지적 설계론에 대한 진지한 비판과 성찰, <다윈주의와 지적 설계론> (1) 미선이 5497 12-29
170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 하는가-창조론이 과학이 될 수 없는 16가지 이유 (1) 미선이 5913 12-29
169    진화론에 반박한다면서 내세우는 창조론자들의 주장, <엿새 동안에> (1) 미선이 5970 12-29
168 [비추!] 범재신론에 대한 보수 기독교 진영의 레포트 (1) 미선이 6621 12-17
167 <위도 10도>, 종교의 끔찍한 폐해.. 종교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가는 땅.. (1) 미선이 5727 12-11
166 함석헌을 읽자..<새 시대의 종교>,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 &… (1) 미선이 4824 12-02
165 [강추!] 마하트마 간디에 대한 불편한 진실(비폭력 성자와 체제 옹호자의 두 얼굴) (1) 미선이 8116 11-29
164 민중보다 오히려 귀족편에 섰던 공자 논리의 한계를 볼 수 있는 책 (1) 미선이 5638 11-13
163 [비추!] 진보적인 복음을 가장한 보수 기독교 입장의 기만적인 책들.. 미선이 5105 11-03
162 ★잘 안알려졌으나 정말 좋은 책 (1) 로버트 메슬의 <과정신학과 자연주의> 미선이 5541 09-30
161 생물학과 사회과학의 대결 <사회생물학 대논쟁> 미선이 5447 09-14
160 [비추!] 진보를 가장한 허접스러운 <유신론> 입장의 책들.. (1) 미선이 5829 09-07
159 Transforming Christianity and the World (John B. Cobb) 미선이 4587 09-02
158 김상구, <믿음이 왜 돈이 되는가?> (해피스토리) (1) 미선이 6624 08-27
157 "자기계발서 읽지마라!", 미키 맥기의 <자기계발의 덫>(모요사) 미선이 6799 08-07
156 <스핀닥터>, 민주주의를 전복하는 기업권력의 언론플레이 (1) 미선이 6040 07-29
155 <경제학 혁명>, 신화의 경제학에서 인간의 경제학으로 | 원제 Economyths (1) 미선이 6094 07-25
154 <나는 내가 낯설다>, 내가 모르는 나, 99%를 찾는 심리여행 미선이 6238 07-25
153 <인간의 미래>, 보다 진보적인 생명공학의 입장에서 쓴 저술 (1) 미선이 8913 04-22
152 [화제의책] 『인지자본주의』(조정환 지음) - 현대 세계의 거대한 전환과 사회적 삶… 갈무리 5526 04-21
151 <나는 몇 살까지 살까>, 1,500명을 80년 간 추적한 사상초유의 연구보고서 (1) 미선이 5820 04-15
150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긍정의 배신: 긍정적 사고는 어떻게 우리의 발등을 찍는가 … (1) 미선이 6144 04-05
149 [초강추!] 김태형, <불안증폭사회> (꼭, 읽어보셨으면 하는 좋은 책!) 미선이 6806 03-15
148 [초강추!] 도널드 셔번의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 입문>(서광사) 미선이 6644 03-12
147 [초강추] 기독교와 섹스를 말한다 "성서는 섹스에 대해 일관되지 않고 모순적이다" (1) 미선이 9430 02-21
146 [초강추] 신의 이름으로 - 종교 폭력의 진화적 기원 (1) 미선이 8793 02-21
145 미복음주의 활동가의 새로운 기독교 추구, A New Kind of Christianity: Ten Questio… 미선이 5429 02-03
144 인문학의 첨단연구 Process Approaches to Consciousness in Psychology, Neuroscien… 미선이 5350 02-02
143 [초강추!] 제임스 랜디의 <폭로>, (기적의 병치유 믿는 분들은 제발 꼭 한 번… 미선이 6713 01-30
142 [초강추!] 혁명을 표절하라 - 세상을 바꾸는 18가지 즐거운 상상 미선이 5173 01-10
141 [강추!] 에코뮤니티: 생태학적 삶을 위한 모둠살이의 도전과 실천 미선이 5467 01-10
140 Paul F. Knitter, Without Buddha I Could Not Be a Christian (1) 미선이 6163 01-01
139 [초강추!] 앨버트 O. 허시먼,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웅진지식하우스) 미선이 6313 12-07
138 [초강추!] 김태형, 『불안증폭사회』(위즈덤하우스) 미선이 5330 12-07
137 <간단 명쾌한 발달심리학> 인간 전체 이해를 이 한 권으로 시작해보시길 바람.… 미선이 7941 11-14
136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정가16,000원)을 단돈 9,600원에 구입할 수 … 미선이 5642 11-04
135 [초강추!] 폴 슈메이커, <진보와 보수의 12가지 이념 : 다원적 공공정치를 위한 … (1) 미선이 7066 10-29
134 카렌 암스트롱, <신을 위한 변론 - 우리가 잃어버린 종교의 참의미를 찾아서> 미선이 8636 10-29
133 <어플루엔자>, 자본주의 체제에서 소비와 욕망으로 인해 겪는 질병 미선이 6741 10-27
132 스티븐 호킹, 레오나르도 블로디노프 『위대한 설계』(까치) (1) 미선이 6768 10-09
131 [초강추] 얼 쇼리스, 『희망의 인문학』(이매진) (1) 미선이 7427 10-09
130 [초강추!] 매튜 폭스, 『새로운 종교개혁』(코나투스) (1) 미선이 8454 10-09
129 [초강추]존 캅의『기독교와 불교의 대화와 대화를 넘어서』(이문출판사) 미선이 5698 09-10
128 <초강추> 잡식동물의 딜레마 (1) 화상 6223 08-30
127 ▒ 테리 이글턴 『신을 옹호하다』- 골수 좌파이론가의 웅변 '신은 위대하다�… (1) 노동자 7870 08-07
126 제임스 로더『성령의 관계적 논리와 기독교교육 인식론: 신학과 과학의 대화』 고골테스 8215 07-14
125 조르조 아감벤『목적없는 수단 : 정치에 관한 11개의 노트』 고골테스 6931 07-14
124 [초강추!] 성서비평학자 바트 어만이 추적한 『예수 왜곡의 역사』(청림출판) (2) 미선이 8729 05-29
123 도올의 예수 이해, 도마복음서 주해,『도마복음한글역주』 (3) 미선이 7823 05-01
122 [초강추]『생명의 해방 : 세포에서 공동체까지』 화이트헤드와 생물학의 경이로운 만… (1) 미선이 8037 04-28
121 [초강추!] 불교의 진면목을 느끼고 싶으신 분께 꼭 추천하는 책,『깨달음과 역사』(… (3) 미선이 7273 04-28
120 [강추!] 칼뱅의 잔악한 권력에 맞선 지식인 『폭력에 대항한 양심』(슈테판 츠바이크… (2) 미선이 6337 04-14
119 [강추!]무신론자들의 일반적인 논리를 알 수 있는 책 『우주에는 신이 없다』(데이비… (2) 미선이 6920 04-14
118 [초강추!] 앨런 소칼· 장 브리크몽 『지적 사기』(민음사) (1) 미선이 8532 03-29
117 『뇌, 생각의 출현』(박문호) 미선이 7512 03-28
116 서로주체성의 이념 (4) 화상 5881 03-16
115 길희성의『보살예수』, "연꽃과 십자가는 둘이 아니라네" 미선이 6651 03-14
114 흥미 진진한 현대 물리학의 우주론 『평행우주』(저자 : 미치오 카쿠 물리학자) 미선이 6712 03-10
113 [초강추!]삼성제국의 추악한 이면을 고발하는 김용철 변호사의『삼성을 생각한다』(… 미선이 6479 02-27
112 앨리 러셀 혹실드의 『감정노동 - 노동은 우리의 감정을 어떻게 상품으로 만드는가』 (1) 정강길 8958 02-25
111 무지한 스승 -쟈크 랑시에르 (1) 라크리매 7138 02-17
110 철학 VS 철학 (9) 치노 6890 02-16
109 제국신학과의 대결구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평화를 발전시킨 바울의 창조… (5) 흰구름 7134 02-12
108    첫번째 바울: 급진적인 바울이 어떻게 보수 신앙의 우상으로 둔갑했는가 (3) 정강길 6774 02-17
107 만남 (2) 화상 5218 02-09
106 제레미 리프킨의 <유러피안 드림>(민음사) (5) 정강길 6532 02-09
105 반민주적인 너무나 반민주적인-박홍규의 니체와 니체주의 비판 (10) 정강길 9361 02-05
104 화이트헤디안의 문명진단론, 에롤 E.해리스의『파멸의 묵시록』(초강추!!) (7) 정강길 7532 01-31
103 상처받지 않을 권리 - 강신주 (6) 라크리매 8065 01-29
102 우희종/성태용/강신익/변희욱/정준영『몸 마음공부의 기반인가 장애인가』(운주사) 정강길 6321 01-24
101 김희정, 『몸 국가 우주 하나를 꿈꾸다』(궁리) (1) 정강길 6503 01-24
100 박규현, 홍덕선 지음,『몸과 문화-인간의 몸을 해석하는 다양한 문화 담론들』 정강길 7410 01-24
99 강신익, 『몸의 역사 몸과 문화』(휴머니스트) 정강길 7175 01-24
98 『우유의 역습』, 당신이 몰랐던 우유에 관한 거짓말 그리고 선전 미선이 6055 01-24
97 『뇌과학의 함정-인간에 관한 가장 위험한 착각에 대하여』 (6) 정강길 12594 01-18
96 죽은 신을 위하여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 - Slavoj Zizek (8) 라크리매 8790 01-14
95 프라이드를 탄 돈키호테(펌) smallway 5962 12-05
94 민희식 한양대 석좌교수의 "성서의 뿌리" smallway 13589 11-24
93 마커스 보그의 신간 <기독교의 심장> 흰구름 6303 11-03
92 뉴욕타임즈가 뽑은 20세기 Best 책 100선 (2) 정강길 13685 10-23
91 기독교 원죄에 대한 해석-아담, 이브, 뱀 : 기독교 탄생의 비밀 미선이 6154 06-02
90 하느님과 진화론 같이 믿으면 안되나여? 미선이 5071 08-08
89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4) smallway 6393 07-31
88 [초강추!]리처드 니스벳 저,『생각의 지도: 동양과 서양, 세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미선이 8567 07-16
87 [초강추!]EBS다큐제작팀,『동과 서: 동양인과 서양인은 왜 사고방식이 다를까』(예담… 미선이 15432 07-16
86 라마찬드란 박사의 『두뇌실험실-우리의 두뇌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 미선이 7736 07-13
85 김태권 저, 우석훈 해제,『어린 왕자의 귀환: 신자유주의의 우주에서 살아남는 법』(… 미선이 6667 07-13
84 김명수,『큐복음서의 민중신학』(도올 김용옥 서문 | 통나무) 미선이 5638 07-07
83 『종교전쟁』(김윤성, 신재식, 장대익 지음 / 사이언스북스) 미선이 9660 06-25
82 카우프만, 예수와 창조성, 서문 (1) 흰구름 5439 06-24
81 예수와 창조성 - 고든 카우프만 (1) 흰구름 6225 06-23
80 초판과 절판, 희귀본 흰구름 5321 06-22
79 [초강추!] 존 베일리스 지음, 스피브 스미스 등편,『세계정치론』(을유문화사) (1) 미선이 9137 06-15
78 『예술과 연금술 : 바슐라르에 관한 깊고 느린 몽상』 고골테스 6595 06-11
77 [초강추!] 빌프리트 뢰리히,『종교 근본주의와 종교분쟁』(바이북스) 미선이 5801 06-01
76 [초강추!] 남우현,『기독교 진리 왜곡의 역사』(지식나무) 미선이 6886 06-01
75 무신론적 근본주의, 샘 해리스의 <기독교 국가에 보내는 편지> 미선이 7572 05-30
74 앤서니 드 멜로 『유쾌한 깨달음』 (1) 고골테스 6365 05-26
73 기독교사상에 파문을 던진 윌버의 문제작, 켄 윌버,『에덴을 넘어』(한언) (3) 미선이 6855 05-07
72 [초강추!] 마르틴 우르반,『사람들은 왜 무엇이든 믿고 싶어할까?』(도솔) 미선이 6031 05-05
71 『헤겔에서 니체로』, 『20세기 서양 철학의 흐름』 고골테스 7153 04-26
70 『은유로서의 질병』, 『미니마 모랄리아』, 『학문, 묻고 답하다』 (2) 고골테스 6889 04-26
69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세요』,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고골테스 5389 04-26
68 [초강추!] 마이클 셔머,『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바다출판사) 미선이 10026 04-24
67 [초강추!] 장 지글러 『탐욕의 시대』(갈라파고스) 미선이 8589 04-21
66 [초강추!] 리처드 윌킨슨,『평등해야 건강하다』(후마니타스) +『건강불평등』 (1) 미선이 10147 04-14
65    [리뷰] 리처드 윌킨슨의 저작들에 대한 리뷰 (최성일) 미선이 6555 04-14
64 [초강추] 마이클 마멋, 『사회적 지위가 건강과 수명을 결정한다』(에코리브르) (1) 미선이 8435 04-14
63 [초강추!] 장대익, 『다윈의 식탁』(김영사) (1) 미선이 8870 04-12
62 존 쉘비 스퐁,『만들어진 예수 참 사람 예수』서평 (1) 흰구름 8498 03-29
61 만들어진 예수 참 사람 예수 (7) 흰구름 6059 03-18
60 기세춘의 <노자강의>: 천재적인 동양학의 대가 기세춘의 노자 바로 알기 (1) 한솔이 7112 03-13
59 독서클럽 안 하실래요? (7) Mosaic 5654 03-11
58 홍정수 박사의 사도신경 강해설교집 <사도신경 살아내기> (2) 흰구름 7940 02-08
57 ★ 몸의 건강, 삶의 건강을 위하여 추천하는 몇 가지 도서들 (2) 미선이 7720 01-24
56 [강추!]『스트레스 다스리기』대한불안장애학회 스트레스관리연구특별위원회 저 (1) 미선이 8599 01-22
55 [강추!] 『더 나은 세계는 가능하다』(세계화국제포럼/필맥) (1) 미선이 7666 01-22
54 신영복의 고전읽기 - 묵자 (3) 거시기 9375 01-21
53 『욕망 : 삶의 동력인가 괴로움의 뿌리인가 』(운주사) (1) 미선이 8682 12-19
52 『나, 버릴 것인가 찾을 것인가』(운주사) 미선이 6300 12-19
51 [나는 누구인가} - 라마나 마하르쉬 (7) 아트만 9362 12-19
50 [강추!] 바트 D. 어만,『잃어버린 기독교의 비밀』(이제) 미선이 7048 12-11
49 [초강추!] 마셜 B.로젠버그,『 비폭력 대화 : 일상에서 쓰는 평화의 언어, 삶의 언어… (1) 미선이 8948 12-11
48 예수 없는 예수 교회 (한완상) (3) 치노 6729 12-04
47 『자아초월 심리학과 정신의학』(Bruce W. Scotton, Alian B. Chinen, John R. Batti… (1) 정강길 9287 10-19
46 『깨달음의 심리학』(John Welwood 지음 / 학지사) (1) 정강길 7509 10-19
45 이스라엘 핑컬스타인의 <성경: 고고학인가, 전설인가> (4) 한솔이 7851 10-02
44 현대 물리학에 대한 초강추 교양도서, 브라이언 그린의 『우주의 구조』(승산) 정강길 8395 09-27
43 [초강추!] 르네 지라르,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민음사) 미선이 11360 07-30
42 김덕기, 『복음서의 문화비평적 해석』(이화) 미선이 7610 07-29
41 [서평] 조엘 박의 <맞아죽을 각오로 쓴 한국교회 비판> (4) 마루치 8226 07-05
40 브룩시 카베이의 "예수, 종교를 비판하다" 출간 (2) 뒤뜰 7531 05-09
39 "예수, 종교를 비판하다" (2) 뒤뜰 7696 04-16
38 <88만원세대>의 저자 우석훈 교수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 별똥별 7492 04-03
37 "유신론 붕괴 후 기독교 신앙은 가능한가?" 존 쉘비 스퐁,<새 시대를 위한 새 기… (1) 정강길 8217 02-21
36 ☆『성서가 말하는 동성애-신이 허락하고 인간이 금지한 사랑』(해울, 2003) 초강추!… 미선이 8772 02-05
35 읽어서는 안 될 책 소개-사해사본의 진실 (4) sydney 14372 01-08
34    만일 바울 노선의 기독교가 원래는 기독교 정통이 아니라면? (3) 정강길 8025 03-17
33 지금 독립을 꿈꾸는 모든 여성에게 권하는 책, 『나 독립한다』(일다) 정강길 6439 01-07
32 예수신화 학파의 본격적인 연구서, 얼 도허티의 『예수퍼즐』(강추!) (7) 정강길 9667 01-07
31 "자본주의와 세계화속 약소국의 비애" / 장하준 지음, 『나쁜 사마리아인들』(부키) 미선이 8125 12-19
30 몇권의 책들 소개 합니다^(^ (1) Stephen 7197 10-21
29 크리스토퍼 퀸 외,『평화와 행복을 위한 불교지성들의 위대한 도전』(초록마을) 정강길 7069 08-03
28 포스트모던시대의 기독교 영성 찾기 - 지성수, 『비뚤어진 영성』(예루살렘, 2007) (1) 정강길 8798 07-28
27 조화순,『낮추고 사는 즐거움』(도솔)-"몸 낮춰 사랑하며 자연과 함께 춤을" 정강길 6922 06-07
26 구미정, 『한글자로 신학하기』(대한기독교서회) (1) 정강길 9536 04-08
25 존 쉘비 스퐁, 『성경과 폭력』(원제: 성경이 저지른 죄악) (강추~!!) (4) 흰구름 9434 03-24
24 미국, 팍스아메리카나에 대한 보고서 - 김민웅,『밀실의 제국』(한겨레출판사) 정강길 7845 03-07
23 강인철, 『한국의 개신교와 반공주의』(중심, 2007) 정강길 8947 02-07
22 바라바시, <링크: 21세기를 지배하는 네크워크 과학>(강추!) 정강길 11189 02-04
21 ☆ 가장 높은 로열의 반열에 있는 책들!! (계속 올릴 예정) (3) 정강길 11004 01-19
20 게르트 타이센 『복음서의 교회정치학』/Ⅳ누가복음-사도행전의 교회정치학 3-5장 정강길 9398 01-14
19 보수 진영의 출판사에서 나온 해석학에 대한 좋은 책 소개 하나! 정강길 7350 01-11
18 한국 기독교 역사의 흐름 바로 보기 (특히 7, 80년대 이후) 정강길 9198 12-16
17 복잡한 세상을 단순하게 이해하기 <복잡계 개론> (강추!) (1) 정강길 10200 12-16
16 <기독인을 위한 성폭력 예방 지침서>, 기독교여성상담소 정강길 7063 12-09
15 [펌]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 전통이 가짜라면 (강추) 관리자 8002 12-06
14 [펌] 성경 왜곡의 역사 (강추) (7) 정강길 13390 11-13
13 [책] 과정신학 진영의 미부시 행정부에 대한 공격 관리자 6947 11-12
12 떼이야르 드 샤르댕의 『인간현상』을 읽고서... 정강길 9902 04-27
11 "진화론과 유신론의 유쾌한 만남" 관리자 10170 09-23
10 [책] 김덕영,『논쟁의 역사를 통해 본 사회학』(한울) 정강길 9678 09-21
9 전환시대를 위한 새로운 경제학『For the Common Good』 관리자 8327 08-08
8 J.A.T.Robinson, 현영학 옮김, <신에게 솔직히> (2) 관리자 8646 07-02
7 생태여성신학자와 함께 떠나는 "생명사랑 순례의 길" (1) 정강길 8498 06-27
6 [펌] 비폭력으로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라 미선이 7539 06-24
5 [펌] "한국전쟁, 1949년 38선 충돌 통해 형성됐다", 정병준 <한국전쟁> 관리자 8577 06-24
4 키스 W. 휘틀럼, 『고대 이스라엘의 발명 : 침묵당한 팔레스타인 역사』(이산, 2003) 정강길 10210 06-15
3 윌터 윙크의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초강력추천!!) (1) 정강길 13729 06-15
2 종교, 정치 그리고 기독교 우파(Mark Lewis Taylor) 관리자 6855 06-07
1 A. N.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 오영환 역, 『과정과 실재』(민음사) 정강길 14602 04-23



Institute for Transformation of World and Christianity